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권 사진,답사기

늦가을 단풍 명소, 싱그러운 자연 속에 안긴 내장산(백암산) 백양사

도봉산 고양이 2011. 9. 26. 17:42

♠ 봄과 가을이 아름다운 산사, 백암산 백양사(白巖山 白羊寺) ♠

▲ 백양사 대웅전과 백학봉

지금 백암승(백양사 승려)을 만나니 시를 쓰라 청하는데
붓을 잡고 생각하니 재주 없음이 부끄럽구나

노을빛 아득하매 저무는 산 더욱 붉고
달빛이 배회하니 가을 물이 맑구나
오랜 날을 세사(世事)에 시달렸는데
어느날 옷을 떨치고 자네와 함께 올라가 볼까

'정몽주가 백양사에서 지은 시(詩)'


여름 제국의 맹위가 슬슬 그 기세가 꺾이던 9월 초,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장성 백양사를
찾았다. 원래는 장성읍내와 가까운 필암서원(筆巖書院)을 목적으로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
마음이 바뀌어 계획에도 없던 백양사로 방향을 틀었다. 다소 딱딱하고 재미없는 서원보다
는 산속에 묻혀 마음을 다독거릴 수 있는 절이 나에게는 좋았던 것이다. 백양사는 나중에
가려고 아껴둔 곳인데, 기왕 장성 땅에 가기로 한 거 필암서원과도 가깝고 교통도 괜찮은
적당한 절집이 거기 밖에는 없었다.

목포로 달리는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에 나를 싣고 전북과 전남의 경계인 노령(蘆嶺)을 넘
어 백양사역에 발을 내린다. 백양사역(白羊寺驛)은 북이면(北二面)의 중심지인 사거리(사
가리)에 터를 닦은 조그만 시골역으로 백양사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무궁화호 대부분이
정차한다. 관광객들로 북적거릴 휴일 오전 시간이건만 이상하게도 내리는 이가 거의 없어
역에는 적막만이 가득 흐른다. 이곳에서의 볼일을 마친 열차는 외마디 기적소리를 울리며
역의 고요함을 살며시 깨뜨리고는 남쪽으로 길을 떠난다.

백양사역을 나와 곧바로 4분 정도를 걸으면 마을 중심에 자리한 사거리터미널이 나타난다.
여기서 백양사행 버스(직행버스와 군내버스 2가지가 있음)를 타고 들어가야 되는데, 마침
군내버스가 5분 뒤에 있어 그것을 잡아타고 백양사로 다가선다.

5~6명의 손님을 태운 버스는 백암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꼽히는 남창골 입구를
지나 은빛물결이 출렁이는 장성호(長城湖)의 북쪽 허리를 거쳐 북이면의 중심지인 약수리
에서 좌측으로 꺾어서 백암산의 품으로 들어선다.사거리를 출발한지 약 20분 만에 백양사
종점에 이르렀다.

한산한 백양사역과 군내버스와 달리 백양사 관광단지 일대는 나들이객과 등산객들로 몸살
을 앓는다. 주차장에는 그들을 바리바리 싣고 온 수레들로 거대한 물결을 이루며, 백양사
가는 길목에 가득 포진한 주막들은 호남의 구수한 음식을 내세우며 열심히 그들을 유혹한
다. 다행인 점은 주막에서 고의적(?)으로 밖으로 흘려 보내는 음식 냄새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허기진 뱃속임에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지나갈 수가 있었다.

