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고양이 2006. 10. 9. 21:54


' 서울 창경궁 봄꽃 나들이 (2006년 4월 8일)'
'하편 ― 창경궁(昌慶宮) 둘러보기(꽃계단 ~ 영춘헌 ~ 풍기대 ~ 춘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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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하 2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 창경궁 영춘헌(迎春軒), 집복헌(集福軒), ~

▶ 영춘헌(迎春軒) ▶
명정전과 꽃계단(자경전터) 중간으로 영춘헌과 집복헌
등 규모가 작은 전각들이옹기종기 들어서 있다.

영춘헌은 17세기 이후에 세워진 'ㅁ'구조의 건물로 정
조(正祖) 임금은 후궁인 수빈(綏嬪) 박씨를 매우 총애
하여 그녀의 거처인 집복헌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의 곁에 늘 머물고 싶은 마음에 집복헌 옆
에 있는 영춘헌을 손질하여 자신의 거처로 삼았으며
이 곳에서 1800년 6월, 수빈이 지켜보는 가운데49세
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 집복헌(集福軒) 내부

동쪽의 영춘헌과 나란히 자리한 전각으로 이 곳역시 'ㅁ'
구조로 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영조의 장자인사도세자와 순조가 태어났고,
사도세자의 생모인영빈(暎嬪)이씨와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가 거처하였다.
1830년 창경궁 대화재로 불에 탄 것을 1834년에 중수하였
으며 왜정 이후 상당히 훼손된 것을1984년 경에뜯어 고
쳐지금에 이른다.
툇마루를 갖춘 몇 안되는 궁궐 건축물로 집의 규모와 수준
은 거의 사대부가(士大夫家)와비슷하다.



♠ 꽃계단에서 만난 여러가지 것들 ~

◀ 풍기대 옆 석대(石臺) 위
에 놓여진 해시계

▶꽃계단에 세워진 어느 수석
돌의 아랫도리 구멍으로 창경궁
을 바라보면 좀 특별해 보이지
는않을까..?

▶ 양화당(養和堂) 굴뚝 ▶
양화당은 대체로 창경궁의 내력과 비슷하다.
이 건물은 인조(仁祖)가 삼전도(三田渡, 서울
송파)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머리를조아린
이후, 환궁하여 거처하던 곳이다.

양화당 뒤쪽으로 우뚝 솟아난 저 굴뚝은 예전
양화당의 온돌방 연기가 나오던 곳이나 지금은
궁궐 관람객들의 휼륭한 감상 거리가 되었다.

천하(天下)에서 제일 아름다운 굴뚝은 바로조
선 왕궁의 굴뚝이 아닐까..? 저런 곳에서 과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을까..? 굴뚝이 아닌거의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이처럼 우리의 옛 건축물은 사람들이 잘 안보
는 그 뒷모습까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

▶ 구름무늬가 새겨진 풍기대(風旗臺) ▶
~ 보물 846호

바람의 방향과 그 세기를 측정하던 돌기둥으로
현재는 이 곳과 경복궁에만 남아 있다.
이 풍기대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약
2.3m로 기둥 위에 깃대를 세웠는데, 그 깃대에
깃발을 매달아 그것으로 풍향과 풍속(風速)을
측정하였다.

바람을 관측(觀測)하는 약간 딱딱한 도구임에
도 눈이 지루하지 않도록 돌기둥에 화려하게
구름무늬를 베풀어 놓은 조선 사람들의 미적
감각에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다.

◀ 어느 이름 모를 커다란 돌쟁반(?)

쟁반 안으로 약간의 물이 담겨져있고, 그
수면 위로 진달래 꽃송이가 사뿐히내려 앉
아 때 이른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 해시계 왼쪽에 어느 이름 모를 돌덩어리,
그리고 해시계 관련 시차보정표 안내문




♠ 성종대왕 태실(胎室), 태실비(胎室碑) ~

▲ 서울에서 단 하나 뿐인 태실/태실비 ~ 성종대왕태실(成宗大王胎室)

풍기대에서 춘당지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왼쪽으로 조그마한 오솔길이 보이는데 그 길의 끝에
는성종대왕태실과 태실비가 아늑하게 들어앉아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다.
이 태실은 성종의 태가 담겨진 돌탑으로 생김새는 승려의 무덤인 부도(浮屠)와 많이 비슷하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태를 잘라서 그냥 버리지 않고, 청화백자나 분
청사기, 백자항아리 등에 그 태를 넣어서 전국적으로 태실 자리를물색, 괜찮은 곳에 태실을
설치하고 그 안에 태항아리를 두었다.

