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권 사진,답사기/서라벌 경주

경주시내 답사 (경주읍성, 경주관아, 경주신사)

도봉산 고양이 2006. 1. 27. 00:10



' 경주 ~ 부산 역사 기행 (2005년 11월 19일)'
'상편 ― 경주역전 3층석탑 ~ 경주읍성 ~ 경주관아터 ~ 경주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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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중상, 중하, 하 4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경주에서' ~ 김연균(金年均)

흘러만 왔다.
내가 여기에 오기까지는
살상(殺傷)의 어둠, 그 어둠을 씻는
천년 세월은 가고
밤 새워 한숨지며 머리를 닦던
나의 아버지, 아버지 선조들의
손길을 따라
이곳에 잠시 머문다. 신라여
오오 신라여,
오늘은 너가 내 몸 속에 잇고
내 몸에 구슬 같은 눈들이 떠서
바다로 간다.
저무는 바다 위에 눈들을 바쳐
너를 알고자,
나의 몸에 서리는 빛을 보고자
그 오묘(奧妙)한 빛을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던 11월 중순, 부산 해운대에서는 APEC 21개국 정상회의가 열렸다.
그래서 APEC이 열린 부산의 분위기도 살펴보고, 2년 이상 발걸음을 하지 못했던 옛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
(慶州)도 보고 싶고 해서, APEC 정상회의의 마지막 날인 11월 19일 경주와 부산 지역을 찾았다.

11월 19일 새벽 0시 6분, 천안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심야 완행 열차에 몸을 의지하며 동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대전역에 이르러 전혀 예상치도 못한 기관차 고장으로 인해 그 것을 교체하느라 무려 30분을 정차했다.
그 여파로 부산까지 30분 이상의 지연이 도미노처럼 이어졌는데. 열차의 고질적인 지연 행위는 뭐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목적지인 동대구역에는 정시보다 무려 32분이나 늦은 새벽 3시 18분에 겨우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은 열차 지연에 대해 적지 않은 불만을 드러내 보였지만, 나는 지연에 대해 그리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지연시간 50분을 채우지 못해 소정의 지연료를 받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지. 어차피 제 시간에
도착해보았자. 그 새벽 시간에 할 것도 없고, 그 상태에서 5시 20분까지 시간을 때워야 되니 이렇게 지연한
덕에 따뜻한 열차 안에서 30분이나 더 잘 수 있고, 나로써는 매우 고마운 일이 아니던가.?


열차에서 내리니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아직 11월 중순이건만 겨울의 제국주의(帝國主義)는 벌써부터 그
맹위를 떨치고 있었는데, 그 날은 11월 들어서 제일로 추웠던 날로 기억이 된다.

별로 따뜻하지도 않은 동대구역사(驛舍) 내로 들어가 책을 보면서 억지로 120분의 시간을 때웠는데, 시간도
나의 그런 마음을 헤아려 준 듯, 유수(流水)처럼 잘만 흘러간다.

4시 30분이 넘자, 오랜 만에 동대구역의 명물인 냄비우동을 먹고자 밖으로 나왔으나. 왠걸 우동집이 없다.
그래서 역무원에게 물어보니 역사(驛舍) 안쪽으로 옮겼다고 하여, 찾아가 보았으나 나를 반기는 것은 철옹성
처럼 굳게 닫혀진 우동집 뿐...
예전에는 새벽 3시부터 문을 열더니만, 그 날 따라 5시가 넘도록 좀처럼 문이 열리지를 않는다.
그래서 우동을 먹고자 하는 나의 마음을 과감히 접고 꿩 대신 닭으로 옆에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이른 아침을
때운다.

새벽 5시, 표 사는 곳에서 경주까지 통근형 열차표를 구입(2000원), 냉기(冷氣)가 가득한 승강장으로 내려간다.
경주를 거쳐 포항으로 가는 통근형 열차를 타기 위해서..
이 열차는 고속전철이 생기기 이전에는 5시 15분에 출발했는데, 주로 무박 코스로 경주에 갔을 때 자주 이용
하던 열차였다.


5시 20분이 되자 온돌방처럼 따뜻한 통근형 완행열차는 문을 닫고 동대구역을 출발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존의 동촌, 반야월 방면으로 안가고 경산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예전부터 대구선 이설
공사를 한다는 말은 들었으나, 벌써 그 공사가 끝난 모양이다. 경주역에서 확인해보니 11월 15일에 이설 공사가
완료되어, 기존의 동촌, 반야월 코스는 없어지고 고모, 금강(안심 남쪽 동네)쪽으로 노선이 변경되었다.

