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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여름의 종로구 북부지역 (부암동 ~ 홍지동) 역사기행

도봉산 고양이 2007. 9. 3. 21:14

' 서울 종로구 북부 지역(부암동, 홍지동) 역사탐방 '
' 세검정 ~ 대원군별장 ~ 홍지문 ~ 보도각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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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높이 솟아난 북한산과 북악산(北岳山) 사이로 약간 움푹 들어간 분지(盆地)가 있다.
그 곳에는 홍지천(弘智川)의 상류 동네인 부암동과 구기동, 평창동이 들어앉아 있는데 서울 도심과
불과 고개(자하문고개) 하나 차이의 가까운 거리임에도 '이 곳이 정말 서울 맞어?' 의구심이 들 정
도로 도심과는 전혀 다른 전원(田園)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이 곳에는 삼국시대(6세기)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후기까지를 망라한 수많은 흔적들이 산재해 있어
다양한 볼꺼리를 선사해준다. 우선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기념으로 직접 시찰하여 세운
순수비(巡狩碑,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음)와 그 비석이 1500년 동안 살아왔던 비봉(碑峰), 그 봉
우리 아래로 고려와 조선시대 고찰인 승가사와 금선사(金仙寺), 승가사 위쪽 바위에 둥지를 튼 고려
중기 대불(大佛)인 구기동 마애석가여래좌상(보물 215호), 평창동 보현봉 아래로 산악신앙의 현장인
산신각(山神閣), 북악산의 뒤쪽 백사골(백사실)에는 비밀의 옛 정원인 백석동천 별서 유적이 300년
의 세월을 간직하며 오묘하게 숨어 있다.

비봉과 북악산에서 발원한 계류는 세검정(洗劍亭)에서 만나 한 몸이 되면서 비로소 홍지천을 이루니
그 부근으로 '조지서(造紙署)'와 '탕춘대'의 옛터를 알리는 표석, 세검정초등학교 안에는 서울 유일
의 당간지주인 장의사터(藏義寺) 당간지주가 심어져 있다.

큰 세상을 향해 부지런히 갈 길을 재촉하는 홍지천을 따라 내려가면 석파정에서 분리된 대원군 별장
의 사랑채를 만나게 되고, 홍지문을 통과하면 흥미로운 모습의 하얀 불상, '보도각 백불'을 만나게
되니, 이 불상이 바로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문화유적 벨트'의 종점이다.

아직까지는 그들의 인지도가 낮아 찾는 이도 그리 없지만, 서울에서 4대문 안쪽을 제외하고 이렇게
문화유적이 집중 분포하고 있는 곳도 거의 없으며 넉넉잡아 4시간 정도면 약간의 등산이 필요한 승
가사(僧伽寺)와 금선사를 제외한 나머지를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그럼 지금부터 세검정을 시작으로 홍지천을 따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장의사터 당간지주와 평창동 산신각, 석파정은 본 글에서 제외했으며 북악산 백석동천 별서 유적지
는 별도 글에서 따로 소개하도록 하겠다)


♠ 반역(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씻던 곳,
세검정(洗劍亭) ~ 서울 지방기념물 4호


신영3거리에서 상명대 방면으로 약 3분 정도 걸어가다보면 멋드러지게 생긴 바위 위로홍지천
(弘智川)을 바라보며 단아하게 서 있는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T' 형태의 구조로 지붕은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정자의 건립시기에 대
해서는다소 말들이 많으나 연산군(燕山君)이 부근에 탕춘대(蕩春臺)를 조성하면서 부속 정자
로 세웠다는말도 있고, 또는 숙종(肅宗) 연간에 북한산성을 축조하던 군사들의 휴식처로 세웠
다고도 한다.
하지만 둘 다 나름대로의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로 연산군 연간에 세워진 탕춘대 소속 정자가
세검정의전신(前身)이 아닐까 생각된다.

세검정의 세검(洗劍)은 말그대로 칼을 씻는다는 뜻으로 1623년 광해군(光海君)의 통치에 가득
불만을 품던 서인(西人) 패거리의 김유(金庾),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이 여기서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하며 칼을 물에 씻었다고 한다. (혹은 칼을 갈고 날을 세웠다고도 함)