주막촌을 지나면 백양탐방지원센터가 나오고 언제봐도 달갑지 않은 매표소가 중생의 발길
을 가로 막는다. 매표소 직원은 어느 누구도 절대 그냥 들여보내서는 안된다는 각오로 관
광객을 맞이한다. 백양사와 백암산은 내장산국립공원(內藏山國立公園)의 일원으로 2007년
국립공원 입장료가 폐지되었다.
허나 내장산에 둥지를 튼 내장사(內藏寺)와 백양사는 문화재관람료를 구실로 등산객과 답
사객 모두에게 여전히 얄미운 가격의 입장료를 징수하고 있어 적지않게 논란이 되고 있다.
일반인의 입장료는 무려 2,500원! 백양사 가는 길은 오로지 이곳 뿐이라 후덜덜거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며 울며 겨자먹고 토하는 심정으로 입장료를 냈다. 처음에는 일반 입장료를
냈으나 대학생은 할인이 된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고 절을 보고 나갈 때 늘 소지하고 다니
는 서울시립대학교 학생증을 자랑(?)스럽게 들이밀어 1,000원 입장권으로 교환하고 1,500
원을 돌려받았다.

매표소를 지나면 얼마 뒤 큼지막한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난다. 일주문은 진흙탕 같은 속
세(俗世)와 청정하다는 불계(佛界)의 경계로 문을 들어서면 절이 자리한 부처의 세계이다.
문이라고는 하나 여닫는 문짝은 없으며, 누구나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문으로 중생을 어
루만지는 부처와 자연(自然)의 넓은 마음이 담겨져 있다.

일주문에서 백양사까지는 약 3리(1리=550m) 거리로 나무가 매우 울창하고 떼묻지 않은 백
양사계곡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 한여름에도 무지 시원하다. 하늘이 무색할 정도로 우거진
숲길은 매우 아름답고 청정하여 마치 신선(神仙)의 세계나 부처의 세계에 발을 들인 착각
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백양사의 오랜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을 비롯하여 부도군(浮屠
群)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갈참나무, 백양사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쌍계루 등
볼거리가 풍부하여 걷는 길이 결코 지루하지 않다. 숲길에 배인 자연의 향기와 여러 볼거
리에 몰두하며 걷다보면 벌써라고 느낄 정도로 어느새 백양사의 산문에 이르게 된다.

그럼 백양사를 둘러보기 전에 백양사의 내력을 먼저 간추려 보도록 하자.


▲ 계곡을 옆에 낀 백양사 가는 길


♠ 봄과 가을이 아름다운 고불총림 백양사의 굵직한 내력

▲ 백양사 우화루(雨花樓)

▲ 백양사 극락보전

백암산 남쪽 자락에 포근히 안긴 백양사는 백제 후기인 632년<무왕(武王) 32년>에 여환선사(如
幻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사(白巖寺)라 했다고 전한다. 허나 정도전이 1377년에 지은 '백암산정
토사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는 신라 때 어떤 이승(異僧)이 절을 짓고 이름을 백암사(白
巖寺)라 했다고 나온다. 이곳이 엄연한 백제(百濟)의 옛땅이라 백제 때 창건되었을 가능성도 배
제할 수는 없지만 그 증거도 확실치가 없으며, 신라 때 이적행(異蹟行)을 했다는 이승이 세웠다
는 설도 완전히 신뢰가 가질 않는다. 또한 조선 후기 문인인 홍종응(洪鍾應, 1783∼?)이 1859년
에 지은 '극락전불량계서(極樂殿佛糧視序)'에 633년에 백양사가 창건되었다고 나와 백제 창건설
과 신라 이승 창건설이 오랫동안 나란히 전해져 왔음을 보여준다.

창건 이후 1034년 중연선사(中延禪師)가 중창하여 정토사(淨土寺)로 이름을 갈고, 1350년 각진
국사가 중창을 하면서 청류암(淸流庵)과 영천암(靈泉庵), 백련암(白蓮庵), 약사암(藥師庵) 등의
부속암자를 세웠다. 1574년에는 환양선사(喚羊禪師)가 중창하여 백양사로 이름을 갈았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환양선사가 부속암자인 영천암에서 금강경(金剛經)을 설법하는데, 그것을 듣고자 사람들이 구름
처럼 몰렸다. 법회가 열린지 3일째 되던 날, 하얀 양이 산에서 내려와 설법을 들었고, 7일에 걸
친 법회가 끝난 날 환양의 꿈에 그 하얀 양이 나타나

