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권 사진,답사기
호남의 옛 수부(首府)와 새 수부를 가다 (나주 ~ 광주)
도봉산 고양이
2007. 4. 10. 13:51
' 개천절(開天節)의 남도 나들이 (2006년 10월 3일)'
'하편 ― 전라도의 옛 수부(首府)와 새 수부를 가다. 나주 ~ 광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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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상, 하 2편으로 나누어 작성했습니다.
☞ 앞편 (영광 내산서원) ^^ 보러 가기 ^^
♠ 나주 곰탕과 함께한 나주시내 나들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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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그릇 잘 차려져 나온 나주곰탕 |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세상 만사 먹는 것 만큼 중요한 것은 없으며 먹는 재미 만큼 쏠쏠한 것도 없다. 2003년 12월 이래, 근 3년 만에 발걸음을 한 나주에 와서 제일 먼저 찾은 곳은 나주시청 2청 사 부근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나주곰탕집이다. 나주곰탕은 나주(羅州) 지역의 대표적인 음식으로 황해도에 해주곰탕이 있고 경상도에 현풍곰 탕이 있다면 전라도에는 나주곰탕이 있다. 곰탕은 설렁탕의 사촌 정도 되는 탕으로 소고기를 원료로 하여 국을 진하게 우려서 내는 음식이다.
점심도 고식지계(姑息之計)로 과자로 대충 때운 것이 전부라 3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정수 루 맞은편에 자리한 '탯자리 나주곰탕'집을 찾았다. 3년 전에는 5000원에 1그릇 먹을 수 있었는데 그새 세월의 무게가 더해졌는지 가격은 6000원 으로 저 높이 올라버렸다. 곰탕 먹으려고 일부러 나주까지 왔는데 6000원이 무슨 대수랴... 자리 하나 잡고 곰탕이 나오기가 무섭게 뚝딱 먹어 치운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서 눈에 뵈는게 없는지 양이 매우 적어 보였으나 먹고 나니 배가 가득 불 러온다. 설렁탕과 곰탕의 영원한 벗인 송송(깍두기)도 잘 익은 것이 감칠맛이 나는데 반면 김 치는너무 시어버려 별로 먹지를 못했다.
뜨끈한 탕을 먹고나니 졸음이라는 놈이 배 깔고 한 숨 자라며 나를 거침없이 희롱해댄다. 마음 같아서는 배때기 깔고 한 숨 자고 싶지만 그런 것은 집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다. 졸음을 떨구고자 서비스로 주는 커피 1잔 마시며 밖으로 나오니 무슨 행사가 있는지 바깥이 매우 시끄럽다. 알고 보니 정수루 앞에서 '나주관아 수문장 교대의식'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 그런데 그 행사가 너무 어설프다 못해 허접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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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수루 앞에서 펼쳐진 어설픈 병정놀이?? - 나주 관아 수문장 교대의식 |
명색이 옛날 의식을 재현하려면 적어도 그 시절의 의복과 도구를 사용해야 되고 수문장 교대 의식 같은 경우는 최소한 덕수궁, 경복궁에서 하는 수문장 의식 정도의 위엄을 갖추어야 되지 만 이 곳의 행사는 동네 애들 모아놓고 무슨 병정놀이를 하는 것도 아니고 복장은 한결같이 완전히 집에서 아무렇게나 입는 옷 차림으로 나와버렸다. 거기에 행사를 감독, 관리하는 사람 들도행사에 대한 개념이 없는 듯, 역시나 비슷한 차림들을 하고 있다. 아마도 부근 중고등학교에서 나주시청의 부탁으로 행사를 준비한 것 같은데 깃발 등을 들고 있는 아이들은 거센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흔들흔들거리니 그런 것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행사는계속 진행되기만 한다.
구경하는 이들도 별로 없지만 보는 이들도 '저것도 무슨 행사냐. 무슨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혀를 내두루고.. 나 역시 너무 웃기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조금만 보고 그 자리를 떠버렸다.
행사를 하려면 좀 고증을 거쳐서 제대로 해야지 저게 무슨 얼어죽을 수문장 교대 의식이란 말 인가..? 행사장으로 쓰인 정수루가 애처로울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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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나주 관아의 정문, 정수루(正緩樓) - (문화재청 사진 참조) 전남 지방문화재자료 86호 |
나주곰탕의 구수한 냄새가 진동하는 나주2청사 입구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옛 나주관아의 정 문이다. '정완루< 正緩樓, '緩'의 음은 '완','수' 2가지임>'란 이름도 가지고 있는 이 누각은 1603년에 나주목사 우복용이 세웠다고 하는데 조선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1753년에 민백남 목사가 세웠다고 나와있어 어느 것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문루(門樓)로 2층에는 육중한 모습의 큰 북이 걸려있다. 이 북은 나주 백성들에게 시간을 알리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그 역할을 충실히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으로 북이 없어지고 2003년 이후에 다시 만들어서매 달아 놓았다.
