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권 사진,답사기
나의 아름다운 시골, 단양 늦가을 나들이 (단양8경 명소들)
도봉산 고양이
2011. 11. 13. 19:12
' 늦가을의 시골 단양(丹陽) 나들이 '

▲ 대자연이 단양 땅에 선물한 작품 ~ 사인암(舍人岩)
늦가을이 한참 절정을 누리던 10월 마지막 주말에 외가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 에 시골 단양을 찾았다. 아침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에 대문을 나서 덕소역에서 강릉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제천역에서 제천시내버스 160번으로 환승하여 예식 장소인 단양관광호텔에서 내린다. 원래는 단양까지 열차를 이용하려 했으나 간발의 차이로 놓쳐버려 다음 열차인 제천 경유 강릉행 열 차를 탄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서둘러 호텔로 들어가 친척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는다. 아직까지 축의금을 받 고 있어서 봉투를 건네고 식권을 받았으나 혼자 먹기는 뻘줌하다. 10여 분을 헤맨 끝에 이모 와 외삼촌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뵙는 외가 친척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결혼한 친척 내외와 인사를 나누었다.
예식이 끝나자 친척들이 돌연 단풍구경을 가자고 그런다. 원래는 예식 뒷풀이로 바로 신랑집 으로 가려고들 했는데, 다들 단양에 오랜만에 오는 터라 시간도 이르고 해서 늦가을 단풍 구 경을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10명 정도만 가기로 하고 수레 2대에 나눠 탔다. 갈 곳도 이미 정해졌다. 바로 시골 북하리(北下里)와 가까운 사인암과 중선암으로 단양8경의 일원이다. 단양이 시골이라 서울 다음으로 오래 머물렀지만 아직 그 2곳은 가질 못했다.
충주댐 건설로 단양의 지도를 크게 바꾼 남한강(南漢江)을 건너 단양역과 북하리, 대강을 지 나 가장 먼저 사인암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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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8경의 으뜸이자 운선9곡(雲仙九曲)의 찬란한 백미 사인암(舍人岩) - 명승 47호
 |
단양8경(丹陽八景)은 단양의 이름난 경승지 8곳을 일컫는다. 조선 명종(明宗) 때 단양군수(丹陽 郡守)를 지낸 적이 있는 퇴계 이황(退溪 李滉)이 명나라의 소상8경(瀟湘八景)보다 더 아름답다 고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했던 명승지이다. 단양8경은 도담삼봉(島潭三峯)과 석문(石門), 상선 암, 중선암, 하선암, 사인암, 구담봉(龜潭峯), 옥순봉(玉荀峯)으로 이중 도담3봉과 석문을 제외 하고 모두 옛 단양의 중심지인 단성(丹城)에 몰려있다. 나는 그중에서 이번에 발걸음을 한 사인 암, 중선암을 포함하여 5곳에 발도장을 찍었다.
사인암은 단양8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명소로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70m 높이의 기암절벽(奇巖 絶壁)이다. 기이한 것은 이 바위에 상하 좌우로 균형 있게 줄이 그어져 있어 마치 천연의 바둑 판을 보는 듯 하다. 하늘나라 신선(神仙)이 인간들이 자고 있을 때 살포시 내려와 이 절벽을 눕 혀 내기바둑 한판 두고 하늘로 올라갈 때는 인간들이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끔 하늘을 향해 세 워두고 가는 것은 아닐까? 절벽 꼭대기에는 낙락장송(落落長松)을 닮은 노송(老松)들이 사인암 의 운치를 가득 수식한다. 어떻게 저런 곳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혹 절벽이 비와 눈에 젖 고 훼손될까봐 신선이 심어둔 작은 우산은 아닐까? 정말 보면 볼수록 탄성만 나올 뿐이다.
말로만 사진으로만 보던 사인암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자연이 오랜 세월을 두고 빚은 대작 품을 인간의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정말 결례로 느껴질 정도이다. 인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 들 저런 작품까지는 만들지 못한다.