태항아리는 이렇게 값비싼 백자 등으로 되어있어 종종 도굴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으며, 왜정
때는 수많은 태실들이 도굴꾼들에게 처참히 유린을 당했다.
게다가 왜정은 1930년, 전국에 흩어져있는 태실 상당수를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西三陵) 뒤쪽
으로 집합시켜 관리를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태실들이 손상, 도굴되었다.

성종태실은 원래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 태봉(胎峯)이라는 곳에 있었다.
태봉은 말그대로 태실이 있는 봉우리로 광주(廣州) 지역 지도를 보면 광주시내 부근으로 태봉
이라는 지명이 눈에 띌 것이다.

왜정은 가만히 잘 있는 성종태실까지 마수를뻗어
서울로 가져왔는데원래는 서삼릉에처박아두려고
하였으나 어찌된 영문인지성종태실만은 지금의
위치인 창경궁 장서각뒤쪽으로옮겨 놓았다.
그 이유에대해서는 명확하지는 않으나, 혹자는
성종이 창경궁을 세웠으므로 일종의그것을 상징
하는 차원에서 일루 옮겼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나마 서삼릉 비공개 구역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수많은 태실에 비하면 그나마자리도
괜찮고, 건강상태도 양호하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가 없다.

◀ 성종대왕 태실비(胎室碑)
두발을 안쪽으로 오므리며 얌전히 앉아 있는거북
이의 등 위로 태실의 신상정보가 적힌 비신(碑身)
이 세워져 있다.


♠ 봄도 쉬었다 가는 아름다운 곳 ~ 창경궁 춘당지(春塘池) ~

▲ 봄하늘을 아름답게 비추는 춘당지(春塘池)

거대한 원림(苑林)을 이루고 있는 창경궁 북쪽 부분에는 춘당지라 불리는 커다란 연못이 있다.
이 곳은 창경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창덕궁의 후원(後苑)과 경복궁의 향원정(香遠亭)에 버금
가는 절경(絶景)을 자랑한다.

이 곳은 원래 제왕이 농사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친히 경작을 했던 권농장(勸農場)이 있던 곳으로
1909년(순종 2년) 권농장을 없애고 그 자리를 파서 지금의 연못을 만들었다.
왜정을 거치면서 연못은 거의 왜식(倭式)으로 변해갔으며1980년대까지 춘당지 주변으로 많은 놀이
시설들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었으나, 1983년 이후 창경궁 복원 프로젝트를진행하면서 연못 주변을
정화하고 왜식의 흔적을제거하는한편, 우리 전통 방식으로 연못 주위로 석축을쌓고못 주변으로
버드나무 등을 심었으며, 연못 가운데에 '당주섬'이란 섬을 만들어 띄워놓았다.

연못의 면적은 약 2000평으로 못 내에는 많은 물고기들이인간들로 하여금 입맛을 다시게 만들 정
도로 잘 자라나고있으며, 그 외에 청둥오리를 비롯한 오리 가족들도 만날수 있다.
겨울의 제국주의를 몰아낸 봄도 한참이나 쉬었다 가는창경궁의 백미(白眉)로 수목의 푸르른 녹음
(綠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며, 하늘에 뜬 구름, 달,해, 별 등이그들의 매무새를 다듬는
깨끗한 거울이다.

▲ 연못 위에 그림처럼 떠 있는 당주섬

속인(俗人)들의 출입이 금지된 당주섬, 출입이 통제되었음에도 어떻게든 들어가보고 싶은 것이
바로 호기심 강한 인간들의 심리이다.
연못에 배 한척 띄우며 유유히 뱃놀이를 즐기면서, 저 섬에 살짝 내 발을 들여보고 싶다.
소나무와 진달래가 무럭무럭 자라는 저 섬이 혹 꿈에 그리던 그 무릉도원(武陵桃源)은 아닐까..?

