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선원사 연꽃기행 ~ 통진향교 / 강화도 선원사
' 강화 선원사(禪源寺) 연꽃 여행 '~
상편 - 김포 통진향교, 강화 선원사 <2005년 8월 4일>'
'연꽃이 되었구나' (노래 - 이자연)
하늘도 아닌 들이 산들도 아닌 들이 가슴의 눈물을 적시다
어라 어라 짱이다.
성원이 수련이 백련이 저 연들이 어느새 어느새 훌쩍 자랐구나
연꽃이 되었구나 연꽃이 되었구나
산이라도 되지 말고 강이라도 되지 말고
덩그런 꽃잎 되어 떨어져라
영원히 영원히 ~
강화도에 있는 선원사(禪源寺)에서는 매년 여름마다 논두렁 연꽃축제를 연다.
벌써 그 횟수가 3회,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혹은 언론이나 인터넷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오면서 이제 강화도 지역의 대표적인 지역 축제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이 축제의 백미(白眉)는 바로 논두렁에 주렁주렁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들..
부처님을 상징하며 피어난 이들 연꽃의 아름다움과 향기가 조선팔도 곳곳으로 두루 퍼져 많은 중생들을
이 곳으로 유혹한다.
그 동안 선원사 연꽃축제의 존재를 모르며 살던 나는 7월 말, 우연히 그 축제를 알고는 매우 흥분을 하였지,
강화도에서도 그런 축제를...? 논두렁에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들을 무수히 볼 수 있다니..
연꽃의 향기가 100여리 떨어진 도봉동까지 날아와 나를 유혹한다. 내일이라도 당장 오라면서..
그래서 축제의 마지막 날인 8월 4일 금요일, 아름다운 연꽃들이 보고 싶어서, 그들과 벗이 되고 싶어서,
그들을 한 잎 따가지고 오고 싶어서, 등의 소박한 생각으로 그 날 따라 매우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멀고도 가까운 섬 강화도를 찾았다.
송정역(5호선)에서 강화도로 가는 수많은 시외버스의 손짓을 애써 무시하며 약 30분을 기다려 군하리까지
가는 김포시내버스 8번(송정역∼군하리)을 탔지. 그 이유는 시외버스보다 차비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에, 보통
송정역에서 강화도까지 시외버스는 3300원, 그에 비해 8번을 타고 군하리까지 전구간 800원(버스카드), 그리고
군하리에서 강화도까지 시외버스는 850원으로 시외버스로 한번에 가는 것보다 거의 절반의 차비를 아낄 수가
있다. 다만 기다리는 불편과 갈아타는 불편은 감수해야 되겠지.
군하리에 이르러 강화도로 건너가는 시외버스를 기다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서쪽으로 걸어갔다.
잠시 만나볼 것이 있어서.. 약 200m를 걸으니 길가에 그 존재를 알리는 이정표가 나를 반겨준다.
▲ 통진향교 이정표
* 원본을 보고자 할 경우(따로 익스플로어 창으로 보고자 할 경우)여기를 클릭바랍니다.
* 사진을 올린 웹 사이트의 점검,기타 사유로 인해 아주 간혹가다 사진이 안뜰 수 있습니다.
♠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는 어디로 가고, 매미들의 울음소리만이 향교에 가득하구나..
~ 통진향교(通津鄕校)
김포에서 강화도로 20분 정도 차를 타고 가다보면 월곶면의 중심지인 '군하리'가 나온다.
지금은 비록 면(面)의 중심지라고는 하나 거의 시골마을에 불과한 조그만 동네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김포시 서부지역인 통진읍, 하성면, 대곶면을 아우르는 통진현(縣)의 행정, 문화, 교육, 군사의
중심지였다.
군하리의 서북쪽 산자락에는 옛 통진고을의 교육을 책임지던 통진향교가 옛 추억을 간직하며 그렇게
자리해 있다.
향교는 오늘날로 말하면 국립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 정부에서 전국 360개 고을마다 한 곳씩 향교를 세워
지방 백성들을 유교 이념에 맞게 교육을 시키고 공자(孔子), 맹자(孟子)와 같은 유교의 성현(聖賢)들에게
제사를 지냈다. 특히 조선의 근간(根幹)은 유교이므로 전 백성들을 유교의 이념에 맞게 정신교화를 시키고
유교를 전국으로 보급하려는 조선 정부의 의도가 담겨져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러다가 갑오경장(甲午更張) 이후, 교육 기능은 신식학교에 넘어가면서 그 기능은 크게 축소, 지금은
오직 성현들에 대한 제사 업무만 하고 있다.