하양역을 지나서부터 슬슬 잠이 나를 희롱한다. 나는 그 희롱에 한없이 빠져들고.. 희롱에서 깨어보니 어느덧
열차는 형산강(兄山江)을 건너고 있었다. 서라벌의 찬란한 여명(黎明)을 맞이하면서..
잠시 뒤 6시 40분, 서라벌 경주의 관문 경주역에 도착했다.

거의 31개월 만에 와보는 경주, 그러나 날씨가 너무 춥다. 그 동안 자신에게 발걸음도 하지 않은 나에 대한
강한 유감의 표현일까? 나름대로 발걸음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변명을 해보았으나 역시 통하지는 않는다.
한 때는 한,두달에 한 번 꼴로 오던 곳이었는데, 그 동안 내가 너무 무정했던 것 같다.


♠ 경주역전 광장에 세워진 황오동(皇吾洞) 3층석탑 ~

▲ 경주역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용마루 양쪽으로 하늘로 솟은 치미(雉尾)가 눈에 띈다.

▲ 경주 역전에 세워진 황오동(皇吾洞) 3층석탑 ~ 경북 지방문화재자료 8호
조용한 분위기의 경주역, 역시 천년 고도의 관문(關門)답게 역전 광장에는 신라 후기에 조성된
3층석탑 1기가 오랜 침묵을 지키며, 그렇게 서 있다.
예전에는 금당(金堂)에 모셔진 불상을 바라보며 서 있었고, 절(獅子寺)이 없어진 후에는 홀로
그 자리를 지키며 옛날을 꿈꾸었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경주역의 장식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 세월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며
이 곳으로 강제 이전된 황오동3층석탑 ~
이 탑은 원래 효공왕릉(孝恭王陵) 부근
사자사(獅子寺)터에 있던 탑으로 1936년에
왜인(倭人)들이 이 곳으로 옮겼다.

▲ 3층석탑 서쪽에 있는 석탑 부재(部材)와 비석의 지붕돌
온전한 모습의 그들은 온데간데 없고 지금은 이렇게 그 일부만이 처량하게 남아있다.

※ 황오동 3층석탑 찾아가기 (* 2006년 1월 기준)
* 경주역전 광장에 있음
* 경주시외,고속터미널에서 시내 방면으로 들어가는 시내버스 아무거나 타고 경주역 하차,


이렇게 간단하게 황오동 3층석탑을 둘러보고 시내로 들어갔다.
따뜻한 남쪽나라를 기대하고 왔건만, 겨울의 제국군은 나의 그런 희망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날이 얼마나 매섭던지, 손을 밖으로 꺼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정도.. 잠시만 밖으로 내밀어도 금세 차가운
얼음 덩어리가 되버리면서 사진을 찍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아침이건만 역전 건너 시장은 말 그대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인도(人道)도
모잘라서 차로의 1차선까지 점유할 정도로 사람들과 장꺼리로 넘쳐나고, 그러인해 시장의 분위기는 정말 겨울의
제국주의를 녹여버릴 정도로 그 열기는 대단했다.

시장을 지나면서 문득 '경주읍성'이 생각이 난다. 그래서 오랜 만에 그를 보기 위해 동부동 주택가 쪽으로
들어갔다.


♠ 민가의 담장으로 전락해 버린 ~ 옛 경주읍성(慶州邑城)

▲ 경주읍성(慶州邑城) - 사적 96호
이 성은 정확히 언제 축성(築城)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동경통지(東京通志)에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읍성을 개축(改築)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부터 읍성이 존재해 왔음을
알 수가 있는데, 신라가 사라진 이후, 고려정부는 신라의 옛 서울인 경주를 동경(東京)이라
칭하며 고려 3대 도시의 하나로 중요시 했으므로 그 동경의 읍성으로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읍성은 15세기에 다시 축성된 것으로, 임진왜란 후반(1597년)에는 박진(朴珍) 장군이
이장손(李長孫)이 만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이용하여 왜군을 격멸(擊滅)하고 경주성을
탈환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632년(인조 8년)에 동문 등의 성문을 다시 만들었다고 하며, 그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약
4027척(1.2km 정도), 높이는 12척(4m정도)으로 동, 서, 남, 북문의 사문(四門)을 갖추고 있었다.
동문은 해를 향한다는 뜻에 향일문(向日門), 서문은 망미문(望美門), 남문은 징례문(徵禮門),
북문은 공진문(拱辰門)이라 불리웠으며, 남문에는 그 유명한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
걸려있어 매일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왜정 때 이르러 도시계획의 미명(微明)아래 경주읍성을 철저히 파괴시켰으며 지금은 동쪽 성벽과
밖으로 약간 튀어나온 '치'등, 약 100m 정도만 초라하게 남아 이 곳이 옛날 읍성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성벽은 가로 40~50cm, 세로 20~30cm 크기의 잘 다듬은 돌로 축성되었으며, 간혹 성벽 가운데
신라시대 석탑이나 석조물 등이 가끔씩 발견되기도 하였다.

