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한산도 역사기행 ~ 한산도 제승당 (이충무공 유적지)
'거제도(巨濟島) ~ 한산도(閑山島) 역사 기행 (2005년 10월 30일)'
'하편 ― 한산도 제승당(制勝堂), 한산대첩의 현장 한산도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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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승당 들어가는 길 ~
한산도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이순신 장군이 수루(戍樓)에 홀로 앉아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읆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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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으로 들어서는 입구 ~ 한산문(閑山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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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조선 함대(艦隊)로 가득했을 제승당 앞 갯뻘 (3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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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건너 한산대첩비가 세워진 문어포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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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건너 한산문과 매표소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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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우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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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으로 들어가는 2번째 관문, 대첩문(大捷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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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럭무럭 자라난 녹색의 팔손이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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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분위기 가득한 ~ 제승당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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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으로 들어서는 3번째 관문 ~ 충무문(忠武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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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문에서 바라본 제승당 가는 길 |
♠ 조선 수군의 중심지, 충무공의 얼과 정기가 서려 있는 곳 ~
한산도 제승당(制勝堂)
한려수도(閑麗水道)의 동쪽 관문인 한산도, 그 북쪽 두억리 언덕에는 이순신 장군 및 그의 수군들의 우국충정이
담긴 '제승당'이 한산대첩의 현장을 바라보며 그렇게 자리해 있다.
이 곳은 1592년 한산도 대첩 이후, 충무공이 지금의 자리에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행영(行營)을 설치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이후 그는 수전(水戰)의 공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으로 임명되었고
1593년 8월, 통제영의 본부를 여수에서 이 곳으로 옮겨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설치하고 그 본부인
운주당(運籌堂, 지금의 제승당)을 세우면서 1597년까지 삼도(三道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수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1593년 이후 조선과 왜가 휴전(休戰)을 맺으면서, 이순신은 이 곳에서 계속 수군을 지휘, 통제하며 계속
전력을 증강시켰고 수군만의 과거 시험을 치러 많은 인재들을 등용하는 한편, 오갈데 없는 백성들을 한산도와
그 주변에 정착케 하여 둔전(屯田)을 하였다.
1595년, 화재가 발생하여 제승당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바로 복구되었으며, 1597년 원균(元均)이 수군을
이끌고 부산 공격을 시도하다가 실패, 한산도로 철군하던 중. 거제도의 북쪽 칠천량(漆川梁)에서 하룻밤을
머무는 사이 10만에 가까운 왜의 수군, 육군에 기습 공격으로 이순신이 힘들게 키워놓은 조선 수군은 거의
전멸을 맞는다.
이 어이없는 패전에서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全羅右水使 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忠淸水使 崔湖)가
전사하고 전선 160척, 수군 1만 5천명이 전사 혹은 왜의 포로가 되었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격파한 왜군은 그 기세를 몰아 바로 한산도를 접수하여, 통제영을 모조리 불질러
버렸다.
그 이후 터만 쓸쓸히 남아오다가 1739년, 107대 통제사인 조경(趙儆)이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운주당의
옛 터에 다시 전각을 세워 그 이름을 제승당(制勝堂)이라 하면서 친필 현판(懸板)을 걸었다.
그 때부터 1896년 고종의 칙령(勅令)에 따라 통제영이 없어질 때까지 조선의 남쪽바다를 지켜왔으며,
망국(亡國) 이후 1911년 통영, 거제 지역 유지들이 '충렬사영구보존회'를 설립하여 왜국(倭國)의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제승당 유적을 굳굳히 지켜나갔다.
해방 이후, 1951년 '제승당영구보존회'는 재단법인 '통영충렬사'를 설립하였으며 1976년 박정희 정권에서
제승당 유적을 성역화(聖域化) 하려고 하자, '통영충렬사'는 그들의 소유인 제승당을 경상남도에 기증하여
경남도청에서 관리하게 되었으며 2000년에 이르러 '통영충렬사'에 관리를 위탁하여 지금에 이른다.
한산도 제승당 유적은 18만 평에 이르며, 제승당과 영당, 수루, 수호사 등 20동의 건물과 내삼문(內三門)을
비롯한 7개의 문이 있는데 이들 유적을 통틀어 보통 '제승당'이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는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지'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이충무공 유적지이자 임진왜란 유적지로 그를 흠모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배를 타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며 이 곳을 찾는데. 특히 왜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왜 열도에서도 이충무공에 대한 관심과 연구, 관련 논문이 우리나라 못지 않으므로
아마도 그런 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제승당 유적은 사적 113호,
※ 한산도 제승당 찾아가기 (2005년 11월)
* 통영 여객선터미널에서 제승당으로 가는 뱃편 이용, 통영에서 매시 정각 (7시 ~ 18시)에 출발
(한산도로 가는 뱃편은 여러 노선이 있으므로 반드시 '제승당'행 배를 이용할 것)
운임은 편도 4100원, 왕복 7800원으로 소요시간은 보통 25분, 단 관암 경유 뱃편은 약 40 ~ 50분 소요
* 제승당 나루터에서 통영으로 가는 뱃편은 매시 30분(7시 30분 ~ 18시 30분)에 출발
* 차량 수송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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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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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내(內) 현자총통(玄字銃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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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량해전도(露梁海戰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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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龜船) (사진 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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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조팔품도(明朝八品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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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통제사 행적비(水軍統制使 行蹟碑) 3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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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통제사 행적비 4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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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통제사 이한창(李漢昌, 이순신의 6대손) 송덕비 |
♠ 수루(戍樓)에 올라 한산대첩(閑山大捷)의 현장을 바라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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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 시귀(詩句)의 현장 ~ 수루(戍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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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 앞에 서 있는 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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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 안에 거대한 북(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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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 안에 걸린 '한산도 달 밝은 밤에 ~' 시 현판(詩 懸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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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에서 바라본 한산 앞바다 (한산대첩의 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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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루 옆에 세워진 한산대첩 상황도 안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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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忠武祠) 홍살문 | |
![]() | ◀한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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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로 들어서는 내삼문(內三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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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정화 기념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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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유허비(遺墟碑) - 오른쪽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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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유허비(遺墟碑) - 왼쪽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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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승당 유허비 안내문 |
♠ 충무사에서 이충무공에게 예를 드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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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忠武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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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 영정(影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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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송나라의 역사서를 읽고 썼다는 독후감(讀後感)이 |
♠ 제승당의 가을 ~ 거기서 만난 동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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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승당에도 변함없이 가을은 찾아왔다. (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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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정한 모습의 나무 1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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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정으로 내려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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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방(四方)이 활짝 열려 있는 한산정(閑山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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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정(閑山亭)과 활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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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정에서 만난 묘공(猫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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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바닥을 뒹구는 묘공(猫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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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을 먹고 있는 묘공(猫公) (2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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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을 먹고 양지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는 묘공(猫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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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살 한번 쏴보고 싶다 ~ 한산정 과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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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승당 주변 풀밭에 어느 토공(兎公) |
이렇게 하여 약 2시간에 걸쳐 한산문부터 제승당, 한산정까지의 제승당 유적지를 모두 둘러보았다.
