' 서울 도심 속에 숨겨진 옛 정원(庭園) ~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유적, 백사골 계곡 (2005년 5월 14일)'
2002년부터 시작된 석가탄신일 기념 사찰 순례는 올해 을유년(2005년)에도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이번 사월초파일 사찰 순례는 초파일 이전인 5월 14일 오후부터 초파일 당일인 15일 저녁까지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북한산 주변에 흩어져 있는 금선사(金仙寺), 흥국사(興國寺), 삼천사(三千寺) 등 고찰(古刹)
3곳을 순례했는데 바로 그 직전에 불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조선시대의 옛 별서(別墅) 유적 1곳을 먼저
둘러보았다.
그 별서 유적은 북악산(北岳山) 북쪽 자락에 숨어 있는 백석동천(백사골) 유적지로 별서(別墅)는 지금의
별장(別莊)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본 글에서는 5월 14일에 갔었던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유적'만을 다루고자 하며. 백석동천 다음으로
찾아갔던 금선사와 초파일에 찾아간 흥국사, 삼천사는 내용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따로 '서울 서북부
사찰순례기 1,2,3부'로 정리하였다.
* 원본을 보고자 할 경우(따로 익스플로어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여기를 클릭바랍니다.
* 사진을 올린 웹 사이트의 점검,기타 사유로 인해 아주 간혹가다 사진이 안뜰 수 있습니다.
♠ 숨겨진 별서 유적을 찾아서 ~
서울의 영원한 북현무(北玄武).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의 북쪽 자락(부암동)에는 백사골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계곡이 있다. 그 계곡에는 아직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옛 별서의 흔적이 하나 숨어
있으니 그 곳이 바로 조선 후기에 조성된 백석동천(白石洞天) 별서 유적이다.
내가 그 곳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5년 초. 그 이전에는 전혀 몰랐었지, 청와대를 끼고 있는 북악산
주변은 철조망과 군부대 시설로 가득한 일반인 통제구역으로 설마 북악산 자락에 저런 곳이 있겠느냐
생각했었지. 그러다가 그 지역에 별서 유적이 하나 숨어 있음을 알게 되면서 '정말로 저런 곳에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나의 눈을 피해 지금까지 그렇게 숨어 있었지? 정말 등잔 밑이 어둡긴 어둡구나'
싶은 생각으로 가득했지.
내가 그 곳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그런 곳을 그냥 놔둘 리는 없을 터, 그래서 조만간 한 번 가보리라
생각을 하면서도 이리저리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사월초파일이 눈 앞에 다가온다. 이번 초파일도
역시 사찰순례를 위해 북한산 서쪽 자락의 고찰(古刹)을 중심으로 순례 코스를 정하면서 백석동천 유적도
―비록 사찰 순례에 맞지는 않지만―그 일정에 포함시켰다.
원래는 초파일 당일에 가려고 했으나, 갈 곳이 너무 많아 초파일 전날과 초파일, 이렇게 이틀에 나눠서
순례 진행을 했는데 초파일 전날(14일)에 제일 먼저 부암동 백석동천 유적을 찾아 갔다.
도봉동에서 종로구 부암동까지는 약 15km로 가까운 거리이지만 차편이 마땅치 않아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서 1시간 여만에 부암동 하림각에 도착, 백사골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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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림각 정문 맞은편에 '백석동길' 이정표 부암동 백석동천 유적을 아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거의 없는 편이다. 게다가 그 유적을 알리는 이정표나 안내문 같은 것도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 없으며 오직 윗 사진에 나온 '백석동길'이란 이정표만이 거의 유일한 안내 이정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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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천(백사골)으로 들어서는 산길 입구 이정표를 따라 경사가 심한 주택가 길(백석동길)을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백사골로 들어서는 산길이 나온다.
숲 속으로 들어서면서 "저 안에 정말 그 비밀의 무릉도원이 숨어 있단 말이지, 와~ 정말 가슴 떨리는데, 빨리 가서 보고 싶다" 마치 나뭇꾼이 선녀를 만나러 가듯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그러나 산길 입구까지 빼곡히 들어찬 고급 주택들(물론 서민들 집도 많음) 거기에 수시로 고급 차량들이 낑낑대며 비탈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면서, 걸어가는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이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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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刻字) 산림욕장처럼 무성하게 우거진 산길을 약 2분 정도 들어서면 커다란 바위에 '白石洞天'이라 쓰인 옛 사람들의 낙서를 만날 수 있다.