▲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녹음(綠陰)의 버드나무

푸른 버드나무가 그의 긴 생머리를 연못을 향해 축 늘어뜨렸다. 혹 연못에 머리라도 감으려는것은
아닐까..?
바람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버드나무의 머리결이 잘 가꾸어진 여인네의 긴 생머리처럼 그저 곱기
만 하다. 윤기도 철철 흘러 넘치고..

이 나무는 창경궁을 찾은 이들의 카메라 모델로 많이 등장하는 춘당지의 유명 인사이다.

◀ 춘당지를 접수(?)한
청둥오리 부부
물결이 잔잔히 이는 수면
위로 청둥오리 부부가 자
신의 구역을 순찰(?)하고
있다.


♠ 궁궐 안에 또 다른 불교 석탑이..? ~ 중국에서 온 기괴한 모습의 8각7층석탑
-
보물 1119호

춘당지 서북쪽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특이
한 모습의 석탑 1기가 연못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이 탑은 그 모습이 정말이국적 그 자체로 4각의 바닥돌을
기반으로삼아그 위로 8각으로 된 2단의바닥돌을 쌓고,
그 위로1단의기단(基壇)을 올렸으며, 그위에일정한 비
율로 줄어드는 7층의탑신(塔身)을 세우고,탑 머리 부분
에 머리장식을얹었다.
기단의 맨 윗부분에는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으나 손상
이심하여 유심히 잘 살펴봐야 될 것이다.
이 탑은 그 특이한 모습에서 보이듯, 우리나라 탑이 아닌
중국명나라 석탑으로 1470년(성종 원년)에 조성되었는데,
1층 탑신에 조성시기와 관련된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그러면 이 탑은 어째서 고향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을까?
1920년대 이후, 왜국은 조선반도를 발판삼아 중국 진출을
시도하여 요동, 만주를 비롯한 중국의 많은 지역을 서서히
먹어 들어가면서 중국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약탈이나
매매로조선과 왜열도로 잔뜩 집어 가지고 온다.

이 탑은 그 과정에서 헐값으로 조선까지 오게 되었는데, 총독부(總督府)에 의해 경성 최대의 유원지창경
원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1945년 드디어 왜는 패망하고, 그들이 중국과 동남아, 중앙아시아,등지에서 열심히 빼돌린 보물들 상당
수는 서둘러철수하느라 미쳐 챙겨가지 못하여 우리나라에 그대로 남게 되었는데, 그 보물의 대부분은 현
재 용산에 있는국립중앙박물관에 절찬리에전시되어 있다.

삼각형과 역삼각형을 마치 합쳐놓은 듯한 모습의 이 탑은 중국 어딘가에 있을 그의 고향을 그리며 오늘도
그렇게 쓸쓸히 연못을바라보고 있다.

◀ 춘당지 북쪽 연못

연못 주변 나무들이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
습을 그렇게 비쳐보고 있다.

남쪽 연못에비해 분위기가 매우 조용하니
마치 깊은 숲 속에 숨겨진 전설 속의 연못
같다.


♠ 우리나라최초의 온실 ~ 창경궁 대온실(大溫室) - 등록문화재 83호

춘당지(春塘池) 북쪽에는 하얀색의 특이한 모습을 갖춘 건물
이하나 숨겨져 있다. 기와집으로 가득한 전통 궁궐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외모의 이 건물은 우리나라 최초의 온실
(溫室)로1909년(순종융희 2년)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목조(木造)로 지어져 식물원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이후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른다.

대온실 안에는 꽃을 비롯한 우리나라 자생식물 수십 종이 무
럭무럭 자라나고 있으며, 온실 안 수로에는 민물고기들이 유
유자적 헤엄치고 있다.

우리나라 궁궐 안에 있는 유일한 식물원으로 비록 왜의 창경궁을 훼손시키려는 불순한 의도로 세워졌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온실로써 그 가치가 있으며, 그 안에는 기백(幾百)의 화사한 꽃, 식물들이 언제나 화려한
향연(饗宴)으로 이 곳을 찾은 관람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창경궁은 이처럼 다른 궁궐과 달리 역사 공부, 궁궐 건축 공부외에도 꽃, 식물, 민물고기 등의 자연 공부
도 같이 곁들여서할 수 있는 매우 유익한 곳이라 하겠다.