'나는 천상(天上)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한 사람입니다. 이제 스님의 설법을 듣고 다시 환생
하여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며 절을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영천암 뜰에 그 흰 양이 죽어 있었다고 하며, 그 연유로 절 이름을 백양사라 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이야기로는 백학봉에서 하얀 양이 내려와 환양의 법화경(法華經) 외는 소리를 모두 듣고
돌아갔다고 한다.
그 이후 구암사 뒷고개에서 나물을 캐는 여인들이 하얀 양이 서성이는 것을 많이 보았다고 하므
로 이때 산 이름과 절 이름이 모두 '백양(白羊)'으로 바뀌고, 승려의 호도 '환양(喚羊)'으로 갈
았다는 것이다.

1786년 환성선사(喚醒禪師)가 중창을 벌이고, 1863년 홍수가 일어나 절이 큰 피해를 입자 도암
선사(道岩禪師)가 지금의 자리로 절을 옮겨 중창했다. 1917년 만암대종사(曼庵大宗師)가 중창했
으며, 1945년에는 사천왕문을 세웠다. 6.25전쟁으로 상당수의 건물과 암자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꾸준한 복원불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경내에는 법당인 대웅전을 비롯하여 사천왕문과 칠성각, 고불선원, 우화루, 명부전, 화엄전, 설
선당, 청운당 등 20여 동에 크고 작은 건물이 있으며, 소장문화유산은 보물 1346호인 소요대사
부도와 천연기념물 486호인 300년 묵은 고불매(古佛梅)를 위시하여 대웅전(大雄殿)과 극락보전,
사천왕문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다. 특히 고불매는 호남5매의 하나로 하나로 꼽히는 고고한 나무
이다. 부속암자는 한때는 10여 개에 이르렀으나 지금은 4개 정도만 숨쉬고 있다.

지금의 절은 1917년 이후에 것으로 고색의 내음은 다소 떨어진다. 허나 절을 감싼 자연의 싱그
러운 아름다움이 진하게 풍기는 곳이다. 백양사의 단풍은 내장산 단풍과 더불어 천하 제일로 꼽
히며, 춘백양(春白羊)이라 하여 봄의 경치도 앞다투어 칭송되어 왔다. 자연경관은 천하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으며,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 절은 늘 인산인해를 이룬
다. 특히 단풍이 곱게 익은 늦가을에는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다.

※ 우리나라 5대 총림의 하나 고불총림 백양사
총림(叢林)은 범어(梵語, 산스크리스트어) vindhyavana의 중국식 번역으로 빈타파나(貧陀婆那)
라 음역하며, 단림(檀林)이라고 번역한다. 단림은 승려와 속인(俗人)이 화합하여 한곳에 머무름
이 마치 수목이 우거진 숲과 같다는 뜻으로 선찰(禪刹)의 경우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 부르기
도 한다.

지도론 삼(智度論 三)에 의하면 '승가(僧伽)는 무리의 뜻이니 많은 비구(比丘)가 한 곳에 화합
하여 머무는 것을 승가라고 한다. 마치 큰 나무가 숲을 이루는 것을 림(林)이라 하는 것과 같으
니, 승취(僧聚)가 모여 사는 곳이므로 총림이라 한다'고 한다.
총림이 되려면 승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
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춰야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해인사(海印寺)와 통도사(通度
寺), 송광사(松廣寺), 수덕사(修德寺)가 총림의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 백양사는 서옹대종사(西
翁大宗師)의 노력으로 1996년 3월 총림으로 승격되어 5대 총림의 하나가 되었다. 고불총림이란
이름은 부처의 원래 가르침을 기리자는 뜻이다.