정수루를 시작으로 주변은 전라도의 옛 도읍, 나주의 관아(官衙)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 다. 그러나 왜정 시절, 왜인들이 시가지 개발이라는 이유로 모조리 파괴하면서 정수루를 비 롯하여 내아(內衙), 금성관(錦城館) 정도만 덩그러니 남아 버렸으나. 2003년 이후 나주관아 와 나주읍성 복원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조만간 그 위용을 드러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다. 현재(2006년 11월)는 나주읍성의 남문과 동문, 나주관아의 일부 문루, 담장 정도가 복원된 상 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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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望華樓) ~ 문루의 모습은 정수루와 비슷하며 왜정 때 파괴되어 그 현판만 남산공원으로 옮긴 것을 2003년에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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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 고을의 객사, 금성관(錦城館) -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2호 정수루 부근으로 근래에 복원된 길다란 담장이 있는데 이 구역은 나주 고을의 객사(客舍)인 금성관이 있는 곳으로 그 주변으로 한참 복원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금성관의 정문인 망화루 너머로 우리나라 객사 중에서 제일 크다는 금성관이 나주 고을의 영화로움을 간직하며 듬직하게 들어앉아 나를 바라본다. 객사란 중앙 정부 혹은 다른 고을, 다른 나라에서 파견된 관원, 사신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역 할과 함께 한 달에 두 번(초하루와 보름)씩 제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향해 예를 올리던 곳으로 금성관은 조선 성종 연간(年間. 1469 ~ 1494)에 나주목사 이유인(李裕寅)이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직지붕 건물로 왜정 때 내부를 고쳐 나주군 청사(廳舍)로 쓰던 것을 1976년에 복원하였다. 이 곳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객사 중에서 제일 큰 규모로 칸의 넓이와 건물의 높이가 현저 히 커서 거의 대궐의 정전(正殿)을 보는 듯 하니 그만큼 나주 고을의 규모와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비록 인구 10만의 소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부터 나주는 전라도를 관할하던 호남의 중심지로 조선 후기까지 그 명성은 쭉 이어져 왔다. 그러나 왜정(倭政)은 광주를 전라도의 중심도시로 집중적으로 키우면서 나주는 자연히 광주 의 위성도시로 전락되어 버렸다.
또한 금성관은 임진왜란 시절 나주 지역 의병장인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거행했던 곳이며,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때는 이곳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관을 모시 고 항왜(抗倭)를 외쳤던 곳이기도 하다.
금성관 옆으로 근래에 복원된 회랑이 있으며, 전각 앞으로 가지런히 정돈된 뜰이 거침없이 펼쳐져 있고, 그 한복판에 복원된 동그란 우물이 자리해 있다. 그 주변으로는 내아(內衙), 사마교비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한다.
*금성관, 정수루, 나주곰탕 찾아가기 (2007년 4월 기준) - 나주시외터미널에서 나주시청 2청사 방면(터미널을 나와서 왼쪽)으로 도보 10분 |
금성관을 멀리서 지켜보고 다시 나주터미널로 나온다. 이제 호남의 새로운 중심지, 광주로 갈 시간이다. 처음에는 광주 남쪽에 있는 칠석동을 잠시 들리려 했으나 귀찮은 나머지 남평을 거쳐 광주역 으로 가는 나주시내버스 180-1번을 타고 바로 광주 도심으로 들어와 버렸다.
롯데광주점 부근에서 신가동으로 가는 광주시내버스 385번을 타고 영산강 위에 걸린 광신대교 를 건너자마자 버스를 버리고 그 북쪽으로 송림(松林)으로 가득한 언덕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그 안에 광주에 대표적인 정자가 있다고 해서..
언덕을 거의 1바퀴 돌아서야 정자로 들어서는 입구를 발견했는데 젠장~ 문이 굳게 잠겨져 있 다. 문에서 정자는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바로 안까지 들어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철제 담장을 고양이가 담을 넘듯 거뜬히 월담(?)하여 그 정자에 품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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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남 제일의 정자, 현판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를 간직한. 풍영정(風詠亭) -
광주 지방문화재자료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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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창산과 영산강(榮山江)이 마주치는 신가동의 강변 언덕 위에 우뚝 솟은 정자로 조선 명종 연 간에승문원 판교<承文院 (외교 문서를 관리하던 관청) 判敎(정3품)>를 지냈던 칠계 김언거(漆 溪 金彦据)가 관직에서 은퇴하여 고향인 이 곳으로 돌아와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초막(草幕)으로 지어졌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봉황의 날개짓을 보는 듯한 팔작지 붕을머리에 이고 있는데 정자치고는 규모가 꽤 큰 편이다.