이곳은 고려 후기 대학자로 단양 출신인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3~1342)이 사인(舍人) 벼슬에 있을 때 휴양했던 곳이라고 한다. 우탁은 단양우씨 집안으로 원나라에서 들어온 정주학(程朱學) 서적을 처음으로 터득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 이후 조선 성종 때 단양군수 임제광(林齊光)이 우 탁이 머무른 것을 기념하고자 그의 벼슬 이름을 따서 사인암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풍속화가로 유명한 김홍도(金弘道)도 이곳을 다녀가 그림으로 남겼으며, 많은 시인묵 객(詩人墨客)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그림을 그리거나 바위에 낙서를 남겼다.
사인암은 남조천(南造川)을 따라 이어진 운선9곡의 하나로 유리처럼 맑은 남조천의 물이 이곳을 굽이쳐 흐르면서 정취를 더욱 수식해준다. 사인암 바로 옆에는 고려시대에 지어졌다는 청련암( 靑蓮庵)이란 조그만 암자가 터를 닦았으며, 사인암 입구에는 1977년 6월에 지방 유림에서 세운 역동우탁기적비(易東禹倬紀績碑)가 서 있다.
인근 상선암과 중선암, 하선암에 밀려 찾는 이가 적었으나 근래에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사람과 수레의 발길이 부쩍 늘어 음식점과 민박이 다수 생겨났다. 특히 이곳은 시골 북하리와도 10리 거리로 가까워 외가 친척들이 자주 놀러왔던 곳이다.
※ 사인암 찾아가기 (2011년 11월 기준) * 동서울터미널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1시간 간격으로 떠난다. * 서울 청량리역에서 단양행 열차가 1일 8~9회(6시 10분~21시) 다닌다. * 대구(북부), 대전, 청주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서너 회 떠난다. * 원주, 제천에서 단양행 직행버스가 1일 20여 회 있으며, 충주에서 1일 8회 운행한다. * 단양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에서 사인암 방면 군내버스가 1일 16 회(6:15~19:35)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무료) ①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좌회전 → 사인암
★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사인암 왼쪽 옆구리에 자리한 청련암 삼성각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출입금지이다.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 64 |
 ▲ 사인암 앞을 굽이쳐 흐르는 남조천과 늦가을이 내려앉은 주변 풍경 남한강을 향해 급하게 흘러가던 남조천의 물줄기도 이곳만큼은 서행하여 사인암의 절경을 즐긴다.
 ▲ 남조천에 걸린 구름다리
 ▲ 사인암 서쪽에 둥지를 튼 청련암이 사립문을 활짝 열어 사인암을 찾은 중생을 맞는다.
 ▲ 늦가을이 조용히 합장을 하며 머무는 청련암(靑蓮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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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 옆구리에는 청련암이란 조그만 절집이 둥지를 트고 있다. 처음에는 근래에 지어진 절로 생각했으나 나중에 확인해보니 제법 오래된 절집이었다.
이 절은 속리산 법주사(法住寺)의 말사(末寺)로 1373년(공민왕 22년)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했다고 한다. 허나 신빙성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710년에 중창 하여 청련암이라 했다고 하며, 원래는 인근 대강면 황정리에 있었다고 한다. 인근 대흥사(大興 寺)의 말사로 있다가 1954년 소백산 공비토벌 작전으로 황정리 일대에 소개령(疏開令)이 내려 지자 절의 대들보와 기둥을 가지고 사인암 옆에 새롭게 터를 닦았다.
청련암은 작고 조촐한 암자로 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이 전부이다. 그나마 극락전도 완전 여염 집 모습으로 절집의 품격이 많이 떨어진다. 다행히 옛 유물인 목조보살좌상이 하나 남아 2009년 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18세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사인암을 든든한 후광(後光)으로 삼고 있어 사인암에 온 사람들은 꼭 절에 발을 들이기 마련이 다. 절을 거쳐야만 사인암의 뒷통수로 올라갈 수 있으며, 사인암과 청련암이 완전히 하나의 덩 어리가 되어 생사고락을 같이한다. 근래에 사인암 방문객이 늘고 있다고 하니 자연히 절을 찾는 발길도 정비례할 수 밖에 없으니 정말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사인암이 건재하는 동안은 청련 암도 법등(法燈)을 끌 일은 없을 것이다. |
 ▲ 경내 우측에 마련된 석불좌상과 넓은 뜨락 뜨락 좌우로 쌍사자석등 2기가 석불과 뜨락을 비춘다.