※ 백양사 찾아가기 (2011년 9월 기준)
* 용산역과 영등포, 수원, 천안, 서대전역에서 광주, 목포 방면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백양사역
에서 내린다.
* 백양사역에서 2분 정도 직진하면 사거리터미널이 나온다. 거기서 백양사행 직행버스와 군내버
스가 30~60분 간격(1일 18회 정도 운행)으로 떠난다.
* 서울강남고속터미널(센트럴시티)에서 장성행 고속버스(1일 5회)를 타고 장성에서 백양사행 군
내/직행버스(1일 23회 정도 운행)로 환승
* 광주터미널(유스퀘어)에서 백양사행 직행버스가 1일 8회 다닌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절까지 수레 접근 불가)
① 호남고속도로 → 백양사나들목을 나와서 백양사 방면 1번 국도 → 북하면(약수리)에서 백양
사방면 좌회전 → 백양사주차장
② 88올림픽고속도로 → 담양나들목에서 담양방면 → 담양읍내에서 장성방면 24번 국도로 좌회
전하여 다리를 건너 백양사 방면 894번 지방도로 우회전 → 북하면(약수리)에서 백양사방면
우회전 → 백양사주차장


★ 백양사 관람정보
* 입장료(2011년 2월 인상됨) : 어른 3,000원 (30인 이상 단체 2,500원) / 청소년 1,200원 (30
인 이상 단체 1,000원) / 어린이 700원(30인 이상 500원)
* 주차비 : 중,소형차 2.000~4,000원 (성수기에는 경차를 빼고 1,000~1,500원 올려 받음)
* 백양사에선 템플스테이(Temple stay)와 참사랑 수련회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템플스테이는 체
험형(1박 2일~6박 7일)와 휴식형이 있으며, 체험형 1박 2일은 5만원, 휴식형 1박 2일은 3만원
이다. (휴식형은 수련복 지급 안함) 참사랑 수련회는 3박 4일 일정으로 참가비는 12만원이다.
자세한 것은 백양사에 문의(☎ 061-392-0434)하거나 ☞
백양사 홈페이지를 참조한다.
* 성보박물관에 보물로 지정된 소요대사부도가 있으며, 명부전 부근에 천연기념물이자 백양사를
상징하는 고불매가 있으니 놓치지 말고 꼭 살펴보자.
* 백양사 주변에는 천진암과 운문암, 청류암, 약사암 등의 부속암자가 있다. 모두 절에서 1~2시
간 이내 거리로 시간이 되면 천천히 둘러보기 바란다.
*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26 (☎ 061-392-0434 / 7502)
* 백양사 홈페이지는 아래 사진을 클릭한다.


▲ 백양사 경내 (사천왕문 안쪽)


♠ 백양사 가는 길 (일주문 ~ 부도전 입구)

▲ 오고 가는 이들 붙잡지 않고 묵묵히 중생을 맞이하는 백양사 일주문
2001년에 건립되었다.

▲ 녹음이 깃들여진 백양사 가는

길 왼쪽에 보이는 기와집은 백양사의 오랜 보물을 간직한 성보박물관으로
마침 몸단장 중이라 들어가지는 못했다.


▲ 백양사 표석과 백학봉(白鶴峰)
백양사를 품에 보듬은 백학봉은 백암산의 일원으로 대한 8경의 하나로 손꼽힌다.
4계절이 모두 아름다운 남도 제일의 절경지로 국가지정 명승 38호이다.

▲ 녹음(綠陰)이 가히 숲터널을 이룬 백양사 가는 길
아무리 여름 제국의 기세가 천하를 녹여 먹을지언정 이 숲길 앞에서는
그 기고만장한 고개도 꺾이고 만다.

▲ 초가을의 단잠에 빠진 계곡을 감히 깨우려 드는 철없는 아이의 몸부림
사람의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잠잠한 수면에 돌을 던지는 부질없는 짓거리가 아닐까?