동천(洞天)이란 명칭은 정말로 신선(神仙)들이 놀러와 몇일동안 머물다 갈 정도로 경관이 수려한 산천(山川)에 붙여지는 명예로운 이름으로 아무 산천에나 붙여지는 이름이 아니다.
이 곳이 하얀 바위의 동천 즉, 백석동천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곳에 하얀 피부의 바위와 계곡 암반들이 많이 널려져 있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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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까이서 바라본 백석동천 각자 흰 바위에 새겨진 '白石洞天' 4글자의 각자, 정말 기가 막힌 명필(名筆)임이 틀림없다.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갔던 옛 사람들은 자연 경관이 수려한 곳을 찾아와 이렇게 기념으로 낙서를 남겨 놓았는데 백석동천 역시 그들의 낙서가 2개―다른 하나는 월암(月巖)이란 각자인데 찾지 못했음, 8월 20일에 발견―나 있으니 그만큼 이곳의 풍경이 그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글씨가 새겨진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추정되며, 구체적으로 누구의 낙서인지는 알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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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내음으로 가득한 백사골(백석동천)의 호젓한 숲길 동화 속에 나오는 숲길도 저 곳만은 못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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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골 계곡 유리처럼 맑고 깨끗한 물이 졸졸졸 노래를 부르며 아래로 흘러간다. 서울 도심에서 창덕궁 후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렇게 맑은 계곡물을 볼 수 있는 곳은 삼청공원(三淸公園)과 여기 밖에는 없을 것이다. 물론 수질은 예전만은 못할 것이지만.. |
 | ◀ 계류(溪流) 속에 비친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초록의 나무들 ~
바위 곳곳에는 이 곳이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 임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푸른 색의이끼들이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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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백사골 폭포 육중한 바위 사이로 조그만 폭포 하나가 힘겹게 끼어있다. 폭포의 높이는 대략 2m 남짓, 아직까지는 이름을 갖지 못한 이 폭포에는 오랜 가뭄 탓인지 수량이 매우 적다. 거의 실처럼 가늘어버린 물줄기의 모습이 왠지 답답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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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골에서 위쪽으로 좀 올라가면 새하얀 비닐하우스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도심 속에 오묘하게 숨어 있는 비닐하우스라. 저 안에는 무슨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곳 백사골과는 별로 어울려 보이지가 않는다.
나는 백사골 위쪽은 군작전상 통제지역으로 묶여 있는 줄 알았는데 위쪽에서도 사람들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나중에 알아보니 저 길은 자하문(紫霞門)쪽으로 통한다고 하며 평창동 방면을 제외하고는 통제지역으로 등산이 금지되어 있다. |
 |
▲ 봄의 향기로 가득한 백사골 찾는 사람들이 아직은 소수에 불과하여 예전의 아름다움과 청정함을 그대로 간직한 백사골의 순수한 모습, 계류가 맑아서 도룡뇽을 비롯한 여러 수중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동네 꼬마들 몇 명이 계곡에서 멱을 감으며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서울 도심에서도 변두리나 교외(郊外)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그런 풍경을 볼 수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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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하얀 바위들이 계곡 주변에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이 곳을 찾았던 옛 사람들은 저 곳에 앉아 술 한잔 걸치며 시를 읊거나 발을 담구며 신선놀음을 즐겼을 것이다.
저런 곳에 돗자리 하나 딱 깔고 낮잠이나 한숨 잤으면 좋겠는데.. 그냥 지나치기에는 정말 아까운 곳이다. 이번 여름에는 저 곳에 자리를 피고 한가하게 피서를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
♠ 북악산 속에 숨겨진 옛 정원 ~ 백석동천 별서 유적 - 사적 4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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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성의 서북문에 해당되는 자하문(紫霞門)을 넘어서면 기가 막힌 수려한 경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자하문 너머로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지역은 북악산과 인왕산, 북한산 자락에 안겨 있는 동네로
지금은 비록 도시화가 많이 되었지만 그래도 산림(山林)등의 녹지(綠地) 비율이 서울 지역에서는 매우
높은 편으로 인왕산, 북악산 등지에서 흘러내려오는 백사골 등의 깨끗한 계곡도 아직까지 볼 수가 있다.
예로부터 서울 부근 경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이들 지역은 홍지천(弘智川)―지금은 비록 거의 폐수 급으로
전락되었으나 예전에는 수질이 깨끗하여 물놀이, 피서 장소로 이름이 높았다―을 중심으로 옛 사람들의
풍류(風流) 유적이 하나 둘, 남아 있으니, 백사골에 숨어 있는 이 백석동천 별서 유적 역시 그 중에
하나라 할 수가 있다.
