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고양이 2006. 7. 28. 15:20


' 봄맞이 서울 도심(都心) 나들이 (2006년 3월 4일)'
'중편 ― 덕수궁(德壽宮) 둘러보기(정관헌 ~ 광명문 ~ 석조전) ~ 덕수궁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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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 3대 양관(洋館)의 하나 - 정관헌(靜觀軒) ~

▲ 정관헌(靜觀軒) - 등록문화재 82호

덕수궁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궁으로 사용되었고, 고종과 마지막 황제 순종, 양폐하
(兩陛下)가 말년을 보냈던 곳이라, 전통 양식으로 지어진 다른 궁궐과 달리 서양식건물
들이 많다. 1880년대 이후, 서양의 여러 제국(諸國)과 활발한 교류를 하면서 도성(都城)
내에 서양식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게 되고, 황실에서도 막대한 재정을들여황궁에
양관(洋館)을 세우니. 정관헌은 그 중의 하나이다.

이 건물은 19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고종이 여가생활을 즐기던 곳이다.
그는 여기서 종종 다과(茶菓)를 들면서 음악을 감상했다고 하며, 가끔씩 내외 빈객(賓客)
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또한 왜정 때는 잠시 태조, 순조, 고종의 어진(御眞)을 모시기도 하였다.

황제가 여가를 즐기고, 연회를 베풀던 장소답게 건물은 활짝 개방되어 있어 전각 내부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 정관헌 난간에 새겨진
소나무와 사슴

한 그루의 노송(老松) 밑으
로 나무 가지를 물고 늘어선
뿔 달린 사슴..
민화(民畵)나 옛 서화(書畵)
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 송림(松林) 속에 묻혀 있는 함녕전(咸寧殿)
굴뚝

굴뚝 연기를 모락모락 뿜어내던 옛 시절을 그리
워하고 있겠지.
은퇴하여 뒷전으로 물러난 노인처럼 어딘지 모르
게쓸쓸해 보이는 그의 모습..

◀ 덕홍전(德弘殿)의 뒷모습

고종이 내외 귀빈을 접견했던 곳으로, 1904년
대화재로 소실된 것을 1906년에 중건하였다.

덕홍전 좌측으로는
보물 820호로 지정된 함녕전
(咸寧殿)이 있으나, 이번에는 그냥 통과하였음..


♠ 동산(動産)문화재의 전시공간으로 전락되어 버린 - 덕수궁 광명문(光明門) ~

▲ 석조전을 바라보며 서 있는 광명문(光明門)
이 문은 원래 덕수궁의 침전(寢殿)인 함녕전(咸寧殿)의 정문으로 1904년 대화재로 불에탄 것을
다시 중건하였다.

1938년, 왜정(倭政)은 석조전을 이왕가(李王家) 미술관으로 변형시키고 이 문을 지금의위치로 이전
시켰는데, 1939년 광화문에 있던 흥천사(興天寺) 범종(梵鍾)을 이 곳으로 옮겨오고 경복궁에 있던
자격루(自擊漏) 물시계 역시 이 곳으로 가져와 완전히 그들의 진열 공관으로 만들어 버렸다.

◀ 보루각 자격루(報漏閣 自擊漏) ~ 국보 229호
광명문 서쪽 칸에 떡하니 들어앉은 자격루 물시계
(漏刻),이 누각(漏刻)은 세계에서 제일 크고 오래
된 물시계로 1536년(중종 30년)에 만들어진것이
다.
원래는 경복궁 서문인 영추문(迎秋門) 보루각(報漏
閣)에 있던 것을 창경궁 남쪽으로 옮겼다가왜정때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
자격루는 파수호(播水壺)에서 흘러내린 물이 수수
통(垂水筒)에 고이면 시간 눈금이 있는살대가 떠
오르면서 지렛대 원리의 자동조절장치를 움직여 연
결된인형과 쇠구슬이종과북, 징을 치는 구조로
되어있는데,현재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장치
는 없어지고3개의 둥그런 파수호와 2개의 수수통
(용이새겨진 길쭉한기둥 모양)만이 그렇게 남아
있다.
기분 같아서는 직접 실험을 해보고 싶었으나, 국보
로지정된 귀하신 몸이라 감히 그러지도못하고.
그의 몸에 감히 손도 대지도 못한다.
자격루의 원리는 설명으로 하는 것보다는 손으로
직접 해보는 것이 이해가 더 빠를텐데 말이다.

◀ 화차(火車)
임진왜란 시절 왜군을 토벌(討伐)하는데큰 공을
세웠던그 당시로는 최신식의무기로 변이중(邊以
中, 1546 ~1611)이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 화차는 도대체 여기에 왜 있는것인지
모르겠음..

◀ 육중해 보이는 흥천사(興天寺) 범종(梵鍾) ~
보물 1460호


억불숭유를 내세웠던 조선의 궁궐 안에 불교 범종이
마치 그 정책을 비웃기라도하듯 떡하니자리해 있
다.