♠ 백양사의 오랜 역사가 깃들여진 ~ 백양사 부도군(浮屠群)

▲ 부도전 뒤쪽에 배열된 부도의 물결

성보박물관을 지나면 울창한 숲길이 속세의 더러운 먼지를 씻어내게 한다. 여름제국의 햇살까지
도 굴복을 시킨 무성한 숲길을 거닐면 오른쪽 언덕에 무엇인가를 꼭꼭 가리고 있는 담장이 보일
것이다. 담장 너머로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혹 숨겨진 극락(極樂)의 속살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담장 중간에는 안쪽으로 넘어가는 기와문이 있는데, 뻥뚫린 문의 모습이 8각형이다. 잔뜩 부풀
어 오르는 호기심을 다독거리며 정갈하게 깔린 돌계단을 올라 문턱을 들어섰다. 담 너머는 바로
백양사의 장대한 역사가 깃들여진 부도와 비석의 무리로 가득한 부도군이다.


▲ 속세와 부도군을 잇는 문
마치 위엄을 갖추며 자리한 산상(山上)의 문을 보는 듯 하다. 저 문을 들어서면
가히 놀라운 광경에 눈이 정신을 잃을 지도 모른다.

▲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부터 석종형(石鐘形)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형태의 부도가 망라된 부도군

▲ 부도군 앞쪽에 포진한 비석들

▲ 부도군에서 바라본 백학봉의 위엄

부도군은 말 그대로 부도의 무리를 뜻한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 쉽게 말하면
그들의 무덤이다. 부도가 한곳에 가득 널린 것을 흔히 부도밭, 부도전이라 일컫는다. 키 작은
잡초가 바닥장판처럼 깔린 부도밭은 꽤 넓은 규모로 백양사에 머물렀던 고승(高僧) 18명의 사리
와 비석이 일정한 간격을 지키며 자리를 메운다. 부도는 대략 20기, 비석(碑石)은 10여 기 정도
가 있다.

이 부도군은 원래 경내와 가까운 쌍계루 근처에 있었다. 그러다가 근래에 이곳에 넓게 터를 일
구어 이전하면서 부도군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되었다. 팔각원당형부터 석종형까지 조선 중기부
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부도가 망라되어 있어 부도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할 만
하다. 특히 범종이 그대로 돌로 굳은 듯한 범종형(梵鍾形)부도가 눈길을 제대로 잡아매는데, 이
들은 거의 백양사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부도로 석종형부도의 별종이다. 이곳의 범종형부도 가
운데 소요대사(逍遙大師)의 부도(보물 1346호)가 단연 백미(白眉)라 할만하다. 허나 그의 부도
는 부도군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성보박물관 내부로 옮겼다. 아마도 국가지정 보물로 지
정된 귀한 몸이라 특별 대우를 하는 모양인데, 유감스럽게도 박물관을 관람하지 못해 그를 친견
하지 못한 아쉬움이 실로 크다.


▲ 연꽃 쟁반 위에 사뿐히 놓여진 범종형 부도

쇠로 만든 범종이 전설처럼 번개를 맞아 돌로 굳은 것은 아닐까? 종을 그대로 빼다박은 아름다
운 부도로 손으로 그를 치면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질 것 같다.


♠ 갈참나무와 쌍계루

◀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갈참나무

부도군을 지나면 길 오른쪽으로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나무가 나타난다. 바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갈참나무이다. 나이가 무려 700년이 넘었다는 나무로 고령(高齡)의 나이에도 불구하
고 주변의 후배 나무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정
정함을 자랑한다.

이 지역은 갈참나무 군락지(群落地)로 학술적으
로 중요한 곳이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깃들여진 자연유산으로 천연기념물로 삼아도 손
색이 없으나 아직까지는 비지정문화재의 단계
에 머물러 있다.


