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고양이
2006. 10. 5. 19:07
' 서울 창경궁(昌慶宮) 봄꽃 나들이 (2006년 4월 8일)'
'상편 ― 창경궁 둘러보기 (홍화문 ~ 명정전 ~ 통명전 ~ 꽃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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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하 2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칼보다 더 매서운 강추위를 앞세우며 천하를 꽁꽁 지배하던 겨울의 제국(帝國)은 해방군(봄)의 대반격을
받아 눈이 녹듯 그렇게 무너지고, 제국의 신민(臣民)으로 살아왔던 자연의 만물들은 봄의 개선을 반기며
하나, 둘 기지개를 켠다.
이제 완연한 봄의 세상으로 느껴지던 4월 8일 토요일, 아리따운 여인네와 함께 서울 5대 궁궐의 하나인
창경궁을 찾았다.
이 곳은 창경원(昌慶苑)이라 불리던 옛 시절부터 2003년 정월까지, 거의 스무 번 이상을 들락날락 했던
곳으로 어언 3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그 때와 변함없는 모습으로 홍화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나를 맞이
하는 창경궁..
그럼 우선 창경궁의 내력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 창경궁(사적 123호)의 간략한 역사 ~~~
| 창경궁은 경복궁, 창덕궁에 이어 3번째로 세워진 조선 왕궁이다. 이 곳은 1418년 세종이 부왕(父王, 태종)을 위해 세운 수강궁(壽康宮) 의 옛터로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 거의 폐허처럼 방치되었다.
세종의 증손자인 성종 임금은 3명의 대비(大妃)-세조의 왕비이자 성종 의 친할머니인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덕종(德宗)의 비, 성종의 모 후(母后)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예종의 비,성종의 숙모인안순 왕후(安順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해 1483년 옛 수강궁터에 새로이 궁 궐을 조성하여 1484년 6월 완공을 보니 바로 지금의 창경궁이다. |
▲ 창경궁 명정전 |
창경궁은 창덕궁의 바로 동쪽에 붙어있는데, 이들 궁궐을 하나로 묶어 동궐(東闕)이라고 부른다. 비록 이름은 각각 창덕궁, 창경궁 이지만, 거의 하나의 공간으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창덕 궁에 부족한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역할을 하였으며 제왕이 머무는 정궁(正宮)의 기능보다는 뒷전으로 쓸쓸 히 물러난 내명부(內命婦) 여인들의 생활 공간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던것 같다. 임진왜란으로 궁궐 전체가 파괴되어, 광해군 8년(1616년)에창덕궁과더불어 중건되었으나 1624년 반정공신 (反正功臣)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가득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군을 이끌고 도성(都城)을침 범, 홧김에 창경궁을 불질러 버린다. 그러부터 9년이 지난, 1633년에 이르러 겨우 중건을 하였으나 1830년(순조 30년) 대화재로 내전(內殿) 대부 분이 전소되면서1834년에 다시 지었으며 1877년(고종 14년)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벌였다. |
1909년, 순종은 칙령(勅令)을 내려 궁 안에 동물원, 식물원을 설치 하고권농장(勸農場) 자리에 춘당지(春塘池)라는 거대한 연못을 조 성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통감부(統監府)의 보이지 않는 강압이 있 었다고 전한다.