이처럼 자하문 너머 북악산, 인왕산 자락의 부암동, 홍지동 지역은 고위직을 지낸 양반사대부와 조선황족
들의 별서(別墅, 별장)및 피서(避暑), 유흥을 즐기는 장소 등으로 매우 인기가 높았다.
세종(世宗)의 3자(子)인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별장, 무계정사(武溪精舍)―지금은 '武溪洞'이라 쓰인
각자만 남아 있다―가 부암동에 있었고, 안동김씨의 별장이었다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중간에
가로챈 석파정(石坡亭), 휴식과 유흥의 장소로 만들어진 세검정(洗劍亭), 연산군(燕山君)이 사냥과 여가를
즐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탕춘대(蕩春臺), 그리고 바로 이 곳 백사골 유적까지.
이 백석동천 유적은 18세기에 조성된 어느 양반사대부의 별서(別墅)로 누구의 별장인지, 별서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인지는 현재로써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상태이다.
다만 백석동천을 포함한 이쪽 계곡 일대를 '백사골(백사실)'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16세기의 활약했던
이항복(李恒福)의 별장이 이 곳에 있었다고 하여 그의 호인 백사(白沙)를 따서 백사골이라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아마도 예전 이항복의 별서가 이 곳에 있었다가 18세기 이후에 그의 후손 혹은 다른
사대부가 이 곳에 들어와 새로운 별서를 세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현재 별서 유적에는 사랑채, 정자 등의 건물터와 연못, 각자(刻字) 2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정말
신선들의 거처가 아니었을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 곳을 바라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져서는 좀처럼
다물어지지가 않았지, 서울 도심의 이런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같은 보물이 있었다니, 나는 그만 감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지, 나를 이렇게 감동시킨 곳은 전국적으로 그리 많지가 않은데, 어쩌면 나의 전생(前生)이
이 별서의 주인 혹은 머슴이 아니었을까.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그 곳에 깊이 매료(魅了)되어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이 곳을 찾아 왔다.
이 곳은 2004년까지 거의 숨겨진 명소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동네사람들만 알 정도―, 게다가 세상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지방문화재로도 지정되지 못한 채 그렇게 숨어 살았다. 그러나 아무리 숨어 있어도
휼륭한 재주나 좋은 명소는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송곳처럼(囊中之錐) 언젠가는 세상에 드러내기 마련으로
2005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에서 이 곳이 조선시대 별서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주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 전통의 휼륭한 조원(造園)의 유적임을 인정하면서부터 조금씩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2005년 3월에는 비지정문화재의 서러움에서 벗어나 사적 462호로 특진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에 걸맞는 그럴싸한 안내문이나 이정표도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관계당국의
직무유기와 무관심은 여전하다.
요즘처럼 무더운 이때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에 잠깐 시간을 내어 이 곳을 찾아와 피서를 즐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숲이 제법 무성하여 좀처럼 햇빛이 들어오지를 못해 매우 시원하며 나무가 내뿜어주는
신선한 공기를 디저트로 삼으며 백사골의 시원한 계곡물과 그들의 졸졸졸 소리를 감상하면서 독서를
하거나 낮잠을 청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거기에 이제 주춧돌만 남아버린 별서 유적을 둘러보면서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고자 했던 그들이 이 곳에서 무엇을 하면서 무슨 생각으로 살았을까, 이 곳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한번 상상해 보며 그들을 흉내내보는 것은 어떨까..
※ 백석동천 별서 유적지 찾아가기
* 백석동천으로 들어가는 산길은 하림각, 신영상가(현통사), 자하문 등 모두 3개가 있으며
모두 안내문이나 이정표 등이 없어 동네 사람들에게 문의를 하거나 먼저 그 곳을 답사한 사람들의
자료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하림각 코스를 이용하여 신영상가(현통사)코스로 내려왔으므로
우선 하림각 코스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현통사 코스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언급하겠음)
* 하림각 코스 - 하림각 건너편에 '신도수퍼'라는 가게가 있는데 그 쪽에 '백석동길'이라는 골목길이 있다.
그 골목길로 쭉 올라가면 숲으로 들어가는 산길이 나오고, 각자(刻字)와 별서유적을 만날 수 있다.