▲ 푸른숲터널의 백양사 가는 길
나무가 베푸는 자연의 향기에 번뇌로 오염된 마음이 다소 정화가 되는 듯
시원해진다. 이곳의 풍경을 몰래 가져와 우리집에서 두고두고 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 쌍계루 부근에 보를 만들어 계곡의 옥계수를 가득 담은 ~ 백양사 연못

푸른 옷을 걸친 나무들은 장차 다가올 늦가을의 화려한 향연에 아름다움을 뽐내고자 계곡을 거울
로 삼아 막바질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백양사를 품에 안은 백학봉도 계곡에 비친 자신
의 모습을 바라보며 대한8경의 하나로 꼽히는 자신의 얼굴을 손질한다.


▲ 시인묵객들의 단골 명승지 백양사의 얼굴, 쌍계루(雙溪樓)

700년 묵은 갈참나무를 지나 5분 정도 가면 계곡을 바라보며 얼굴을 다듬는 쌍계루가 모습을 드
러낸다. 이 누각은 언제 지어졌는지는 전하는 것이 없으나 1370년에 무너진 것을 1377년에 다시
세웠다고 하며, 그때 정도전(鄭道傳)과 목은 이색(牧隱 李穡) 등이 찾아와 글을 남겼다. 1381년
에 이색이 쓴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白巖山淨土寺雙溪樓記)'에는 이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
쳐지므로 쌍계루라 이름지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으며, 지금의 누각은 1985년에 복원된 것이다.

쌍계루는 주변의 산, 계곡과 어우러져 백양사 제일의 수려한 풍경을 자랑한다. 절을 찾은 선비
들과 문인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시문(詩文)을 짓던 호남 제일의 경승지로 노산 이은상(李殷相)
도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지었다. 내가 갔을 당시는 공교롭게도 몸을 가리고 몸단장을 하던 중이
라 누각에 오르지는 못했다.

쌍계루에서 계곡과 마찬가지로 길은 2갈래로 갈라지며, 백양사와 백암산은 왼쪽 길로 가야된다.
오른쪽으로 가면 백양사의 부속암자인 천진암(天眞庵)이다. 왼쪽 길로 가면 차(茶)와 불교용품
을 파는 다연원이 나오며, 그곳을 지나치면 극락교(極樂橋)란 다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
로 가면 바로 사천왕문을 비롯한 백양사 경내이다. 오른쪽은 백암산과 백학봉으로 오르는 산길
로 길 주변으로 비자(榧子)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절 주변을 둘러싼 이 비자림은 비자나무가 자
라는 가장 북쪽이란 점이 인정되어 천연기념물 153호로 지정되었다. 허나 근래에 이곳에서 북쪽
인 내장산에서 비자림이 발견되어 비자나무 북방한계선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높이 8~10
m에 이르는 비자 5,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 숲은 고려 고종(高宗) 시절
에 각진국사
(覺眞國師)가 부근 마을 사람들에게 구충제로 쓰이는 비자 열매를 제공하기 위해 심
었다고 하며, 실제로 1970년대까지도 열매를 거두어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고 한다.


♠ 백양사 사천왕문 주변

▲ 백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44호

쌍계루에서 극락교를 건너 경내로 들어서러면 사천왕문을 지나야 된다. 이 문은 1917년에 만암(
曼庵)대종사가 5년에 걸쳐 지은 것으로 지금의 건물은 1945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부처를 지키
는 사천왕(四天王)의 보금자리로 지어진지 겨우 60여 년 밖에 안된 문이라 고색의 떼는 거의 없
다. 그런데로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불교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천왕 때문이다. 이들은
흙을 빚어서 만든 소조상(塑造像)이다.

▲ 사천왕문을 빈틈없이 지키는 사천왕
다른 절의 사천왕은 얼굴 색깔이 거의 비슷한데 반해, 이곳은 흑색과 청색, 붉은색,
흰색 등 색깔이 다른 것이 특징이다.

▲ 사천왕문 밖에 있는 석조(石槽)
네모난 석조에는 절을 찾은 중생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는 옥계수로 늘 넘쳐난다.
바가지에 물을 가득 담아 입에 넣으니 몸속에 낀 떼가 싹 내려간 듯,
오장육부가 쾌재를 부른다.