2004년에 경주읍성의 일부가 무너져 내리는 등, 건강 상태가 심각해지자, 사업비 약 2억을 들여
보수공사를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지대석(址臺石), 건물터 등의 다량의 유구(遺構)들이
발견되었다. 그 유구들은 현재 읍성 앞에 4줄로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 경주읍성 찾아가기.. (* 2006년 1월 기준)
* 경주역전에서 '화랑로'로 쭉 가다가 첫번 째로 나오는 차로(車路)인 봉황로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경주읍성이 나온다. 도보 10분 거리

▲ 경주읍성을 보수하면서 나온 석재들 (1)
▼ 경주읍성을 보수하면서 나온 석재들 (2)

▲ 경주읍성과 고목(古木)
민가(民家)의 담장으로 전락해 버린 경주읍성의 쓸쓸한 모습..
한 때는 읍성의 위용을 가졌건만, 도시 개발의 미명 아래 세월의 뒤안길로 한없이 밀려나면서
지극히 초라한 존재로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그렇게 잊혀져만 갔다.

성곽 위에 자라난 저 고목들은 그런 성곽을 애써 위로해 주는 듯, 양팔을 크게 벌리며 읍성을
감싸주고 있다.


경주읍성은 예전에도 많이 와봤으므로 자세히는 살피지 않았다. 그냥 그에게 안부인사 정도 하는 수준에서
볼일를 마치고, 노서동 ~ 노동동 고분군을 찾기 위해 다시 서쪽으로 들어간다.
경주에 오면 연례 행사로 꼭 찾던 곳이 바로 노서동 ~ 노동동 고분군인데, 2년 만에 찾아와서 그런지 도저히
어디에 붙어 있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이 쪽이던가? 저 쪽이던가? 나의 길눈도 꽤 밝은 편인데, 이젠 그것도
아닌가 보다.. 노서동 ~ 노동동 고분군은 남쪽 화랑로 건너편에 있는데 이건 엉뚱한 곳에서 우물을 찾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

경주읍성에서 서쪽으로 약 5분 정도 걸어가니 담장으로 둘러쌓인 기와집이 보인다. 처음에는 그곳이 경주김씨의
사당(祠堂)이려니 생각했으나, 그에게 다가가보니 그 곳은 근래에 복원된 경주관아(官衙)이다.


♠ 옛 경주 고을의 행정, 사법, 치안의 중심지 ~ 경주관아 유적 / 동부동 은행나무

▲ 경주관아터 안내문

▲ 현수막이 걸린 경주관아 정문
조선시대 때 경주 고을의 행정, 치안, 사법을 담당했던 곳으로 동헌(東軒), 내아
(內衙), 객사(客舍)를 비롯한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오늘날의 행정,법조타운
이었다.
그러나 왜정(倭政)때 이르러 도시개발의 미명아래 집경전(集慶殿)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 지금은 쌍무당(雙武堂) 등만 쓸쓸하게 남아
경주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굳게 닫힌 경주 관아의 정문과 담장을 넘어갈 재간이 없어 그저 담장 밖에서 바라
보기만 하였다.

▲ 경주 동부동 은행나무 - 경북 지방기념물 66호
경주 동헌(東軒)을 세우면서 그 기념식수로 심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나무의 나이는 대략 5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19m, 둘레는 6.6m에 이른다.

경주관아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증인으로, 경주 관아 사람들의 시원한
정자나무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조금만 일찍 찾아왔더라면 황금 옷을 입은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나뭇가지를 하늘로 높이 치켜들며 애타게 봄을 기원하는 은행나무의 처절한
몸부림.

※ 경주 관아, 은행나무 찾아가기.. (* 2006년 1월 기준)
* 경주읍성에서 서쪽으로 도보 5분, 경주문화원을 찾으면 된다.