이 향교는 1127년(고려 인종 3년)에 고려 정부에서 세웠다고 하는데 조선 시대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가 왜정 때 폐쇄되고 1945년 이후 쇠락해진 향교를 보수하여 지금에 이른다.
통진향교는 경기도 지방문화재자료 30호
※ 통진향교 찾아가기
* 송정역(5호선)에서 군하리까지 가는 김포시내버스 8번이나 강화도로 가는 직행버스 및 완행버스를
타고 군하리에서 하차. 도보 5분
* 서울 → 김포 → 마송 → 군하리 → 통진향교입구 (이정표가 있음)
* 인천 → 검단 → 양곡 → 군하리 → 통진향교입구 (이정표가 있음)
* 향교 관람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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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진향교의 정문 풍화루(風化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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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굳게 닫힌 풍화루(風化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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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륜당(明倫堂) | |
![]() | ◀ 풍화루의 오랜 벗 느티나무 |
![]() | ◀ 보가만 해도 시원스런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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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내삼문(內三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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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삼문을 들어서면 별로 넓지 않은 대성전 경내(境內)가 펼쳐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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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전(大成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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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재(東齋) | ▲ 서재(西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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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삼문 서쪽의 거대한 느티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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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삼문 서쪽 느티나무의 신상정보 |
이렇게 통진향교를 둘러보고 다시 군하리 마을로 나와 강화도(江華島)로 넘어가는 완행버스 1번을 타고
강화해협을 건너 강화도로 들어간다.
갑곶진(甲串鎭)을 지나 강화도의 서울인 강화읍내에 이르니 바로 앞으로 선원사 연꽃축제 현수막을
요란하게 걸어놓은 셔틀버스가 지나간다. 강화군청에서 연꽃축제를 위해 셔틀버스까지 운행하는 모양인데
저 버스를 놓치면 그 다음 차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 차를 반드시 타야 된다'라는 압박감이
나의 마음을 짓누른다. 다행히 강화터미널까지 두 버스가 비슷하게 움직인지라 터미널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먼지가 나게 뛰었으나 5초의 차이로 셔틀버스는 선원면 쪽으로 유유히 사라져 버린다.
무정하게 가버린 버스의 뒷꽁무니만 열심히 쳐다보며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었으나 다 소용없는 짓.
강화군에서 지정한 선원사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수 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
물론 강화터미널에서 선원사로 들어가는 군내버스가 있긴 하나 1일 8회 정도 밖에 운행을 안하기 때문에
차라리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낫을 것이다. 게다가 오늘이 축제 마지막 날이라 셔틀버스가 자주
다니겠지 싶은 희망을 품으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차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지 20분 만에 선원사로 가는 또다른 셔틀버스가 나에게 다가온다. 선원사까지는 달랑 500원
(군내버스는 850원), 대신 선원사에서 읍내로 나올 때는 무료이다. 즉 500원에 왕복이 모두 해결이 되는
셈이지.
셔틀버스를 타고 지산리, 더러미 방면으로 약 15분을 비집고 들어가니 연꽃축제의 현장 선원사 일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선원사 주변은 연꽃 피서객들이 끌고 온 수레들로 거의 정신이 없었으니. 주차요원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오는
수레들을 정리, 통제하느라 손발이 닳도록 움직이고 있었고, 몇몇 얌체 수레들은 연꽃축제장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무례까지 범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차량 흐름은 원만했다.
더러미 방면으로 가는 도로를 기준으로 북쪽에는 선원사, 남쪽에는 연꽃 축제장이 자리해 있는데 양쪽 모두
사람들로 홍수가 날 지경이다.
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연꽃축제장, 아 1초라도 빨리 그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과감히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우선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이 만들어진 역사의 현장 선원사터를 먼저 찾았다.
♠ 팔만대장경을 제조하며 항몽(抗蒙)의 의지를 다진 곳,
최씨정권과 고려 황실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고려 후기 최대의 사찰로 발전,
그러나 언제 폐사되었는지 오리무중.. 폐허 속에서 한 송이의 연꽃처럼 다시
태어난 ~ 강화도 선원사(禪源寺)
▲ 선원사터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는 고려시대 사찰인 선원사의 옛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의 선원사는 옛 흔적의 아래쪽 산자락에 자리해 있는데 발굴 이후 복원된 선원사의 거대한 옛 터를
본다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것이다.
13세기 중반. 동북아에서 동유럽까지 닥치는 데로 짓밟으며 천하통일을 꿈꾸었던 몽고, 그들의 마수
(魔手)가 결국 동방의 조용한 나라 고려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몽고는 13세기 초반부터 고려에게 자신을 상국(上國)으로 받들라고 줄기차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미개한 북적(北狄) 주제에 감히 어디와서 행패야. 맞짱 한번 뜰까?'하면서 그들의 요구를 묵살한다.