♠ 하림각 교통편 ~ 경복궁역(3호선)에서 서울시내버스 0212번(이북5도청∼종로3가∼장충동∼옥수동),
1020번(정릉,청수장∼평창동∼종로1가), 1711번(국민대학교∼광화문∼서울역∼공덕동∼합정동),
7016번(수색은평차고지∼신촌∼원효로∼시청∼상명대), 7018번(북가좌동∼명지대∼자하문∼종로2가),
7022번(구산동∼역촌동∼구기동∼경복궁역∼서울역)을 이용, 하림각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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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동천 별서 유적지(연못과 정자터) 연못 주변으로 나무들이 매우 울창하여 뜨거운 햇빛이 좀처럼 들어오지를 못한다. 물이 완전히 말라버려 완전히 풀밭이 되어버린 둥그런 연못과 주춧돌 6개, 계단만 남아 버린 옛 정자터, 멀리 사랑채로 올라가는 계단과 사랑채 주춧돌이 이 백석동천 유적의 중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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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기둥과 돌계단만 남아버린 정자(亭子) 나무로 만들고 기와로 지붕을 얹힌 정자는 오래 전에 파괴되어 없어지고 지금은 잘 다듬어진 돌기둥과 돌계단만이 그렇게 남아 있을 뿐이다. 살은 완전히 썩어 없어지고 뼈만 남아버린 사람의 시신처럼..
별서의 주인은 윗 계단에 신발들을 벗어놓고 정자에서 혼자 혹은 벗들과 시를 읊거나 세상사를 이야기하며 차나 술을 마셨을 것이다. 또한 정자 난간에 팔을 기대며 연못을 유유자적 돌아다니는 물고기와 연꽃을 바라보았겠지.
별서 주인이 좀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기생(妓生)들을 불러 정자 안에서 얼씨구~ 춤과 노래, 시를 즐겼을 것이고, 아~ 생각만 해도 정말 부러울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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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면에서 바라본 정자터와 머리 부분이 허전한 돌기둥 정자의 반은 땅에 접해 있고 반은 이렇게 연못에 접해 있다. 머리부분이 대머리처럼 허전한 6개의 돌기둥 중에서 제일 오른쪽의 돌기둥 위에 그 허전함을 달래보려는 듯, 주황색 잠바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 옷은 윗 사진에 나오는 아줌마의 것이다.
나는 그 아줌마에게 잠시 그 옷을 다른 곳으로 치워줍사 부탁을 할까 했으나 차마 부탁은 못하고 그냥 저대로 촬영을 하고말았다. 그 아줌마는 내가 이 곳을 둘러보던 40분의 시간 동안 마치 달이 지구 주위를 돌듯 계속해서 연못 주위를 돌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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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전생은 이 연못 물고기' 연못의 물고기는 이미 예전에 사라지고 지금은 까치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저 까치의 전생은 혹 이 연못에 살던 물고기는 아닐까? 마치 자신의 옛 흔적을 더듬듯, 연못 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좀처럼 떠날 줄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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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덩어리처럼 둥그렇게 생긴 연못 연못의 둘레는 약 100m 정도 된다. 예전에는 물로 가득했을, 거기에 물고기와 연꽃 같은 여러 수중 생물들도 많아서 정말 아름다웠던 연못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이렇게 돌과 잡초만이 연못에 가득하니 아~ 정말 세월무상(無想)이로다.
연못이 저렇게도 넓으니 혹 뱃놀이도 즐기지 않았을까? 아담한 배에 별서 주인과 그의 손님들이 타고, 연못 한가운데로 배를 저어서 거기서 술 한잔 하며 회포를 풀고, 연못 주변에는 기생 등의 소리꾼이 얼씨구 흥을 돋구고... 상상 만으로도 너무 즐거워진다.
그러나 별서 주인은 자신의 연못이 설마 저 지경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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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에서 사랑채로 올라가는 돌계단 자연석을 잘 다듬어서 사랑채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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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의 흔적 연못과 정자가 잘 내려다 보이는 오르막 위에 'T'자형 구조의 사랑채를 만들었다. 이 사랑채는 별서(別墅) 주인이 책을 읽고 손님을 맞이하고 밥을 먹고 자거나 하던 생활 공간으로 지금은 이렇게 주춧돌만이 멀뚱멀뚱 남아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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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의 동쪽 부분 키 작은 주춧돌 6개와 석축(石築)만이 예전 이 곳에 건물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주춧돌의 높이가 왼쪽 보다 현저히 낮아 신발을 벗고 사랑채 안으로 들어가는 곳은 아마 이 부분에 있었을 것이다.