1910년 이후, 왜정(倭政)은 망국의 황궁을 철저히 때려 부시기 시작 하는데, 창경궁이라고 그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우선 1911년 자경전(慈慶殿) 자리에 2층의 박물관을 세우고, 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를 이어 주던 산줄기를절단내어 도로(율곡로)를 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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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당지 |
| 궁내(宮內)에 빼곡히 들어선 60여 동의 건물 중 거의 2/3이상을 파 괴하면서그 빈 자리에는 1915년에 세워진 순 왜식(倭式)의 장서각 을 비롯하여 동물원, 온갖 놀이시설, 지방에서 가져온 석탑과 태실, 중국에서 빼돌린 석탑 등으로 그 자리를 빼곡히 채워갔으며, 1922년 에는 벚꽃 수만 그루를 궁 안에 잔뜩 심어 거의 벚꽃 정원으로만들 고1924년부터 야간 벚꽃 놀이를 허용하면서. 점차서울장안의 유 원지로철저히 전락되어 갔다. 그리하여 엄숙한 궁궐로써의 창경궁은 그렇게 사라지고대신 행락지 로써의 창경원이 그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사람들의기억 속에 도 창경궁 대신창경원이라는이름이 서서히 각인(刻印) 되어갔다. 지금은 그래도 창경궁이라 많이 부르고 있지만, 중,장년층에서 아직 도습관적으로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해방 이후, 유원지로써의 창경원은 계속 유지되어 갔으며, 어린 시 절에 유치원에서 소풍을, 또는 가족 나들이로 여러 번 놀러 가놀이 시설도 타고, 동물들도 구경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러다가 1983년, 뒤늦게 정비와 복원의 필요성을 느낀 전두환 정권 은 5개월동안, 일반 공개를 전면 중단하고 창경궁 정비사업을 벌이 면서동물원과 식물원, 놀이시설을 전부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 시켰으며이름도 다시 창경궁으로 환원시켰다. |
▲ 빈양문 부근 5층석탑 왜정 때 한반도 어딘가에서 옮겨 온 고려시대 5층 불탑(佛塔)이다. |
| 그 이후, 계속해서 복원사업을 벌여, 장서각을 철거하고, 왜정 때 파괴된 건물터를 발굴, 조사하여 문정전(文政殿) 등을 복원하였으며 전각 곳곳에남아있는 왜식의 흔적을 제거, 원래 모습으로 복구하였 고, 왜정이후 무분별하게 심어진 나무들을 대폭 정리하여단풍나무 , 회화나무, 진달래, 개나리 등 우리 고유 수종의 나무와꽃을 심어 우리나라 전통의 원림(苑林)으로 조성하였으며 벚꽃나무대부분은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현재 창경궁은 비록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명정전, 통명전을 비롯한 20여 동의고풍스런 전각들이 남아있으며, 예전 동물원과 놀이시설 이있던 곳은 나무와 꽃이 우거진 녹지대로 변했고, 장서각이있던 높다란곳은아미산(峨眉山) 꽃계단도 시샘할 정도의 거대한꽃계단 으로 탈바꿈하여옛 고궁(古宮)으로써의면모와 위엄,그리고 그 아 름다움을우리에게한없이 보여주고 있다. |
▲ 환경전(歡慶殿) 제왕의 침전(寢殿)으로 1544년 중종이 이 곳에서 붕어했으며 순조 연간에는 익종<翼宗, 순조의 아들로 어린 시절에 병사함>의빈소(殯所)로 사용되었다. |
창경궁은 궁궐의 중간 부분에만 전각들이 모두 몰려있고, 그 외에 북쪽과 남쪽은 거의 원림에 가까운 녹지대로 창덕궁 후원 다음으로 녹지의 비율이 높다.또한 북쪽으로 북악산에 닿아있으며, 남쪽으로 종묘(宗廟)와 연결되어 있다.