이 종은 원래 덕수궁 서쪽 정동(貞洞)에 있었던
흥천사의 범종이다.
흥천사는 정릉(貞陵)
태조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神德王后) 강씨의 능으로 지금의 정동에있었음

의 원찰(願刹)로 1396년(태조 4년)에 세워진 것으로
태종(太宗)은 신덕왕후에대한 개인적인 감정으로
정릉과흥천사를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아리랑고개
부근으로 추방시켜 버린다.

1462년(세조7년) 세조는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이 종을 주조하여 흥천사에 하사하였으며,
그 이후흥천사가 불에 타버리자, 종종 4년(1511년)
동대문으로 가져와 문루에걸어 놓았다가 광화문

문루로 옮겨지고, 1910년 이후 창경궁에 처박아두다가 1939년,석조전의 야외 전시품으로 지금의
위치로 옮겨진 것이다.

종의 높이는 2.8m, 둘레는 1.7m, 두께는 30cm 정도로 한계희(韓繼禧)가 쓴 종명(鐘銘)이뚜렷하게
남아있다.
조선 초기에 주조된 몇 안되는 사찰 범종의 하나로, 몽고의 영향을 받았던 고려시대 범종이새로운
양식, 즉 조선전기 범종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있다고 하여 올해 1월, 비지정에서
보물로 특진되었다.

이 범종은 허공에 걸려 있는 형태가 아닌, 애처롭게도 아래 4개(혹은 3개)의 돌에 의지하여 간신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종을 치는 길쭉한 것도 없다.완전한 전시품 그 자체..
종은치라고 있는 것인데 이 종은 이미 그런 기능은 상실해버렸다.

◀ 새파란 바닥만 한없이 드러내 보
인 ~ 석조전 앞 분수대


♠ 신고전주의 양식의 거대한 석조 건물 - 석조전(石造殿)

▲ 석조전(石造殿) 동관 - 등록문화재 80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목조 건물로 가득한 궁궐 안에 돌로 지어진 거대한 건물, 어떻게 보면 한옥으로 가득한 조선의
궁궐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어색하다. 심지어는 철거해라 등등의 부정적인 생각도 들수 있겠
지만 시대가 변하면 그 건물의 형태 또한 당연히 변하는 법이다.

서구의 건축 양식에 크게 호기심을 보인 조선 황실은 없는 재정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부려 황궁
(덕수궁) 내에 거대한양관(洋館)을 세운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착공을 시작한 것은 바로
석조전.이 건물은1900년에 기공하여 9년의 대공사 끝에 1909년에 완성되었다.
기존의 목조 전각들은 보통 몇 개월에서 1~2년 정도면 완성이 되었으나, 궁궐 내에 처음으로
시도하는 서양식 석조 건축이라 상당한 시간과 재정을 필요로 했다.

19세기 서양에서 유행하던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양식의 미려(美麗)한 전각으로 반지하층과
1층, 2층 등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은 고종의 어소(御所)로 사용되었으며, 1층은 신하
와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던 접견장, 반지하로 된 아랫층은 황제를 모시는 시종(侍從)들의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전각의 이름은 처음에는 따로 지어진 이름은 없
었으나, 나중에 돌로 만들었다는 뜻에서 석조전
이란 단순한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고종과 순종
이 붕어(崩御)한 이후, 한 동안비어 있다가.
1933년 왜정은 석조전 내부를 뜯어고쳐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했으며, 해방 이후, 이 곳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다.
한국전쟁 시절에는 'UN한국 위원단'사무실로 사
용되기도 하였으며 그 이후 '국립중앙박물관'으
로쓰이다가 1973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으로,
1992년 이후에는'궁중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
다. 이렇게 다양하게 사용된 이 곳은 현재 서관
은 '덕수궁미술관'으로 쓰이고 있고 동관은 텅
비어있다.

◀ 굳게 닫힌 석조전 동관의 서쪽 문

▲ 석조전
건물이 얼마나 큰지는 기둥 아래서 모델 촬영하는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쉽게 실감이 날 것이다.

◀ 지붕에 피어난 자두꽃
조선 황족의 성씨(姓氏)는 이(李)씨, 그것
을 해석하면 바로 오얏나무. 그래서 대한
제국의 문장(紋章)은 오얏꽃, 즉 자두꽃
이다.

▲ 석조전 서관 - 등록문화재 81호 <문화재청 사진 참조>
석조전에 딸린 일종의 별관(別館)으로 고종이 휴식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지금은 '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주로 서양화를 비롯한 근대 화가의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마침 이 곳에서는
소정 변관식(少亭 卞寬植)'길에서 무릉도원을 보다'특별전
이 열리고 있어 구경하고자 했으나, 따로 3000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는지라 애써들어가지는
않았음.. 어차피 이따가 서울시립미술관도 둘러볼텐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보면그것도
정말 감당하기가 힘들다.

