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구] 성산가야의 옛 도읍 ~ 경북 성주 (성산관, 성밖숲, 성산동 고분군)
' 경북 성주, 대구 역사기행 (2006년 3월 25일)'
'상편 ― 성산가야(星山伽倻)의 옛 도읍, 경북 성주(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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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위를 앞세우며 천하를 꽁꽁 지배하던 겨울의 제국(帝國), 영원할 것 같던 그 제국도 이제 봄의 반격을
받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해방군(봄)의 한반도 상륙으로 제국의 노예(?)로 살아왔던 자연의 만물들은
서서히 해방을 외치며 해방군(봄)을 반기고, 일찍 해방이 된 한반도 남부 지방은 벌써 자연 만물들이 기지개를
켜며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중부지방은 아직까지는 제국의 위세가 강하여 해방군의 반격이 그리 시원스럽지는 못한 것 같다.
또한 제국의 재건을 꿈꾸는 겨울의 잔여 세력들이 이른바 꽃샘추위로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바다 건너에선
누런 오랑캐의 무리들(황사)이 사해전술(沙海戰術)로 새까맣게 몰려와, 그들의 제국 건설을 꿈꾸나. 거의 3일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와해되어 버리니, 이른바 황사(黃沙)의 3일 천하..
그러나 대자연의 법칙을 누가 어길 수 있으리.. 3월 중순 이후 겨울의 제국은 봄의 해방군에 의해 거의 평정이
되어버리고.. 중부지방도 서서히 겨울로부터 해방이 되었다.
3월의 마지막 토요일인 3월 25일, 이 날은 모처럼 아무런 약속도 일정도 잡혀져 있지 않았다. 1월 중순 이후
주말과 일요일마다 계속 약속과 일이 생겨서, 멀리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이번에 이렇게 오랜 만에 장거리
답사를 떠나게 되었던 것..
이번 나들이에서는 작년 후반부터 열심히 구상만 하고 있었던 '왜관 ~ 성주 ~ 대구'코스를 이용했는데 특히
성주 땅은 아직까지도 나의 발길이 전혀 미치지 못한 미답지(未踏地)의 하나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 곳의 문을 두드렸다.
3월 25일 아침 6시, 찬란한 여명(黎明)이 짙게 드리워 있던 어둠을 하나씩 하나씩 걷어낸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7시 20분에 구미로 가는 일반고속버스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 구미(龜尾)에 도착.
구미터미널에 이르러 바로 왜관으로 내려가는 구미시내버스 11번(구미역 ~ 왜관읍)을 타고, 다시 40분을 달려,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길다는 낙동강(洛東江)을 건너니 바로 옆으로 우중충한 모습의 '왜관 인도교(人道橋)'가
나를 바라본다. 6.25전쟁 시절, 낙동강을 건너 대구로 진격하려던 북한군과 그들을 막으려는 한국군 사이에
처절했던 혈전이 벌어진 그 역사의 현장.. 그 전쟁의 참상을 말없이 보아왔던 그 다리.. 지금은 복원되어
전형적인 인도교로 쓰이고 있는데, 다음에 다시 이 곳을 찾는다면 저 다리를 꼭 건너 보고 싶다.
왜관읍내에 있는 왜관북부정류장에서 성주로 들어가는 칠곡좌석버스 250번을 타고 다시 낙동강을 건너 미지의
고을, 성주 땅으로 들어선다.
성주 고을의 중심지인 성주읍내에 이르니 시간은 어느덧 11시 40분,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바로 성주군청
뒤쪽에 있는 성산관(星山館)을 찾았다.
♠ 성주읍내 둘러보기 ~ 성주 성산관(星山館) /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성주군청 뒤쪽-정확히는 군청의 서쪽-에는 성주가 낳은 독립지사,'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 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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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충사적비(雙忠事蹟碑) ~~ 경북 지방유형문화재 61호
이렇게 담장 너머로 성산관을 둘러보고, 다시 서쪽으로 발걸음을 재촉한지 3분 만에, '쌍충사적비'라 불리는
조그마한 비각(碑閣)을 만났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의 조카인 제홍록(諸弘祿)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정부에서 1792년(정조 16년)에 세운 것으로, 당시 이조판서(吏曹判書) 서유린(徐有隣)이 비문(碑文)을
짓고, 이병모(李秉模)가 글씨를 썼으며, 성주목사 조윤형(曹允亨)이 전서(篆書)를 썼다.
이 비석은 원래 성주초등학교에 있었으나, 운동장을 넓히면서 1940년 경, 지금의 자리로 이전된 것이며, 그들의
사적비는 이곳 외에도 경남 진주성(晉州城)에도 하나 더 세워져 있다.