▲ 옥계수를 내뿜는 2개의 용머리
용머리라고는 하지만 거의 귀여움이 묻어난 개의 머리 같다.
그날따라 그날의 할당량을 일찌감치 처리했는지 입만 멀뚱히
벌리며 석조를 지킨다.

▲ 사천왕문 부근에 서 있는 '만암대종사
고불총림도량표석(曼庵大宗師古佛叢林道場)'

▲ 범종각 맞은편에 무럭무럭 자라난
수백년 묵은 보리수(菩提樹)


▲ 사천왕문을 들어서 바로 나오는 2층 범종각(梵鍾閣)
1937년에 지어진 범종각에는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간절한
메세지가 담긴 사물(四物, 범종/운판/목어/법고)이 있다.


♠ 백양사 대웅전 주변

▲ 백양사 대웅전(大雄殿)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43호

경내 중심에는 백양사의 법당인 대웅전이 남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자리해 있다. 이 건물은 만
암대종사가 1917년에 지은 것으로 건물의 역사는 100년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통적인 건
축 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화려한 다포(多包)양식에서 다소 후퇴한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
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석가불을 중심으로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
보살(普賢菩薩)을 협시로 낀 3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5대 총림의 하나로 성장한 백양사에 걸맞
는 규모와 품격을 지녀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건물 뒤로 백양사의 든든한 후광(後光)인 백학
봉이 절을 굽어본다.


▲ 백양사 불단에 봉안된 석가3존불
햇님보다 밝은 표정에 환한 미소를 가득 드리운 석가불이 삶에 지쳐
찾아온 중생들을 위로한다. 석가불 좌우로 어여쁜 어진 누님과 같은
문수, 보현보살이 협시(夾侍)하고 있으며, 그들 뒤로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든든하게 자리해 있다.


▲ 대웅전 뒤뜰에 솟은 8층석가사리탑

대웅전 뒤뜰에는 날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8층석가사리탑이 자리해 있다. 불교의 탑은 보통 홀수
인 3,5,7,9층이 주류를 이룬다. 물론 짝수 층의 탑도 있지만<서울의 경천사지(敬天寺址)10층석
탑과 원각사지(圓覺寺址)10층석탑> 그것은 정말 한손에 꼽는다. 이곳의 탑은 홀수가 아닌 특이
하게도 짝수 층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고자 그렇게 한 것이다. 1925년
에 조성된 것으로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져 있다. 이 사리는 근대 불교계의 지도자인 승려 용
성(龍城)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그의 소원으로 이곳에 봉안되었다.

탑 주변으로 넓게 동그란 난간을 둘렀으며, 대웅전 뒤쪽에 자리하여 제대로 가려진 탓에 이곳까
지 들어오는 이는 별로 없다.


▲ 대웅전 우측에 솟은 하얀 바위
원래 이곳에 있던 바위를 다듬은 것인지 아니면 부근에서 가져와서 다듬은 것인지
모르겠다. 바위의 피부가 흰 양처럼 하얀데, 아마도 절과 무슨 연관이나
알려지지 않은 설화가 담겨진 듯 하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음


♠ 백양사 칠성전, 극락보전

▲ 칠성전(七星殿)과 진영각(眞影閣)을 하나로 담은 건물

대웅전 뜨락 우측에는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건물은 분명 하나인데.
왼쪽은 진영각, 오른쪽은 칠성전으로 쓰이고 있다. 즉 같은 건물 안에 별도의 성격을 지닌 불전
을 둔 특이한 형태이다. 그러니까 2개의 건물을 하나로 합친 것으로 보면 된다.


▲ 칠성전 내부

불단에 앉은 금동불(金銅佛)은 부처의 대우를 받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로 칠성전의 주인인
칠성신(七星神)이다. 그 좌우로 월광보살(月光菩薩)과 일광보살(日光菩薩)이 나란히 합장인(合
掌印)을 선보인다. 이들은 1880년에 조성되었다.