▼ 대온실에 있는 여러 꽃과 분재들




◀ 단아하게 서 있는 관덕풍림(觀德風
林)의 현장 ~ 관덕정(觀德亭)

제왕이 무예단련의 일환으로 화살을
쏘던 곳으로 1642년(인조 19년)에 취미
정(翠微亭)이란이름으로 세워졌다.그
이후 1664년(현종 5년) 관덕정으로 이
름이 변경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초익공계 양식을
한 팔작지붕 정자로 동궐 후원의 아름
다운풍경 10곳, 이른바 상림10경(上林
十景)의 하나인 관덕풍림의 현장이다.


♠ 창경궁 남쪽 구역 둘러보기 ~

창경궁의 남쪽 구역은 북쪽 구역(춘당지)과 마찬가지로 나무와
꽃,잔디로 가득한 녹지대이다.
1910년까지만 해도 이 곳은 전각들로 즐비하였으나,1911년 이후
왜정에의해 모두 파괴되고, 그 빈 자리에는 동물원과 놀이 시설
로 가득 도배가 되어 버렸다.

1983년 이후, 창경궁 복원 프로젝트에 따라 동물원과 놀이시설은
거의모두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되었고, 그 자리에는 우리 고유의
수종과꽃을가득 심어 거의 원림(苑林)으로 조성하였다.

이 구역에는 보물로 지정된 관천대(觀天臺)를 비롯하여, 창경궁과외부를이어주는 선인문(宣人門)이 있으며
옥천(玉川)이 남북을 관통하여 청계천으로 흐른다.
서남쪽으로는 율곡로(栗谷路)를 사이에 두고 종묘(宗廟)와 마주하고 있는데'종묘육교'라 불리는 다리를 통
해종묘로 건너갈 수 있으며, 육교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매점과 자판기, 쉼터 등의 편의시설이 있다.

~ 종묘 육교 통행시간 ~
* 3 ~ 10월 : 평일 9시 ~ 17시 / 휴일 9시 ~ 18시
* 11 ~ 2월 : 9시 ~ 16시 30분


◀ 간신히 천(川)의 이름값을 하고 있는
옥천(玉川)

조선 궁궐에 있는 명당수<明堂水, 금천(禁
川)> 중에서 유일하게 물이 흐르고 있는 옥
천,
그러나 흐르는 물의 양이 너무나도 적어 보
기에도 정말 안쓰러울 정도이다.

청계천에 넘쳐나는 그 물을 이 곳으로 정말
끌어오면 안될까..?

▲ 비극의 역사를 소리 없이 간직한 ~ 선인문(宣人門)

창경궁에서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5개 문의 하나창덕궁으로 통하는 문 2개와 종묘로 통하는문
1개는 제외
로 홍화문 남쪽에 있다.
이 문은 1484년 홍화문의 보조 역할로 세워졌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6년(광해군 12년)에
다시 만들었다.
그 이후 고종 연간(年間)에 큰 불이 나 1877년(고종 14년)에 다시 손을 봐서 지금에 이른다.

어떻게 보면 그냥 평범한 문이지만, 결코 그냥 지나치기가 힘든 문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곳에
서 2가지의 궁중(宮中) 비극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선 중종반정으로 박원종(朴元宗),홍경주(洪
景舟)등이 주축이 된 반란파에 의해 강제폐위
된 불운의 군주 연산군(燕山君)이창경궁에얼
마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이 문을 통해 강화도
옆 교동도(喬桐島)로 귀양을갔으며, 영조 연간
에 일어났던 사도세자(思悼世子) 뒤주 사건이
바로 이 문 옆에서 일어났다.

어쩌다가 하나도 아닌 두가지의 비극적인 역사
를품게 된 이 문은 그래서 그런지 매우 우울하
게보인다.