 ▲ 여염집 모습의 청련암 극락전(極樂殿) 법당의 품격과는 거리가 먼 여염집 모습으로 중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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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밝은 표정의 극락전 목조보살좌상(木彫菩薩坐像) - 충북 지방유형문화재 3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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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불상은 원래 청련암 법당의 본존불인 아미타3존불의 하나로 만들어진 대세지보살상(大勢至菩 薩像)이다. 1954년 황정리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되었을 때, 본존불(本尊佛)은 어디론가 사라 지고,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은 제천 원각사로 옮겨지고, 대세지보살상만 수습하여 가져왔다. 그러니까 협시불이 본존불이 되어 불단 중앙에 홀로 봉안된 것이다. 그 외에 복장(腹臟)도 얼마 전까지 있었으나 그것마저 도난당하고 없다.
근래에 도금한 것을 벗기고 새로 개금(改金)을 했는데, 그때 목불(木佛)의 형태를 확인했으며, 은행나무로 만든 것임이 밝혀졌다. 청련암의 옛 유물로 18세기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그 시절 충청도 지역 불상 양식이 잘 반영되어 있다.
불상의 모습을 보면 마치 어린 동자가 관음보살의 의상과 보관(寶冠)을 쓰고 앉아있는 것 같다. 동자와 같은 귀여움과 해맑은 미소가 진하게 드리워진 그의 표정은 너무 밝아 보는 이의 눈을 눈부시게 만든다. 사인암과 청련암에 볼일이 있어 찾아온 화마(火魔)도 그의 표정 앞에서는 어 찌할 바를 모르고 돌아갈 것이다. |
 ▲ 물이 가득한 연꽃무늬 석조(石槽) 가을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아 나오는 물줄기는 중생의 마음처럼 답답하기만 하다. 수면 위에 살포시 떨어진 낙엽들은 올해의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만든다.
 ▲ 우탁의 탄로가(嘆老歌)가 쓰인 표석
한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은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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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탁이 남긴 시조(時調) 중에 늙음을 탄식하는 '탄로가'가 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세월은 흐르고 자신은 늙는다는 뜻이다. 30대에 문턱에 갓 들어왔지만 탄로가의 시문 앞에 무책임하게 나이를 먹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아직은 젊다고 안심을 하지만 빛의 속도로 내 달리는 세월 앞에서는 그 누구도 당할 존재가 없다. 생각하면 할 수록 무서운 일이다. 인간의 하루가 몇십~몇백 년에 이른다는 신선의 세계가 혹 우리가 사는 세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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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인암 뒷쪽 삼성각으로 오르는 계단길 어떻게 경사가 가파른 바위 절벽인 사인암 뒤쪽 에 건물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적당한 자리에 터를 닦아 삼성각을 만들고, 계단을 만들어 그 곳에 이르게 했다. 계단이 보기와 달리 상당히 가파르고 고르지가 못하여 올라가고 내려갈 때 주의가 필요하다. 예전에는 삼성각 뒤쪽을 통해 서 사인암 정상으로 오를 수 있었으나 보존과 안전상의 이유로 지금은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애써 오르려고 하지 말 것 ~~
삼성각은 사인암에 왔다면 꼭 발도장을 찍어야 되는 이곳의 명물이다. |
 ▲ 사인암 뒤쪽에 둥지를 튼 삼성각(三聖閣) 예전 칠성각(七星閣)으로 산신(山神)과 독성(獨聖, 나반존자), 칠성(七星)을 봉안했다. 지붕에는 낙엽들이 모여 앉아 저물어가는 늦가을을 원망한다. 저들도 시를 안다면 우탁의 탄로가를 모방한 탄엽가(嘆葉歌)를 부르지는 않을까?