현재 사랑채 부분에는 동네 사람들의 배드민턴장이 들어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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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의 서쪽 부분 주춧돌의 높이가 낮은 동쪽 부분과 달리 돌의 높이가 3배 정도 높다. 이 곳에 사랑방 혹은 연회를 위한 또 다른 방이 있었을 것이다. 이 곳은 육각형 정자를 비롯한 연못 일대가 한눈에 바라 보이는데 창을 열며 연못을 바라봤을 별서 주인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본다.
연못을 바라보며 시 한수를 지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한번 되새겨 보았을까? 그는 이 곳에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즐겼을 것이고 종종 벗이나 가족들과 함께 차 한잔, 혹은 술 한잔의 여유를 즐겼을 것이며 어둑어둑한 저녁에는 연못에 뜬 달을 바라보면서 경포대(鏡浦臺)의 달놀이를 따라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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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의 서쪽 부분에서 바라본 연못과 정자터 전경(全景) 오늘날로 보면 이 별서는 거의 호화 별장 수준이다. 저 정도의 거대한 연못과, 정자, 사랑채까지 지어놓을 정도라면 별서의 주인은 아마도 정승 (正承)이나 판서(判書) 이상 정도 지냈을 것이다.
벼슬에서 물러나 말년을 보내기 위한 별장의 터를 물색하던 중, 이 곳이 그의 눈에 띄었을 테고, 이렇게 또 하나의 조선시대 별서 유적이 태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저런 유적을 둘러보면서 여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바로 저 별서는 부근 백성(노역꾼), 석수쟁이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물론 18세기 이후면 노역에 대한 대가를 지급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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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에서 바라본 사랑채의 서쪽 부분 | ▲ 뒤에서 바라본 사랑채의 서쪽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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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주춧돌 | ▲ 사랑채 부분으로 올라가는 뒷쪽 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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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가려버린 사랑채 옆 물푸레나무(?) 높이가 대략 20m에 이르는 거목(巨木)으로 수령(樹齡)은 약 150 ~ 200년 정도 되었다고 한다. | ▲ 연못 옆에 하늘 높이 솟아난 물푸레나무(?) 사랑채 옆 나무와 비슷한 나이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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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환경연합에서 세운 도농룡 서식지 안내문 (2장) 서울에서는 거의 구경하기조차 힘든 도롱뇽, 맹꽁이 가족들, 그들이 도심(都心) 바로 북쪽에 이렇게 살고 있었다니.. 인간들의 편의를 위한 마구잡이 개발로 그들의 설 땅은 점점 사라져만 가고 이 곳은 이제 그들의 몇 곳 안남은 마지막 낙원이 되었다. 만약 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진다면 그 다음은 바로 우리 인간의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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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푸레나무 밑에 벌러렁 누워 있는 바위 별서를 만들 때 부근에서 가져온 자연석으로 특별히 손질을 가하지 않고 그냥 나무 밑에 놓아두었다. 자연물에 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살려 정원을 꾸몄던 옛 사람들의 조경 기법이 잘 드러낸 예라 하겠다.
이 바위는 어쩌면 별서의 가노(家奴)들이 연못을 구경하며 앉았던 곳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주인처럼 사랑채나 정자에는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니 이 곳에 앉아 연못에 돌이나 던지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았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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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에서 바라본 육각형 정자터 연못 바닥에서 바라본 정자의 돌기둥 | ▲ 육각형 정자터의 돌기둥 석수쟁이의 섬세한 조각 솜씨가 느껴지는 6각형 모양의 기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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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의 물을 채워주던 배수구의 흔적 사진 가운데 부분에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는데 거기가 연못의 배수구였다고 한다. 연못 바로 옆에 백사골 계곡에서 이 연못을 수로와 연결시켜 연못에 물을 채웠던 것,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별서는 없어지고 연못 또한 관리하는 이 하나 없이 방치되어 하수로는 허물어져 버려 더 이상 계곡의 물로 연못을 채울 수가 없다. 다만 여름철 같이 비가 많이 오는 시기에는 연못에 물이 고여 제법 연못 티를 낸다고 한다. 물론 옛날처럼 그윽한 분위기는 내지 못할 것이다.
소나기의 계절인 여름에 다시 한번 이 곳을 찾아와 물이 고인 연못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다.(8월 20일에 다시 찾아옴), 또한 단풍의 계절 가을과 눈의 계절 겨울에도 이 곳을 찾아와 연못의 모습을 사진과 내 마음 속에 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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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 돌기둥 사이로 바라본 연못과 사랑채 계단 | ▲ 정자 돌기둥에는 세월의 이끼들만 가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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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시간에 걸친 백석동천 별서유적 답사를 마무리하며 화려했을 별서의 건물들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고 지금은 연못의 형태와 주춧돌만이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래도 건물만 없을 뿐, 기본적인 형태는 잘 남아 있는 편이다.