창경궁은 경복궁, 덕수궁과 달리 어느 정도는 복원이 된 상태로, 언 젠가종묘와 끊어진산줄기를 이어주기만한다면 더 이상 건드릴 필 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왜정 때 파괴된 전각들도 모두 복원하면 좋겠지만. 그것까지 언제 손을 다 보겠는가? 우선 왜의 의해 고의적으로 끊어진 산줄기 를 잇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 창경궁 찾아가기 (2006년 10월 현재) ~ 1. 지하철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2. 시내버스로 창경궁(서울대병원) 하차, 도보 1분 * 창경궁 경유 서울시내버스 - 101, 102, 104, 106, 107, 108,140, 143, 149, 150, 151, 160, 161, 162, 171, 172, 272, 301,1018, 1148, 좌석 9410 |  |
▲ 함인정(涵仁亭) 옛 인양전(仁陽殿) 자리로 1633년 인경 궁(仁慶宮)에 있던 함인당(涵仁堂)을 지금의 자리로옮겨온 것이다. 영조 임금은 장원에 급제한 이들을 이 곳에 불러 격려를 해주었다고 하며정 자 안에는 도연명(陶淵明)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시(四時)편액이 걸려 있다. |
~ 창경궁 입장료 (2006년 10월 현재) ~ * 대인 (19 ~ 64세) - 1000원 (단체 30명 이상 - 800원) * 중고생, 어린이 - 500원 (단체 10명 이상 - 400원) * 6세 이하와 65세 이상은 공짜이며, 창경궁 입장권으로 종묘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 창경궁 관람시간 (매주 화요일 휴관, 2006년 10월 현재) ~ * 3 ~ 10월 : 평일 9시 ~ 18시 / 휴일 9시 ~ 19시 * 11 ~ 2월 : 9시 ~ 17시 30분 |
♠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옥천교(玉川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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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 보물 384호 창경궁의 정문으로 특이하게도 동쪽을 바라보고있다. 이 문은 1483년에 건립된 것으로 임진 왜란 때 파괴되어 1616년에 다시세워 진 이래, 지금까지 별일 없이 잘지내 오고 있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2층 문루의 하나 로 조선의 화려하고 우아한 건축미를 유감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하늘 을 향해 지금이라도 날개짓을 할 것만 같은 팔작지붕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
시원스럽다. 홍화문 문지기(?)에게 표 검사를 받고 봄으로가득한 창경궁 내부로 들어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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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천(玉川) 위에 뜬 쌍무지개 다리 ~ 옥천교(玉川橋) - 보물 386호 홍화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무지개돌다리로 1484년에 세워졌다. 궁궐의 많은 전각들이 숱하게 불타고 사라지고 하는 동안 옥천교는 불에도 끄떡없는 돌 갑옷 을 갖춰 입은 탓에 현재까지도 무탈하게 잘 지내오고 있다. |
 | 조선의 궁궐은 정문을 지나면 꼭 금천교(禁川橋)라 불리는 돌다리를 건너야 정전(正殿)으로들어설 수 있는 구조인데, 금천교는 궁궐마다각각칭하는 이 름이 다르다. * 경복궁은 염제교(永濟橋), 창덕궁은 금천교(錦川 橋) 이 다리는 2개의 홍예 수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수문을 통해 비록 수량은 적지만 옥천이유유히 흐르고 있다.
2개의 홍예 사이로 귀신머리가 눈을 부릅뜨며 정면 을 바라보고 있으며 다리 난간에는꽃잎 모양의 창 을 내고 여러가지 섬세한 조각을 베풀어 놓았다. |
◀ 옥천교 석수(石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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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의 중심 - 명정문(明政門), 명정전(明政殿) ~
| ◀ 명정문(明政門)과 행각(行閣) - 보물 385호 옥천교를 건너면 바로 명정전의정문인 명정문을 만나게 된다. 명정문은 명정전 마냥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홍화문과는 달리 단층으로되어 있다.
이 문은 1484년에 세워진 것으로, 문의 규모는 다소 작지만 나름대로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고 있으며 문 앞에서 잠시 옷매무새를가지런히 다듬으며 명정전으 로 다가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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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明政殿) - 국보 226호 명정문을 들어서면 명정전까지 잘닦여진 3단의 돌길이 펼쳐진다. 가운데 길은 제왕 전용, 양쪽 참도(參道)는 신하들 전용으로. 길 양쪽으로는 품계석(品階石) 24기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어 신 하들은그 품계에 맞는 돌 앞에 서서 제왕을 바라보며 만세를 부르거나 기타 여러 의식을 행했을 것이다.
명정전은 창경궁의 중심 건물로, 제왕의 즉위식(卽位式) / 왕세자 책봉식(冊封式) / 제왕의 국혼 / 외국 사신 환영 / 새해 하례(賀禮)등 국가의 주요 행사, 의식 때 사용되었으며 제왕은 전내(殿 內) 어좌(御座)에 앉아 신하 및 외국 사신들의 하례를 받았다.