 ▲ 삼성각 우측 바위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바위글씨 '퇴장(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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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의 모습이 한자이긴 한데 너무 유별나게 휘갈겨져 있어 일반 사람들은 해독이 어렵다. 그들 의 정체는 전서체(篆書體)로 쓰인 '退藏(퇴장, 스스로 물러나 숨는다)'이란 글씨로 조선 전기에 판교종사<判敎宗師, 불교 교종(敎宗)의 우두머리>를 지낸 운수의 낙관으로 추정된다. |
 ▲ 가을 단풍이 익어가는 삼성각 맞은편 바위에 중생의 조그만 소망이 깃들여진 돌탑이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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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련암을 지키는 견공(犬公) 혹시 불청객은 들어오지 않았는지 졸린 눈을 애써 가리며 뒤를 돌아보는 견공
 ▲ 꼬랑지를 흔들며 기지개를 켜는 견공 낮잠도 충분히 잤으니 이제 절을 지켜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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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암을 둘러보고 다음 행선지인 중선암으로 길을 향했다. 가는 도중 잠시 미노리(未老里)에 들렸는데, 그곳에 깃들여진 가을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길가에는 동네의 안녕을 지켜주는 서낭당이 있으며,주변으로 울긋불긋 타오른 단풍나무들이 저물어가는 늦가을의 막바지를 잡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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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노리 서낭당 가을이 질러놓은 단풍의 불이 서낭당 주변을 불태우고, 낙엽은 외마디 구슬픈 소리를 바람에 실어 보내며 대지로 힘없이 추락한다.
 ▲ 미노리의 대지를 적셔주는 남조천 겨울의 제국이 혹여 빨리 올까 봐 숨소리를 죽이며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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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양8경의 하나인 아름다운 계곡 ~ 중선암(中仙岩)
 |
미노리를 둘러보고 사인암에서 서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진 중선암을 찾았다. 중선암은 단양8경 의 하나로 삼선(三仙)계곡의 중심에 자리한다. 삼선계곡은 상선암(上仙岩), 중선암, 하선암(下 仙岩)을 일컬으며, 상선암이 가장 상류에 자리한다. 3개의 선암(仙岩)을 지난다고 하여 선암계 곡이라 불리기도 하며, 도락산(964m)에서 시작되어 3개의 선암과 소선암을 거쳐 단성 하방리까 지 이어지는 10km의 계곡으로 곳곳에 계곡이 빚은 아름다운 절경이 둥지를 트고 있어 눈이 제대 로 호강을 누린다.
하얀 맵시의 암반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으며, 가을이 곱게 색을 들인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졸 졸졸 흐르는 물이 조화를 이루어 한여름 피서지로 인기가 높다. 허나 인근 사인암, 소선암에 밀 려 예전에 명성은 많이 퇴색되었다고 한다. 특히 계곡 건너에 인공으로 돌을 쌓은 부분은 정말 옥의 티로 중선암의 아름다운 이름을 깎아 내린다.
계곡 중간에는 쌍룡(雙龍)이 승천했다고 하는 쌍룡폭포가 있으며, 옥렴대(玉簾臺)와 명경대(明 鏡臺)로 불리는 웅장한 바위가 있다. 옥렴대에는 1717년 충청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윤헌주 (尹憲柱)가 새긴 '사군강산 삼선수석(四郡江山 三仙水石)'이란 바위글씨가 전한다. 여기서 4군 은 단양과 영춘(永春), 제천(堤川), 청풍(淸風)으로 단양 지역의 돌과 물이 뛰어남을 강조하고 자 쓴 것이다. 조선시대부터 이곳 절경에 반해 많은 이들이 바위글씨를 남겼는데, 이곳에 전하 는 글씨만 300개에 이른다고 한다.