그러던 중, 고려에 놀러온 몽고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부근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몽고 조정은 심한 발작증세를 보인다.
곧이어 1231년 자신의 사신을 죽였다는 핑계로 수십만의 대군으로 고려를 공격하는데 이 때부터
1270년까지 장장 40년에 걸친 고려와 몽고와의 숙명적인 대맞짱이 전개된다.
그 당시 고려의 최고 실력자인 최충헌(崔忠獻)이 죽고 그의 장자(長子)인 최우(崔瑀)가 최씨정권의
2대 군주가 되어 고려를 장악했는데 고려 황실로부터 진양후(晉陽侯)라는 작위(爵位)까지 하사받은
그는 몽고와 맞짱을 선포하고 그들이 바다에 약하다는 것에 착안, 국도(國都)를 강화도로 옮긴다.
몽고와의 맞짱 14년째인 1245년, 최우는 몽고와의 전쟁이 예상 외로 길게 전개되는 것에 불안을 느끼며
불교의 힘이라도 빌릴 생각으로 나라의 재정과 자신의 가산을 모두 쏟아부어 선원사(禪源寺)를
창건하였다.
절이 완성되던 날, 성대한 낙성회(落成會)가 열리고 진명국사(眞明國師)를 비롯한 고려의 유명 승려
3천명이 초대되었다고 하니 그 낙성식이 얼마나 호화찬란했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고려의 최고
실력자인 최우가 세운 사찰이니 그 화려함은 정말 이루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절이 세워지던 그 시간에도 고려의 수많은 백성들은 몽고군과 싸우면서 하나둘 죽어가거나, 혹은 포로로
잡히고, 굶주림에 허덕이고, 지나친 조세에 허리가 휘이고.. 정말 괴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게다가
몽고는 농번기와 추수기만 골라서 고려로 놀러오니 제대로 농작물도 못심고 또는 수확도 못하고.. 그런
상황이었는데―최우의 최씨일가, 지배층들은 그런 와중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그들의
피와 땀이 서린 조세와 온갖 재물로 이렇게 화려한 절을 세우고 어울리지도 않는 여유를 부린 것이
바로 최씨일가를 비롯한 황실, 귀족들이었다.
최우가 국내에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불사(佛事)를 강행한 것은 겉으로는 불교의 힘을 빌려 몽고를
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속 뜻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과시하기 위함일 것이다.
강화도가 몽고에게 점령되면 자신의 최씨정권은 그날로 아작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발악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 선원사는 그 발악의 일환으로 세워진 것이다.
선원사가 세워지고 최씨정권과 친분이 있던 진명국사가 초대 주지가 되었으며 1246년 고종(高宗)이
친히 행차하였다.
그 이후 최우의 지시로 선원사에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무려 10여년에 걸처
81000장이 넘는 대장경판(大藏經板)을 만들었으며 완성된 경판은 1398년까지 선원사에서 보관하였다.
1290년 충렬왕(忠烈王)이 거란의 공격을 피해 선원사에서 몇달 머무른 적이 있으며 고려가 망할 때까지
고려 조정으로부터 막대한 지원을 받으며 고려 최대의 사찰로 성장한다.
조선이 개국되고 1398년 5월, 태조(太祖)의 칙명(勅命)으로 선원사에 있던 대장경판 모두를 서울로
옮겼는데 태조가 친히 용산(龍山)까지 나와 대장경판을 맞이했다고 하며 그 이후 해인사(海印寺)로
옮겨진다.
이렇게 대장경판이 서울로 떠난 이후, 무슨 영문인지 선원사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나오질 않는다.
경판이 옮겨진 직후 인위적 혹은 천재지변으로 파괴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자세한 내막 역시 현재로써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의문의 폐사를 당한 이후, 터만 황량하게 남아오다가 1977년, 사적 259호로 지정되었으며 1993년에
절터 아랫 쪽에 조그만 전각을 세워 600년 전에 끊긴 선원사의 유지를 잇기 시작했고, 1996년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인천광역시의 지원으로 절터를 발굴하여 초석과 건물터, 수로(水路)등을 복원하였으며
2003년부터 '논두렁 꽃축제'를 개최하여 벌써 3회를 맞이했다.
▲ 2000년 발굴 당시의 선원사터
절 경내에는 큰법당, 요사, 유물전시관 등의 건물이 있으며 연꽃축제로 절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아온다.