이 전각은 1483년에 세워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건물로, 중층(重層)으로 된 경복궁과 창덕궁의 정전(正殿)과는 달리 규모는 좀작은편이다. 이는 창경궁이 거의 별궁 수준, 가끔씩 제왕이 머무는 수준에 불과했다 는 것을 보여주는것 같다. 또한 궁궐 전각의 거의 대부분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반해 '명정전 ~ 명정문 ~ 홍화문' 만은 특이하게도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명정전은 17세기 초반 건물로 조선 궁궐 건축물 중에서 제일 오래되었으며 조선 초기 건축 양식 의특징을 잘 계승하고 있다고 하여 1985년에 보물 385호에서 국보 226호로 특진되었다. |
명정전 주변으로는 행각(行閣)이 네모 모양으로 빙둘러쳐져 있으나, 그 길이는 짧으며,명정전 바로뒤로 문정전(文政殿) 등의 건물이 쭈욱 연결되어 있다.
조선의 궁궐은 제후국(諸侯國) 궁궐의 원칙에 따라 문3개를 지나야 그 궁궐의 정전을만나게 되 는형태이나창경궁은 덕수궁과 마찬가지로 2문 형태를취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이 곳이 3명의 대비(大妃)를 위해 만든별궁(別宮)이라서 그런 것 같다. 게다가 거의 창덕궁의보조 역할용으로 굳이 3문 원칙을 지킬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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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정전 어좌(御座) 어좌에 앉아 정면(동쪽)을 주시하며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린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을바라 봤을 제왕의 모습을 머릿속에 한번 그려본다. |
| 어좌 뒤로 5개의 산과 달, 해가 그려진 일월오악도 (日月五嶽圖)가 그 뒤를 든든히받쳐주고 있다.
언제나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어좌. 살짝 한번 앉아봤으면 좋으련만, 저 자리에 앉으면 기분은과 연 어떠할까?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필요로 했던가? 심지어는 피를 나눈 형제, 부자(父子)끼리 도 서로죽이고 죽여야 했던 그 자리.겉으로는 그 저 화려해 보이기만 한 저 어좌는 바로그들의피 비린내가 풍기는 냉혹하고도 무서운 자리이다. |
▲ 명정전 행각의 서쪽문 - 빈양문(賓陽門) 왜정 때 사라진 것을 1986년에 복원하였다. |
♠ 창경궁 통명전(通明殿) 주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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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 7칸, 측면 4칸의 통명전(通明殿) - 보물 818호 제왕과 왕비가 생활하던 침전(寢殿)으로 1484년에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1616년에 재건되었으나 이괄의 난으로 다시 화재를 입었으며 정조연간에또 화재를 만나 폭삭 붕괴된 것을 1833년에 새로 지어 지금에 이른다. |
 | 통명전 남쪽으로 돌로 쌓은 월대(月臺)가 있으며 화재를 막기 위한 청동솥인 '드므'가주변에 설치 되어 있다.건물의 서쪽에는 돌난간을 만들어 그 안에 방형(方形)의연못인 연지(蓮池)를 만들었으 며연못 가운데로돌다리를늘어뜨렸다.연못 북 쪽으로는 경복궁의 열상진원(洌上真源)처럼 둥그 런 샘을두었으며 그 뒤로 꽃계단을 두어한층정 감 어린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데,이는 부실공사가 아닌 제왕이 머무는 침전이기 때문이며, 전각내에는 특이하게도 건물의 이름, 즉 '通明殿'이라 쓰인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는데 이는 순조(純祖)의 어필(御筆)이라고한다. |
▲ 순조 임금의 친필인 통명전 내부 현판(懸板) |
통명전은 다른 전각과 달리 내부가 공개되어있어섬 돌 위에 신발을 벗어놓고, 마루에 준비된 실내화로 갈아 신어 안으로 들어설 수 있다.