이 곳이 그나마 이렇게 잘 보존된 것은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며 북악산 깊숙한 곳에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북악산의 은자(隱者)처럼 살고자 했던 이름 모를 별서의 주인처럼, 이 곳 역시 주인의 그런 뜻을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곳도, 그 존재가 서서히 알려지면서 찾는 이가 늘어 날 것이다. 특히 역사,문화유적이나 조경, 건축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의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키며 정신 없이 찾아오지 않을까. 나의 이 글이 백사골에 잠들어 있는 백석동천 별서 유적의 잠을 깨우는 실례를 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긴 나 또한 앞서 이 곳을 갔다온 어떤 답사동호인의 글과 신문기사를 보고 찾아왔으니까.
인터넷이나 언론을 통해 이 곳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러 인하여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백사골에 자칫 큰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심히 우려가 된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올 수록, 보이지않는 훼손은 더욱 심해질 것이고, 순수함을 간직했던 백석동천 유적과 백사골은 자칫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계당국에 무관심도 여전하니.
나의 욕심이지만 이 곳은 지금처럼 이렇게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그런 비밀의 장소로 쭈욱~ 영원히 남았으면 좋겠다. 너무 알려지면 솔직히 좋을 게 없거든. 북악산의 영원한 은자로 지금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 간직하기를 희망해 본다. 괜히 복원이랍시고 사랑채와 정자를 어설프게 복원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으며, 솔직히 주춧돌만 남아 있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좋다. 나름대로의 매력과 아름다움도 있으니, 다만 연못의 모습을 예전처럼 꾸며주었으면 좋겠다. 못에 연꽃도 심고, 물도 채우고, 언제 몰래 찾아와 유유히 뱃놀이 좀 즐겨보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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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부근에 피어난 노란 민들레꽃(혹은 애기똥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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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선을 붙잡는 백사골 계곡 영원히 머물고 싶은 신선의 세계, 백석동천 별서 유적지,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의 법칙에 따라 이제 그만 속세로 발길을 돌려야 했었지.
나올 때는 부암동 코스가 아닌 세검정(신영동) 코스로 내려왔는데 홍지천으로 흘러가는 백사골 계곡과 산길, 그리고 울창한 숲속이 정말 한 폭의 수묵담채화(水墨淡彩畵)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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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사골 아랫 쪽에 자리한 현통사(玄通寺) 계곡을 따라 펼쳐진 시원스런 산길을 따라 10분 정도 내려가면 20세기에 세워진 현통사라는 조그만 절을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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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각산 현통사 정문 문 앞에는 영롱한 색채의 연등이 대롱대롱 매달려 다음날(사월초파일)을 준비하고 있었고, 닫혀진 문의 반쪽에는 옷자락을 요란하게 휘날리며 망나니 칼을 든 약간 무서운 모습의 금강역사(金剛力士)가 그렇게 그려져 있다.
마치 누군가 다가서면 칼로 당장에 찍어버릴 같은 그의 모습, 왠지 그 곳으로 다가서기가 꺼림칙하다. 금강역사의위압적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기가 죽어 이렇게 밖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 ▲ 현통사 오른편에 백사폭포와 하얀 바위 폭포의 높이는 약 3m정도로 폭포의 이름은 따로 정해진 것은 없다. 그래서 나는 백사골에 있는 폭포란 뜻에서 '백사폭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지.
한참 가뭄이라 계곡의 수량이 적어 폭포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바늘처럼 가늘다. 북악산 백사골의 물은 폭포 아래 담(潭)에 가득히 모여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홍지천을 따라 한강으로, 다시 서해바다로 끝없는 여행을 떠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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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통사 부근에서 바라본 인왕산(仁王山)과 부암동(付岩洞) 지역 현통사에서 골목길을 따라 평창동 쪽으로 내려가니 신영상가 정류장이 나온다. 이로써 서울 도심에 숨겨진 옛 정원(庭園), 백석동천 별서 유적 답사를 마친다. 그 이후 찾아간 북한산 금선사(金仙寺)등은 사찰 순례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
* 본 글은 2005년 6월 6일에 작성
6월 18일에 완성, 약 100일 동안 숙성시켜
9월 28일부터 만천하에 공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