가을 단풍이 활활 타오른 중선암에서 머문 시간은 20분 정도로 그냥 계곡만 적당히 살펴보고 나 오는 수준이었다. 다들 어린 시절부터 학교 소풍 등으로 지겹게 찾던 곳으로 계곡 건너의 인공 이 가미된 둑을 지적하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았다고 입을 모은다. |
 ▲ 하선암을 향해 흐르는 중선암 계곡과 계곡에 걸린 구름다리
 ▲ 계곡 건너로 인공으로 만든 돌둑이 눈쌀을 조금 찌푸리게 한다. 저런 것을 보고 옥의 티라고 하는 것이다.
 ▲▼ 중선암에 불이 났다~~ 가을이 살짝 질러놓은 단풍의 불이 중선암 일대를 화사하게 불태운다. 잠시 세상의 짐을 내려놓고 이곳에 몇일 머물고 싶은 마음 굴뚝 같으나 그러지를 못하는 현실이 애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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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선암 찾아가기 (2011년 11월 기준) * 단양까지의 교통편은 앞의 사인암 참조 * 단양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에서 중선암 방면 군내버스가 1일 9 회(6:20~19:15)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주차장 있음, 주차비는 무료) ①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좌회전 → 사인암3거리에서 우회전 → 가산3거리에서 좌회전 → 중선암
★ 관람정보 * 입장료와 주차비는 없음 * 중선암에서 가까운 소선암에 소선암자연휴양림이 있다.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877 |
♠ 오랜만에 찾은 단양 시골 ~ 단성면 북상리(北上里)
 ▲ 북상리 표석 |
중선암을 둘러보고 아름다운 선암계곡을 따라 단성으로 나왔다. 원래는 소선암도 들릴려고 했으 나 어쩌다보니 그만 지나치고 말았다. 시간도 벌써 4시가 넘고 해서 바로 북상리 신랑집으로 이 동했다.
단성(丹城)은 단양의 옛 중심지로 원래는 단양읍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진 단양읍은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읍내(邑內) 대부분이 수몰지역에 들어감에 따라 매포읍 남쪽 상진리 남한강변에 길게 자리를 닦아 그곳으로 읍을 옮겼다. 옛 읍내는 위쪽 부분만 남으면서 읍에서 단양출장소( 出張所)로 격하되었으며, 옛 단양이란 뜻에서 구단양이라 불리게 되었다. 반면 상진리로 옮겨진 읍은 새로운 단양인 신단양이라 불렸다. 단양출장소는 단성면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며 구단양과 신단양 명칭은 2000년 이후 단성, 단양이 란 이름이 완전히 굳어지면서 많이 사라졌다. 허나 노공(老公)들과 단양 사람들 일부는 여전히 구/신단양이라 부른다.
외가집이 있던 시골 북하리는 단성에서 남쪽으로 1km 떨어진 제법 큰 마을이다. 옛 단양읍 시절, 중앙선 단양역이 가까운 곳(지금의 단성역 서쪽)에 있었다. 외가집은 군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가게 바로 서북쪽에 있어 교통과 위치 하나는 좋았으며, 5번 국도와 36번 국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라 수레의 왕래가 잦았다. 허나 1997년 이후 단양군청에서 이 주변을 공원으로 밀어버리 면서 막대한 추억이 담긴 외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대신 북쪽에 비어있는 집으로 옮겼다.
하지만 외조모가 2008년 별세하면서 그 집은 주인을 잃게 되었고, 현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 다. (넘어간 사정은 자세히 모르겠음) 북하리에 둥지를 트던 외가 친척은 죄다 서울과 경기도, 원주로 나가고 오직 신랑집(어머님의 작은아버지의 큰 아들 집안)만 남쪽으로 1km 떨어진 북상 리로 자리를 옮겼다. 북상리는 어린 시절 시골에 갔을 때 북상리로 종종 서리를 하러 간지라 낯 설지는 않다. 5번 국도의 짐을 덜어준 중앙고속도로가 북하리와 북상리 서쪽 산자락을 지나고 있는데, 덕분에 접근성은 매우 좋아졌지만 경관은 많이 망가졌다. 철없던 어린 시절 이곳에 고속도로가 뚫려 편 하게 오갔으면 좋겠다고 그랬는데 그게 현실이 된 것이다. |
 ▲ 죽령천을 따라 이어진 둑방길
 ▲ 죽령천 둑방길 사진 오른쪽 산자락에 보이는 고가는 5번 국도의 짐을 크게 덜어준 중앙고속도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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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하리 단양교에서 북상리까지 죽령천(竹嶺川)을 따라 약 1km의 둑방길이 있다. 둑방을 따라서 수령(樹齡)이 100년에서 300년에 이르는 오래된 나무들이 아낌없이 우거져 장관을 이루고 있는 데, 이들은 하천의 홍수를 막고 비보풍수(裨補風水)의 일환으로 조성된 제림(堤林)이다. 제림의 대명사인 전남 담양(潭陽)의 관방제림에 버금갈 정도로 아름답고 오래된 인공 둑방림인데도 어 찌된 영문인지 아직까지도 천연기념물이나 지방기념물로도 지정되지도 못했다. 그럴 가치가 있 음에도 말이다.