한산대첩비까지 보고 싶었으나 제승당에서 들어가는 길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하였지. 한산대첩을 거둔 조선 수군의 힘찬 함성을 고이 간직한 한산도 앞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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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승당을 나오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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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산도 제승당 나루터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 |
제승당 나루터로 나오니 어느덧 14시 20분.. 매시 30분 마다 통영 가는 배가 출발하므로 이제 10분만 기다리면
다시 육지로 나가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다 되도록 배는 나타날 기미가 안보이고 14시 35분이 되자 통영에서 온 배가 나루터로 들어와
육지에서 온 많은 사람들과 수레, 화물을 한산도로 내뱉는다.
하선(下船)이 끝나자 이제 제승당 답사객과 한산도 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수레, 화물이 통영으로 가는 배에
승선을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타서 3등실 수준의 별로 넓지 않은 객실 내부와 바깥
갑판은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나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지.
그런데 내 부근에 아까 전 한산도에 들어올 때 같은 배를 탔던 왜인 가족들이 눈에 띈다.
여행이 즐거웠는지 그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 저들은 과연 '제승당'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무엇을 머리와 마음 속에 담아가지고 왔을까? 무척 궁금하다.
14시 40분이 되자, 배는 한산도에 대한 미련을 털며 한산만으로 짧은 항해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번 배를 바로 통영으로 가지 않고 한산도에 두억리와 관암마을을 들려서 통영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통영까지 거의 50분이 걸렸지. 아까 전 한산도로 들어올 때보다 무려 배가 걸렸다.
따끈한 객실 내에서 책을 보니 슬슬 졸음이라는 넘이 나를 희롱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잠은 이따가
경성으로 올라갈 때 잘 것이다. 생각하며 정신력으로 버텼다. 솔직히 잘 여건이 아니었음..
15시 30분, 통영여객선터미널에 도착. 다시 한반도에 품으로 들어왔다. 내가 육지 출신이다 보니 아무래도
섬보다는 육지가 더 포근한 것 같다.
통영에 이른 후, 우선 통영시외터미널을 찾았다. 그날이 휴일이다보니 버스표를 미리 사둘 필요가 있어서,
통영터미널에서 16시 40분에 서울 서초동으로 가는 시외버스 표를 샀는데 운임이 무려 18100원..
2005년에 내가 탄 시외버스 중에서 제일 비싸게 주고 탄 것 같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부근에서 밥을 먹고, 통영과 헤어질 시간을 기다리니 어느덧 16시 30분..
통영과 거제도에 대한 모든 미련을 깨끗히 털어내며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에 승차했다.
이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시간인 것이다.
16시 40분이 되자 좌석을 거의 채우며 통영을 출발.. 고성, 사천을 거쳐 중부고속도로 연장구간을 통과하여
3시간 만에 대전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땅이 참 작긴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뚫리는 고속도로가 우리의
강토를 더욱 좁게 만드는 것 같아 내심 아쉽다. 우리나라 강역(疆域) 내에서도 열차로 10시간, 버스로
10시간을 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이제 5 ~ 6시간 이내에 모두 커버가 되버리니..
서울에서 부산도 이제 그 잘난 고속전철로 3시간이면 커버가 가능하질 않던가..?
대전 부근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다시 북쪽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고속도로의 교통상황은 예상외로 매우
좋아서 시원하게 잘 뜷린다.
그러나 안성 부근에 이르니 갑자기 차가 막히기 시작한다. 내 기억으로는 수원까지 겨우겨우 기어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래서 서울 남부터미널에 통영 출발 6시간 만인 22시 40분에 도착했다.
~~ 이로써 거제도와 통영(한산도) 역사 기행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그렇지만 가끔씩 햇갈린다. 저 기행을
과연 내가 간 것이 맞을까? 혹 꿈 속에서 간 것을 진짜 간 것으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
모든 것이 정말 일장춘몽(一場春夢)이로다.. 그런 나의 행적이 모두 남가일몽(南柯一夢)화 되어가니..
그것이 너무 두렵다. 언젠가 나란 존재도 그 속으로 영영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
* 답사, 촬영 일시 - 2005년 10월 30일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11월 23일
* 하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11월 26일
* 하편 숙성기간 ~ 2005년 11월 26일 ~ 12월 22일
* 공개일 - 2005년 12월 24일부터
Copyright (C) 2005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