우물마루로 이루어진 통명전 내부는 거의 100년 이상 그 주인이 없는 건물이라 남아있는 것도 없고, 그저 여닫이식 하얀 문만이언제올지모르는 주인을 기다 리며 그렇게 열려 있을뿐이다. 왕비의 처소인 서온돌방 맞은편으로 제왕이 머물던 동온돌방이있으며, 크기와 모습은 서온돌방과 크게 다르지는않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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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 내부는 통풍이 잘되어 무척이나 시원하며 한여 름에 오면낮잠 자기에는 정말 그만인 곳이다. | ▲ 주인이 가고 없는 통명전 서온돌방 (왕비의 침소) |
| ◀ 뚜껑이 닫힌 드므 청동(靑銅)으로 만든 솥으로 일종의 방화수(防 火水)를 담아두던 물통이다. 궁궐 전각들이 한결같이 나무로 지어진 것이다 보니 불 앞에서는 그저 한없이 무력해질 수 밖 에 없는데, 이를 두고 옛 사람들은 화마(火魔) 라는 귀신이 불장난을 벌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각 주변으로 드므를 설치했는데, 이는 불지르러 온 화마를 막기 위함으로, 화마가 불 장난을하기 직전 호기심 삼아 드므 내부를살 펴본다는 것이다. |
드므 안에는 물이 잔뜩 고여 있는데, 그 물에비친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에 그만 혼비백산하여불 장난이고 뭐고 바로 줄행랑을 친다고 하며. 이렇게 해서 화재를 막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옛 선인들의 재치가 둠뿍 담긴 드므 이야기.. 그러나 화마는 그렇게 어리석지는 않았다. 통명전을 비롯한 창경궁이 화재로 몇 번씩이나 피해를 봤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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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명전 연지(蓮池) 통명전에 머물던 제왕 내외가 산책을 즐기던 곳이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에 연못의 남과 북을 가르듯 돌다리를 걸치고, 연못 안에 꽃봉오리모습의 석대(石臺)를 심어놓았다. |
 | 연못은 비록 작지만 아담하여 나름대로의 운치와 풍류가 느껴지는 곳으로 연못에는 맨바닥을 겨우 면할 정도로 적은 물들이고여 있다.
연못이라고 하면 보통 헤엄치는 물고기도 있고 수 초(水草)도 좀 있어야 되지만, 이 곳에는 그런 것 들대신 속인(俗人)들이 심심풀이로 무책임하게 내버린 동전들만이 수북하다.
연못 바닥은 물론이고 꽃봉오리 석대 위에도 버젓 히동전들이들어 앉아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고들 있으니. 이 곳이어쩌다가동전을 던지는 곳으로 변질되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꼭 저런 곳에 동전을 던져야 직성들이 풀리는 것일 까? 물론 동전은 창경궁 관리사무소에서 고스란히 수거하여 그들 유용(?)한 곳에 잘 쓰고 있다. |
▲ 연지 남쪽 부분에 세워진 꽃봉오리 석대, 그리고 연못을 가득메운 동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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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둥그런 샘과 수로(水路) 연못의 물은 저 둥그런 돌샘에서 솟아져 나온다. 북악산(北岳山) 혹은 응봉(鷹峯, 명륜동과 성북동 경계)에서 발원한 물로 그 수량은 봄 가뭄의 심각함을 여실히 보여주듯, 보 기에도 정말 갑갑할 정도이다. 이들은 성종 연간(1484년)에 만들어졌는데 처음에는 구리로 된 수통(水桶) 형식의수 로였다. 그러나 신하들이 그마저도 사치스럽다며 계속해서 태클을 거는지라 하는 수 없이 돌로교체했다고 전한다. |
♠ 봄꽃들의 세상 ~ 창경궁 꽃계단 일대
| 통명전의 북쪽과 서쪽에는 3 ~ 4단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언덕이 있다. 이 언덕은 한자로는 화계(花階), 쉬운 말로는'꽃 계단'이라 부르는데 자연 지형을 그대로살리면서 돌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다.