폐허 속에서 한송이의 연꽃처럼 다시 태어난 선원사, 지금의 선원사는 어디까지나 지금의 모습일 뿐.
계속해서 불사를 진행하고 있으며 초석만 남은 절터에 장경각(藏經閣), 대웅전을 비롯한 전각들을
복원할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 선원사 찾아가기 (2005년 8월 현재)
* 신촌터미널, 영등포역, 송정역, 인천터미널, 부평역에서 강화읍으로 가는
시외버스 이용,
강화터미널에서 더러미행 군내버스를 타고 선원사에서 하차, 1일 8회 운행
* 논두렁 연꽃축제기간에는 강화군청에서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셔틀버스 운행노선 '강화터미널 -> 선원사 -> 강화역사관(갑곶진) 주차장 ->
강화터미널 (순환운행)'
운행횟수와 배차간격, 요금은 매 축제 때마다 다름.
(2005년에는 2대가 약 20분 간격, 요금은 왕복 500원)
* 절 앞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으며 연꽃 축제기간에는 강화역사관 주차장을
이용하여 셔틀버스를 타고 선원사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승용차로 갈 경우
'서울 → 김포 → 강화대교 → 다리 건너서 최초 3거리에서 좌회전 → 해안도로
→ 선원사 이정표를 보고 우회전 → 더러미 → 선원사'
'서울,인천 → 양곡 → 검단 → 초지대교 건너서 우회전 → 해안도로 → 선원사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 → 더러미 → 선원사'
◀ 선원사를 찾아온 중생들을 반가히 맞이하는 지장보살(地藏菩薩)
오른손에는 육환장(六環杖), 왼손에는 조그만 병 같은 것을 쥐며
연꽃이 피어난 남쪽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육환장의 모습이 거의 솟대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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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증맞은 모습의 연꽃잎 | |
![]() | ◀ 물을 떠 먹는 동심(童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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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장대(輪藏臺)를 돌려보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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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원사 유물전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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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들이 정신없이 열려 있는 선원사의 큰법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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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법당 3존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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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 부도(浮屠) | ▲ 큰법당 옆에 팔각원당형 부도(浮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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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돌절구 |
♠ 궁궐보다 화려했던 선원사의 옛터를 거닐다.
선원사의 가람배치는 남쪽을 바라보는 남향(南向)으로 회랑 ~ 중문 ~ 금당 ~ 장경각(?) 순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끝으로 갈수록 지대(地臺)가 높아져 장경각에서는 절터 내부는 물론 연꽃축제장까지 한눈에
바라보인다.
금당 앞에는 으레 세워놓는 탑의 흔적은 나오질 않아 아마도 탑은 세우지 않았던 모양이다.
조그마한 선원사 경내와 길 건너편 연꽃축제장은 사람들로 만원이나 유독 절터에는 어느 누구도 발걸음을
하질 않았다. 다들 연꽃에 눈이 어두워 절터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쓸쓸한 분위기의 절터 전체는
잠시나마 나의 전용 공간이 되었다.
이 절터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주춧돌과 계단, 석축을 복원한 것으로 이제 그 위에 그 시절에
맞는 건물만 세워준다면 옛 선원사의 부활은 이제 시간문제일 것이다.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파괴되었는지 선원사터는 지금까지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아픈 추억을 꺼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겠지만, 넓은 절터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절의 주요 폐사(廢寺)
요인(자연재해, 화재, 방화, 전쟁..)들을 하나씩 접목시키며 절이 파괴되던 그 날의 처참한 아비규환을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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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로 들어서는 거대한 계단(첫번째 계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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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단을 오르니 또 다른 계단(2번째 계단)이 나를 기다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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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 회랑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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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2번째 계단) | |
![]() | ◀ 돌다리 오른쪽의 수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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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번째 계단을 오르면 금당(金堂)의 옛 터가 나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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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터 안내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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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터의 서쪽 부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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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에서 바라본 금당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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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각이 있었던 부분으로 보이는 흔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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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터의 제일 윗부분으로 올라가는 3번째 계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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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터 제일 윗부분의 오른쪽 건물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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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각으로 보이는 건물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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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정리가 안된 절터의 윗부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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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저리 굴러댕기는 절터의 주춧돌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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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무덤처럼 쌓여 있는 기와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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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수로의 흔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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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이 연못으로 떨어지던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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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과 수로의 흔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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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쪽 회랑터와 계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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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쪽 회랑터와 계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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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보살(牛菩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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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보살 |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8월 11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8월 22일
* 상편 숙성기간 ~ 2005년 8월 23일 ~ 11월 2일
* 공개일 - 2005년 11월 3일부터
* 하편은 2005년11월5일 이후부터 공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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