▲ 진영각 중앙에 봉안된 여환선사와 중연선사, 각진국사의 진영


▲ 진영각 좌,우벽을 가득 메운 고승의 진영(眞影)들 (사진 2장)

진영각은 백양사를 창건한 여환선사부터 지금의 백양사를 일군 만암대종사까지 절과 관련된 고
승(高僧) 30여 명의 진영이 봉안된 곳이다. 절의 역사를 빛낸 고승을 한 눈에 넣어 살필 수 있
는 곳으로 이들 진영은 근래에 그려진 것이다.


▲ 종무소의 역할도 겸하는 우화루(雨花樓)
'우화'는 꽃이 비처럼 쏟아졌다는 것으로 하늘에서 부처가 설법을 할 때
만다라화(曼茶羅花)가 우수수 쏟아졌다하여 유래된 것이라 한다.
우화루에서는 차 1잔의 여유도 즐길 수 있다.


▲ 백양사 극락보전(極樂寶殿) - 전남 지방유형문화재 32호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극락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백양사에서 가
장 오래된 건물로 정확한 조성 시기는 전하는 것이 없으나 18세기 중,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여
겨지며, 대웅전과 사천왕문보다 고색의 내음이 상당히 풍긴다. 불단에는 극락보전의 주인이자
서방정토(西方淨土)의 주인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이 모셔져 있는데, 이 불상은 종이로 만든 지
불(紙佛)이라고 한다.


▲ 극락보전에 모셔진 아미타불

이 불상은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장대한 상체에 비해 하체가 다소 짧고 빈약해
보인다. 머리에는 무견정상(無見頂相)이 두툼하게 솟아있으며, 머리스타일은 꼽슬인 나발(螺髮)
이다. 이마는 상당히 넓으며, 표정은 다소 경직되어 있다. 미소는 거의 보이지 않고 볼에는 살
이 많아 풍만해 보인다.
아미타불 뒤로 1995년에 봉안된 후불탱화가 있고, 그의 좌우로 조그만 불상이 무수히 달린 3층
목탑(木塔)이 협시불(夾侍佛)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 백양사 명부전(冥府殿)

극락보전 바로 우측에 길쭉한 명부전이 자리해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목
조지장3존불과 소조(塑造) 시왕상(十王像)을 중심으로 판관(判官)과 녹사(祿仕), 인왕상(仁王像
) 등 저승의 주요 식구들이 자리를 지킨다. 명부전 옆 담장에는 백양사의 상징인 고불매(古佛梅
)가 자라고 있으니 꼭 살펴보기 바란다.

이렇게 백양사를 1시간 정도 둘러보고 아쉽지만 아비규환의 속세로 발을 돌렸다. 마음같아선 이
곳에 푹 머물고 싶지만 어쩔 수 없는 속세의 사람으로서 몸뚱이는 다시 속세로 나오지만 속세에
의지할 데 없는 마음만은 절에고스란히 남겨두고 오련다. 절을 둘러보면서 아쉬운 것은 성보박
물관과 그곳에 있는 소요대사의 부도, 그리고 경내에 있는 고불매를 친견하지 못한 것이다. 성
보박물관은 그날 수리중이라 들어가지 못했고, 그에 따라 소요대사의 부도도 만나지 못했다. 처
음에 그의 부도는 부도군에 있는 줄 알았다. 게다가 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인 쌍계루도 몸
을 가리며 몸단장 중이었고, 경내에 있는 고불매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 그의 이름은 훨씬 나중
에 알게 되었다. 놓친 것이 너무 많았던 백양사 나들이, 다음에 봄이나 늦가을에 다시 찾아 아
쉬움을 제대로 풀고 절 주변의 청류암과 백학봉 등 백암산의 여러 명소에 발도장을 찍고 싶다.

이렇게 하여 초가을의 백양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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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일 - 2011년 9월 2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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