♠ 서라벌 경주에 버젓히 남아있는 옥의 티 ~ 경주 신사(神社)
노서동 ~ 노동동 고분군을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가야 함에도, 엉뚱하게 서쪽으로 발걸음을 하던 중, 약간
눈에 거슬리는 모양의 집 1채를 만나게 되었다.
나오라는 고분군은 죽어라 안나오고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엉뚱한 것들만 계속해서 나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그 건물의 모습을 가만히 보니, 바다 건너 왜열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인데, 이건 혹시??? 그렇다.
그 집은 여러 번 언론에도 소개된 바가 있던 바로 경주 신사(神社)이다. 옛 신라의 천년고도(千年古都) 한복판에
옥의 티처럼 버젓히 살아있는 왜의 신사.. 순간 나도 모르게 경악이 터져 나온다.

▲ 경주 신사
daum, naver, yahoo 등의 검색 사이트에서 '경주신사'를 검색하면 그와 관련된
많은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이 곳이 세인들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 신사는 왜정 때 한반도에 세워진 수많은 신사 중에 하나로 1928년에 세워졌으며
왜국(倭國) 건국신(建國神)의 자손들을 배향하던 곳이다. 건물에 사용된 목재는
모두 수입했다고 하며 기와는 구리철사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특히 지붕의 양쪽 용마루 기와는 당시 황소 1마리 값에 버금갔다고 하니 왜인(倭人)
들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늦가을 분위기에 빠진 경주 신사
신사는 왜의 토착 신앙인 신도(神道)의 사당(祠堂)으로 신도의 대상이 되는 신(神)
들은 정말 많다. 거의 다신교(多神敎)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 신의 대상으로는 고대(古代)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 사람부터 해서 각 고장의
대표적인 인물이나 장군, 전설 속의 인물, 왜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천조대신(
天照
大神)등의 온갖 잡신(雜神)들, 역대 왜왕(倭王)들, 그리고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
등.. 그 종류는 정말 다양하다.
특히 신도는 왜왕숭배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게는 상당한 거부감을
주는데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도를 매우 싫어하였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신사참배 거부운동이 벌어졌으며, 왜는 강제로 신사참배를 강요,
둘 사이에는 항상 적지 않은충돌이 일어났다.

광복 이후, 신사에 대해 강한 역겨움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에 의해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그나마 남아있던 신사는 한국전쟁 때 말끔히 청소되었다.
그렇지만 이곳 경주를 비롯하여, 포항, 소록도(小鹿島)등에 아직까지 옥의 티처럼
남아있으며 그 중에서 경주의 이곳이 제일 유명하여 이 곳을 찾는 화인(和人, 왜인)
들도제법 많다고 한다.

현재 이 신사는 '해병대 경주전우회' 사무실 및 '경주시 기동순찰대' 사무실로
쓰이고 있으며 신사의 본전과 창고로 쓰였던 건물 하나만 남아 있을 뿐, '도리'라고
불리는 신사의 문(門)과 기타 부속 건물은 모두 사라졌다.

왜국 건국신의 자손을 배향하던 곳이 졸지에 일개 사무실로 전락되어 버린 세월무상
의현장이기는 하나. 굳이 왜 저 건물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인지 한편
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렇지만 왜정(倭政)도 한반도를 거쳐간 엄연한 역사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 흔적을
왜의잔재 청산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없애는 것도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이 신사를 보고
'당장에 부셔버리자'라는 생각이 강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과연 부셔야 될까?'로 생각이 바뀌어 간다. 비록 우리에게 있어 썩 유쾌하지
못한 치욕의 현장이긴 하나 그런 역사의 자취를 무작정 없애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의 정신적, 사상적 침략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으로 자라
나는 새싹들을 위해 역사 교육의 장으로 삼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다만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역사교육을 엄청나게 못하고 신경도 거의 쓰지
않는 나라가 과연 이 곳을 산 교육의 장으로 제대로 조리해 먹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경주 신사 찾아가기.. (* 2006년 1월 기준)
* 경주관아터에서 도보 5분, 얼떨결에 찾은 곳이라 길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 경주 신사의 동쪽 측면(側面)

경주 신사의 서쪽 측면(側面)
그리고 늦가을의 정취.. -

저렇게 보니 마치 왜 관서(關西) 지방의
교토(京都)나 나라(奈良)에 있는 어느
절에 온 듯한 기분..
신사 왼편의 건물은 신사의 창고이다.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5년 11월 19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5년 12월 20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1월 2일
* 상편 숙성기간 - 2006년 1월 6일 ~ 1월 26일
* 공개일 - 2006년 1월 26일부터
* 2006년 1월 27일, 상편을 상, 중상편으로 분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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