둑방을 따라 수레 2대가 교행할 수 있는 둑방길을 닦고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보도블록이 깔린 보도(步道)가 놓여져 있다. 중간중간 벤치를 설치하여 둑방림이 베푼 자연의 향기를 누릴 수 있 으며, 죽령천에서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의 제국을 오금저리게 만든다. 어린 시절 물놀이하 며 수중생물을 탄압(?)하던 죽령천은 그때와 약간 달라지진 했지만,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며 남 한강으로 흘러간다. |
 ▲ 300년의 나이를 먹은 느티나무 죽령천 둑방길에 뿌리를 내린 나무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측에 속한다. 이 나무는 단양군 보호수 9호이다.
 ▲ 죽령천 건너의 은행나무 가로수길 (5번 국도) 국도변에 잔뜩 깔린 은행나무는 올해의 마지막을 진하게 불태우며 처절한 아름다움을 속세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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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집에 들어가 일종의 뒷풀이를 하며 저녁까지 머물렀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몸을 움직이 기가 버겨울 정도이다. 뜰에는 오골계(烏骨鷄)를 비롯한 닭과 병아리가 뛰어놀고, 북하리 출신 사촌은 그들의 자녀와 조카를 데리고 죽령천에서 올갱이를 잡았다. 10월 말이긴 했지만 그리 춥 지는 않았다. 다들 어린 시절에는 서로 죽령천을 뒤집으며 살았는데, 나이를 먹고 외지로 나가 가정을 꾸리면서 되감기 조차 불가능한 옛 추억이 되버렸다. 정말 우탁의 탄로가처럼 세월이 무 상할 따름이다.
저녁이 되자 외삼촌과 이모 등은 서울로 올라가고 그 외 많은 친척들도 집으로 길을 재촉했다. 나도 나중을 기약하며 그들과 작별을 고했다. 나는 외삼촌, 이모와 같이 가기로 했으나 수레의 정원이 초과되어 따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사촌동생이 타려고 끊었던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 표를 받았다. 원주에 사는 사촌형님이 원주로 가면서 단양역에 데려다 주었고, 1,600원을 보태 특실로 표를 바꿨다. 어차피 표는 공짜로 얻은 것이니 나의 부담은 1,600원 밖에 되지 않는다.
이윽고 기적소리를 울리며 어둠이 잠긴 단양역으로 들어오는 청량리행 무궁화호 열차에 거추장 스러운 몸을 실어 서울로 올라왔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추억이 담긴 거대한 다이어리 시골 단 양 나들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그날의 막을 고한다.
※ 북하리, 북상리(죽령천 둑방길) 찾아가기 (2011년 11월 기준) * 단양까지의 교통편은 앞의 사인암 참조 * 단양터미널 건너편이나 부근 고수대교 종점, 단양역 입구에서 단성, 대강 방면 군내버스를 타 고 북하리나 북상리 하차, 버스는 1일 30여 회 운행한다. * 승용차로 가는 경우 ① 중앙고속도로 → 단양나들목을 나와서 우회전 → 장림4거리에서 직진 → 북상교3거리에서 좌 회전 → 북상리, 북하리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북상리, 북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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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일 - 2011년 11월 1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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