◀ 석조전 동관과 서관을 이어주는
회랑 통로

동관 2층에 거처하던 고종은 이 통로
를 거쳐 서관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망국(亡國)의 주인이 가고 없는 그
회랑 통로에는 오직 고요함 만이 감돌
뿐...

▲ 석조전 뒤뜰에서 바라본 동관 ~ 서관 연결 회랑


♠ 덕수궁 마무리.. ~~

▲ 소나무로 가득한 석조전 뒤쪽 산책길

◀ 수령(樹齡) 90년의 마로니에 나무
1913년 네덜란드 공사(公使)가 고종에게 바친
나무라고 전한다.
겨울의 매서운 제국주의 앞에 모든 것을 잃고
애타게 해방군(봄)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
망국의 한을 달래며 저 나무를 심었을 황제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은 것은 아닐까..?

▲ 인적이 없는 쓸쓸한 분위기의 석조전 뒤쪽 산책길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 달리 따로 넓은 정원(庭園)이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처럼 산 등의 자연 지대와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완전히 도시 속의 외딴 섬이 되어 버린 덕수궁, 숨막히게 펼쳐진 높다란 빌딩과 서구 제국(諸
國)들의 대사관으로 빈틈없이 에워싸인 곳, 그래서 덕수궁은 옛 궁궐의 고풍스런 분위기 보다
는 거의 도심 속의 전형적인 공원 분위기, 도시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에 나와서 잠깐 차나 마
시고휴식을 즐기는 그런 분위기의 공원 같다.

이 곳은 그런 덕수궁의 서쪽 끝 부분이다. 더 이상 들어갈래야 들어갈 수가 없음. 담장 너머의
옛 덕수궁 땅은 이미 강대국들의 대사관이 들어앉아 버렸기 때문에...
특히 덕수궁의 3대 양관의 하나인 중명전
(重明殿, 서울지방유형문화재 54호)은 거의 미국대사
관의 정원 장식물로 전락해 버렸으며, 관람 또한 거의 어려운 실정이다.

과연 언제쯤이나 중명전 일대를 돌려받을 수 있을까? 정 안된다면 최소한 건물이라도 돌려받아
임시로 석조전 부근으로 옮겼으면 좋겠다.

▲ 덕수궁을 등지며..
언젠가 들어왔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가야 되는 법. 덕수궁 관람에도 그 법칙은 철저히 적용
된다.
잠시나마 도시를 등지며 덕수궁으로 들어온지 어언 100분 만에 덕수궁 관람은 그 마무리가 되
었다.더 머물고 싶었지만, 서울시립미술관 입장시간(17시까지) 때문에, 이만 발걸음을돌려야
했지..

이제 덕수궁을 등지며 다시 도시로 되돌아 나온다. 아무래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궁궐이 아닌
삭막한 도시인가 보다..


▲ 사람들로 가득한 덕수궁 돌담길
대한문을 나와 도심 산책코스로 이름이 높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다가선다.
덕수궁 돌담길은 오랜동안 서울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서울 시내의 대표적인 산책로로 덕수궁 내(內)
나무에서 쓸쓸히 내려 앉은 낙엽들이 길 위를 가득 메운 가을이나 새하얀 눈으로 뒤덮힌 겨울, 그리고
파릇파릇 녹음(綠陰)으로 가득한 봄과 여름에, 좋아하는 사람 혹은 친한 사람들과 이 길을 거닐면
마치 동화나 영화 속의 한편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그저 즐겁기만 하다. 그리고 혼자 이 길을 거닐
때는 조용히 사색(思索)에 잠기게 만드는 신비로운 힘을 지닌 것 같다.

지금은 비록 4발 달린 수레들이 빈번하게 지나다니지만 아직도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는 그대로이다.
거의 도심 속의 박힌 하나의 보석이라고나 할까.. 누구에게나 정다운 산책로이다.

돌담길 주변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과 서울시청 별관,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인 정동교회, 아관파천의
우울한 현장 옛 러시아공사관, 유관순(柳寬順)이 다녔던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옛 정문, 구세군(救世
軍) 본부, 정동극장 등의 명소가 널려 있으므로, 돌담길을 거닐게 된다면, 한번쯤 모두 둘러보기를
권한다.

다만 옥의 티라고 해야 될까? 하필이면 이 곳에 미국대사관이 건방지게(?) 들어앉아 있어, 정동교회와
옛 러시아 공사관, 구세군 본부 부근으로 전,의경들이 빼곡히 진을 치고 있으므로, 그런 것은 감안하길
바란다.

~~ 아쉽지만 중편은 여기서 끝.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3월 4일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4월 6일
* 하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4월 21일
* 하편 숙성기간 ~ 2006년 4월 22일 ~ 7월 26일
* 공개일 - 2006년 7월 26일부터

* 2006년 4월 29일, 상편과 하편을 상, 중, 하로 분리, 재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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