이 문을 통해 교동도로 추방된 역사의 패자 연산군의 쓸쓸한 뒷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고,
뒤주 속에서 20일을 버티다 결국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살려달라는 절규가 두 귀에아른히들려
오는 것 같아, 마음 한쪽 구석이 영 편치가 않다.

선인문은 그 비극의 역사에 대해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예나 지금이나 굳게 닫혀져 좀처럼
열릴 줄을 모른다.


♠ 조선의 옛 천문관측소 ~ 창경궁 관천대(觀天臺) - 보물 851호

선인문에서 종묘육교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 송림(松林)사이로돌이차곡차곡 쌓여진 고색창연한 대(臺)
하나가보일 것이다.

이 곳은 조선시대 천문관측소로 안국동 현대사옥앞에
있는 '관상감 관천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딱 2개남
아 있는 관천대로하늘의 인상을 살피던 곳이다.

'서운관지(書雲觀志)'에 의하면 숙종 14년(168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높이 3m, 가로 2.9m, 세로2.3m의 화
강암석대위에 조선의 기본적인 천체관측도구인 간의
(簡儀)를설치하고천체(天體)의 위치를 살폈다.
그러나 지금은 간의는 온데간데 없고 석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데, 그 시절에는 이 곳을 소간의대(小簡儀臺
)또는 첨성대(瞻星臺)라 하였다.

관천대를 관리하던 관상감(觀象監)의 관원들은 중국의
천문지식과 우리의 천문지식을 두루 섭렵하여 단지두
눈에의존하며이 곳에서 매일 천문을 관측하였다.
지금 서울의 하늘은 별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뿌
연 실정이나, 그 당시에는 대기오염이라는 것이없었고,
현대인들보다 시력도 훨씬 좋았으므로, 맨눈으로하늘을
살피는데 별로 어려운 점은 없었을 것이다.

이 곳은 17세기 천문 관측대로 비교적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며 원래는 선인문 부근에 있었으나 1975년지
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또한 이 곳 주변으로 물시계인
보루각(報漏閣)을 비롯하여 고구려 천문도의 영향을 찐
하게 받았다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가
있었으나 왜정이 창경궁을 철저히 유원지로 변질시키는

▲ 관천대 옆으로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린
산수유

과정에서 보루각은 덕수궁 미술관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창덕궁으로 옮겼으며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남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 명정문에서 바라본 옥천교와 홍화문(弘化門)

언젠가 들어왔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나가야 되는 법. 창경궁 관람에도 그 법칙은 예외 없이
적용된다.
잠시나마 도시를 등지고 싶어서 이 곳으로 들어왔지만, 결국 다시 나와야 되는 현실, 그 곳에
더 있고 싶었지만, 거기서 몇 일 만이라도 옛날의 그 제왕(帝王)들을 흉내내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나의 그런 지극한 마음을 배려해주지 못한다.

이제 창경궁을 등지며 다시 도시로 되돌아온다. 아무래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궁궐이 아닌
삭막한 도시인가 보다...

그렇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창경궁은 언제든지 또 올 수 있는 곳. 그리고 창경원 시절부터
수없이 발걸음을 했던 곳이다.
이번에 이렇게 근 3년 만에 창경궁의 고풍스런 전각들을 비롯한 여러 문화유적들과재회하니
무척이나 반갑고, 잠시 잊고 있었던 창경궁에 대해 다시 공부도 하며 나름대로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 이렇게 하여 '서울 창경궁 봄꽃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끝으로 꼭 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 궁궐은 너무 어렵다. 하지만 그런 궁궐이 삭막한 서울 도심
한복판에 이렇게 있다는 것이 사막 속의 오아시스처럼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리고 오래 전에 사라진 옛 제국이 서울 1000만 시민에게 남겨준 커다란 선물이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4월 8일 / 5월 14일(창경궁)
* 하편 작성 시작일 - 2006년 5월 10일
* 하편 작성 완료일 - 2006년 5월 13일
* 하편 숙성기간 ~ 2006년 5월 14일 ~ 10월 8일
* 공개일 - 2006년 10월 8일부터

* 2006년 9월 28일. 상/중/하 3편을 상/하 2편으로 통합, 개편함

Copyright (C) 2006 by Park Yung,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