풍영정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정자 내부에는 명종 ~ 선조 연간에 활약했던 주요 명사(名 士)들의 현판이 빼곡히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을 비롯하여 기대승(奇大升), 이덕형(李德馨), 고 경명(高敬命), 김인후(金麟厚), 조계원(趙啓遠, 풍영정 원운<原韻>을 남김) 등이 앞다투어 이 곳을 찾아 주변풍광을 시와 글로 현판으로 남겼으며 한호(韓濩, 한석봉)는 호남 제일의 정자 라는 뜻에서 '제일호산(第一湖山)'이란 편액(扁額)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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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봉이 친히 남겼다는 '第一湖山' 편액
풍영정이 세워진 이후 그 주변으로 약 10여 개의 정자가 난립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모조리 불타 사라지고 풍영정 하나만 가까스로 살아 남았으며 1948년 지붕 을 수리하면서 그 내용을 '풍영정수리후추모서실(風詠亭修理後追慕敍實)' 현판으로 남겨 현재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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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風'과 '詠'이 약간 어색한 풍영정 현판
풍영정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온다. 김언거가 낙향하여 정자를 세우자 명종 임금은 정자의 현판을 그 당시 기인(奇人)으로 소문이 자자한 갈처사에게 받으라고 했다. 김언거는 기쁜 마음에 갈처사를 찾아갔으나 계속 만나질 못하고 14회 방문 때 가까스로 만나게 되었다. 갈처사는 칡넝굴로 붓을 만들어 글을 써주면서 가는 길에 절대 펴보지 말 것을 신신당부 했다.
돌아오는 도중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 종이를 펼치니 글쎄 '風'자가 하늘로 횡 날라가 버린것이다. 이에 잔뜩 놀란 김언거는 갈처사를 찾아가 다시 써줄 것을 부탁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을 당하 고 그의 제자인 황처사에서 '風'자를 받았다고 한다.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일까? '風'이 '詠','亭' 보다 자획이 조금 가늘며 필체도 도저히 같은 사람이 썼다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약간 다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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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 내에 걸린 수많은 편액 중에 하나 선조 ~ 광해군 연간에 활약했던 '풍옥헌 조수륜(風玉軒 趙守倫)'이 풍영정 방문 기념으로 남긴 편액으로 성상즉위(聖上卽位) 8년 부분으로 봐서는 광해군 8년(1615년)에 쓰여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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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영정 맞은편에 자리한 맞배지붕 건물 ~ 정자를 관리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풍영정의 서남쪽으로는 정자를 찾은 이들의 편의를 위해 해우소도 마련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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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영정에서 바라본 영산강(榮山江)과 광주선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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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영정에서 바라본 신창동 지역 아무도 없는 정자에 올라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옛 사람들을 따라해 보려고 애를 쓰나 아직은 경험이 부족한지 잘 되지를않는다. 광주시가지의 거침없는 확장으로 호남제일의 풍광을 자랑하던 이 곳까지 대단위 아파트가 들어 서고강의 폭도 현저히 줄어들어 예전과 같은 운치를 누리기는 이제 힘들다. 정자 주변으로 그나마 소나무 숲이 정자의 운치를 약간이나마 살려줄 뿐, 현대의 이기(利己)에 의해 서울의 세검정(洗劍亭)처럼 완전히 도시 속 또 다른 섬으로 전락되어 버린 것 같다. 그나 마 강 건너는 아직 녹지대라 약간 숨통은 트이고는 있지만 그 쪽 역시 개발이 예정되어 있으니 이젠볼짱다 본거지...
* 풍영정 찾아가기 (2007년 4월 기준) - 광주시내버스 첨단09번, 문흥18번, 봉선30번, 상무62번, 임곡89번 광신대교 하차, 도보 8분 (이정표가있어서 찾기에는 별 무리가 없으며 무조건 강변 언덕을 찾으면 된다) * 풍영정으로 들어가는 길은 딱 하나로 강 쪽에 있다. * 저녁, 밤 시간에는 정자로 들어서는 문을 잠궈둔다.
-> 이렇게 하여 개천절 맞이 남도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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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10월 3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10월 18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10월 21일
* 숙성기간 ~ 2006년 10월 21일 ~ 2007년 4월 6일
* 공개일 - 2007년 4월 6일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