꽃계단에는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사시사철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봄에는 진달래와 목련, 벚꽃들의즐거운향연이 펼쳐지며, 여름에는 나무들의 싱그러운녹음이, 가을에는알록달록단풍의 마지막 잔치가, 겨울에 는 새하얀 눈들의 은빛 세계가 유감 없이 펼쳐진 다. 꽃계단에 심어진 나무와 꽃은 스스로 자라나며, 계절에 맞쳐 알아서 변화하고 처신하기 때문에 사 람의 손길이 많이 가는 서양의 정원처럼 일일히 관리를 해줄 필요가 없다. 그런 것이 바로 우리나 라 전통 정원의 최대 특징. |
◀ 꽃계단으로 오르는 옛 계단 (통행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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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계단으로 올라가는 계단 옛 고려의 궁궐이던 개성(開城) 만월대(滿月臺)의 높다란 계단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조선 궁궐에 있는 계단 중에서 제일 높은 것으로,계단 위에는 원래 대비(大妃)가 머물던 자경전(慈慶 殿)이 있었다.
왜정은 1911년 자경전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2층 규모의 왜식(倭式) 건물인 이왕가 박물관을 세 웠는데 1937년박물관을 덕수궁 석조전(石造殿)으로 옮기고 생물표본관(生物標本館)에 있던 장서 각을이 곳으로 옮겨 경복궁 집옥재(集玉齋) 등에 있던 고서적 86000권을 보관하였다. 1991년 창경궁을 재정비하면서 눈에 가시 같은 장서각을 철거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우리의 고유 수목들로 아낌없이 베풀어 놓아, 창경궁을 더욱아름답게 수 놓고 있다. |
| ◀ 꽃계단 위쪽 부분 이 곳에 오르면 통명전을 비롯한 창경궁의 전각들이 거의 한 눈에 바라보인다.
내 밑에 펼쳐진 창경궁 경내를 바라보면서 서서히 봄이 다가 오고 있는 꽃계단 길을 느긋이 거닐어 본다. |
 | ◀ 창덕궁으로 통하는 함양문(咸陽門) 담장 너머는 바로 창덕궁의 궁역(宮域)으로 희정전(熙正殿)에서 후원으로 통하는길과 바로 연결된다. 여기서는 후원으로 가는 창덕궁 관람객들의 대화소리가 모두 들릴 정도로 예전에는 창경 궁과창덕궁을 하나의 동궐(東闕)로이어주던 역할을 하였으나, 지금은 굳게 입을 닫아 두 궁궐을 완전한별개로 분리시켜 버렸다. 언젠가 봉쇄된 저 문을 개방하여 예전처럼 창덕궁과 창경궁을 하나로 묶어 관람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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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양문에서 바라본 통명전 일대 통명전은 숙종의 후궁인 희빈(禧嬪) 장씨가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죽이기 위해 신임하는 무당의 말에 따라 왕후가 머물던 이 건물 일대에 흉물을 파묻고 온갖 별의별 짓을 다했던 궁중 암투의 씁쓸한 현장이다. 그러나 희빈의 그런 행위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자신의 명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니, 그의 어리석은 욕심이 자기 자신을 한줌의 재로 활활 태웠다고나 할까..? 이 곳에 얽힌 희빈의 일화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참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짝 처마를 들어올린 통명전 지붕 너머로 서울대병원이 바라보인다. |
▶ 화사한 봄꽃의 물결 ~ 함인정 서쪽꽃계단(花階)
봄을 맞이하여 노란색의 개나리, 분홍색 의 진달래, 흰색의 벚꽃 등이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며 꽃계단을 아름답게 수 놓고 있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나무들은 아직 꽃잎 조차 피우지 못하고 겨울의 망령에 사로 잡혀 있으니.. 어서 꽃잎을 펼쳐보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보다 더하나 몸은 그들 의 마음처럼 잘 따라주려 하질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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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지만 상편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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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4월 8일 / 5월 14일(창경궁)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4월 22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5월 7일
* 숙성기간 ~ 2006년 5월 8일 ~ 10월 4일
* 공개일 - 2006년 10월 4일부터
* 2006년 9월 28일. 상/중/하 3편을 상/하 2편으로 통합, 개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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