쌍충비의 주인공인 제말(1543 ~ 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홀연히 의병(義兵)을 일으켜 웅천(熊川, 진해),
김해(金海), 의령(宜寧) 등지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치하하며 그에게 성주목사(牧使)를 제수했는데, 부임한지 채 얼마 되지 않아서
왜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제말은 수백 명의 군사와 함께 열심히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결국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정조 연간(年間)에 이르러 조선 정부는 그에게 병조판서(兵曹判書) 추증(追增)하고
'충장(忠壯)'이란 시호가 내렸으며, 1812(순조 12년)에 충의(忠毅)로 시호가 변경되었다.
제말 장군은 신장(身長)이 무려 8척(1척은 약 33cm)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덩치에 비해 매우 날렵하여 비장군
(飛將軍)이라 불렸으며, 왜군도 그의 모습을 보기가 무섭게 혼비백산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제홍록(1558 ~ 1597)은 숙부(叔父) 제말을 따라 의병활동을 하면서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1597년 왜군에게
포위된 진주성을 도우러 가다가 그만 중간에서 왜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으며, 그 역시 정조 연간에 이르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그는 효심이 지극하여 임진왜란 때 항상 모친(母親)을 모시고 다녔는데, 왜군과 싸울 때는 모친을 산중에 숨겨
두고 싸웠다고 전한다.
▲ 비각에 걸려있는 현판(懸板) |
* 쌍충사적비 찾아가기
~ 성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도보 15분, 성주군청에서 도보 5분 ~
♠ 재앙을 막기 위해 조성된 오래된 동네 숲 - 성주 경산리 성밖숲 ~
천연기념물 403호
쌍충사적비를 둘러보고 서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성밖숲' 표석이 세워진 4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왼쪽 강변
도로로 들어서면 노거수(老巨樹)로 가득한 커다란 공원을 만날 수 있는데, 이 곳이 바로 '성주 성밖숲'이다.
![]() | 이 곳은 성주 읍성(邑城) 서문 밖에 조성된 오래된 숲 |
이 숲은 풍수지리(風水地理)에 입각하여 마을에 문제 | ![]() |
▶ 봄 가뭄의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이천 | ![]() |
![]() | ◀ 봄을 꿈꾸는 왕버들 |
▶ 왕버들 사이로 조성된 산책로 | |
▶ 드넓은 공원 운동장, 점점 멀어져만 가는 |
약 1시간에 걸친 성밖숲 산책을 즐기고, 이천(伊川)을 따라 읍내로 들어선다.
이번에 내가 찾아갈 곳은 읍내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성산동 고분군, 다행히 읍내에서 그 곳이 거의 손에
잡히지 않을 듯 멀리감치 바라보인다.
그래서 고분군까지 들어가는 시간, 나오는 시간, 둘러보는 시간을 감안하여, 읍내로 들어가 점심을 두둑히
먹고 읍내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성산동 고분군'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전형적인 시골길 분위기 ~ | |
◀ 멀리 바라보이는 성산동 고분군 |
▶ 성산동 고분군으로 들어서는 | ![]() |
♠ 옛 성산가야(星山伽倻)의 영화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
성주 성산동 고분군 - 사적 86호
성주읍내에서 남쪽으로 4리 정도 떨어진 성산(星山)의 북, 서쪽 산 |
이 고분군은 성산가야 지배층들의 무덤으로 1980년대까지 약 50여기 |
이는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성주 지역을 다스렸던 이총언(李忿言)의 |
무덤의 구조는 '앞트기식 돌방무덤 <횡구식 석실묘(橫口式石室墓)>' | |
맹주 대가야(大伽倻)보다는 멀리 떨어진 신라와 더 친밀한 관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 입장료 없음, 관람시간 제한 없음.
* 편의시설은 화장실 달랑 하나.. 주차는 화장실 주변 공터에 하면 된다.
▲ 성산동 고분군의 위치 (성주군청 홈페이지 참조)
◀ 여자의 가슴처럼 곡선의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 |
◀ 야트막하게 누워있는 성산동 55호분 | |
◀ 지배층의 커다란 무덤과 백성의 쥐꼬리만한 | |
▲ 성산동 고분군에서 바라본 성주읍 |
▲ 옛 무덤들의 물결 ~ 성산동 62, 63, 64호분 | |
▶ 성산동 64호분 | |
▲ 성산동 67, 68, 69호분으로 가는 오솔길 |
~~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3월 25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4월 11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5년 4월 17일
* 상편 숙성/방치 기간 - 2006년 4월 21일 ~ 7월 7일
* 공개일 - 2006년 7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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