김유를 중심으로 한 반란파는 얼마 뒤 군사를 이끌고 도성(都城)을 침범, 창덕궁을 점령하여
광해군을폐위하고 얼떨떨한 능양군(綾陽君)을 군주로 옹립한 이른바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저
지르게 된다.
정권을 잡은 반란파는 이 곳을 반정을 모의한 상징적인 장소로 삼으며 이를 기념하는 뜻에서
지금의 정자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 영조 24년(1748년)에 약간 수리를 하였으며, 1941년에 불타버려 그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7년에복원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 곳은 부근 풍경과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진 한국적인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홍지천의 졸졸졸
흐르는소리와 북한산의 시원스런 녹림(綠林)이 만나는 곳으로 도성(都城) 북쪽 지역에서 가장
사랑을받던 피서지였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이 곳에도 개발의 바람이불어오면서 옥계수(玉溪水)의 홍지천은 거의
저주받은 하천으로 전락해 버리고, 정자 옆으로 4차선의 도로가 뚫려 언제나 4발 수레들로 가
득하면서옛날의 운치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세검정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잠시 쉬어갈 수있도록 개방은 되어 있으나 그러는 사람은 거의
없는것같다. 정자에 앉아봤자 수레들이 내뿜는고약한 냄새와 하천에서 나오는 약간의 비린
내로예전처럼 몸이 상쾌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몸이나빠지는 것을 걱정해야 될 판이기 때문이
다.
인간의 이기(利器) 속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세검정. 언제나 옛날의 운치를 되찾을 수 있을까?

세검정 찾아가기 (2007년 9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0212, 1020, 1711, 7022번 이용, 세검정초교(신
영상가)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10번, 153번 세검정초교(신영상가) 하차


▲ 세검정 아래의 둥근 넓적한 하얀 바위, 차일암(遮日巖)

기분 같아서는 정말 벌러렁 누워서 한잠 청하고 싶은 잘생긴 바위, 홍지천을 정화하여 옛날의
옥류천(玉流川)을 재현했으면 좋으련만..

◀ 사초를 깨끗하게 세초
(洗草)하던 세검정 차일암
(遮日巖)

사초 등의 서적을 세초하는
곳은 이곳 외에도 서대문
밖, 지금에 아현동에도 있
었다고 한다.



▲ 탕춘대(蕩春臺) 한지마을터 표석(세검정 부근 길가)

닥나무는 한지(韓紙) 외에도 오늘날의 휴지 역할도 하였다.
백제(百濟) 사람들과 고대 왜국(倭國) 사람들은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 닥나무 잎을 사용했다
고 한다.

◀ 탕춘대(蕩春臺)
표석 (세검정 부근)


♠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석파정의 옛 사랑방 - 대원군별장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23호


세검정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약 2분 정도 걸어가다 보면 상명대 입구(홍지동) 4거리가 나온다.
그 사거리의 동남쪽에는 고풍스런 멋이 풍기는 넓은 기와집이 하나 자리해 있는데 얼핏 보면
조선시대에 세워진 전통 한옥이나 별장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석파랑

(石坡廊)이라불리는 전통 고급 한식당으로 서예가로 크게 활약했던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선생이1958년에 세워 자신의 거처로 삼았다.

소전 선생은 6.25 시절, 북으로 끌려갈 뻔한 간송미술관의 동산문화재를 뛰어난 재치로 지켜
낸위인이다. 특히 왜국(倭國)으로팔려간 김정희(金正喜)의 완당세한도(阮堂歲寒圖)를 천신
만고끝에가지고 온 인물로유명한데, 그는 집을 지으면서 평소 석파정에눈독을 들였는지
석파정의 사랑채만을 이곳으로 가지고 왔다.

이 건물은 맞배지붕의 'ㄱ'자 형태로, 방이 모두 3개인데 가운데 큰 방은 흥선대원군의 방이
고건너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 대청 방은 그의 주특기인 사군자(四君子)의 난초를 그릴
때만특별히 사용했다고 한다. 사랑채의 마루 안쪽에는 난간을 설치하여 고급스러운 주택분위
기를풍기고 있으며, 창문 쪽 외벽에는 동그란 창문을 내고 그 주변 외벽에는 모조리 벽돌로
도배하여마치 감옥처럼 폐쇄적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중국 건축 양식으
로그 디자인을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현재 이 곳은 석파랑 주인이 소유하고 있으며, 식당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대원군 별장이 졸지에 식당 손님들 밥 먹는 곳으로 전락해 버리다니.. 방 안에 환풍기 같은
시설이 얼마나 눈에 거슬리던지, 하지만 그런데로 깨끗히 보존되고는 있으니, 이 정도면뭐,
봐줄 만은하겠다.
사랑채로 접근하는 방법은 석파랑 정문을 이용하여 가는 것과, 석파랑 남쪽 주차장 쪽으로 가
는길이 있는데 보통 주차장 쪽으로 가는 것이 더 접근이 쉽고, 석파랑 관계자의 눈치를 덜
받는다.

현재 사랑채는 석파정과 따로 분류하여 '대원군 별장'이란 이름으로
서울지방유형문화재 23호
로 지정되었다.

대원군별장, 석파랑 찾아가기 (2007년 9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0212번,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상명대입구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10번, 153번 상명대입구 하차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730번 상명대입구 하차

▲ 보랏빛 향기로 가득한 비비추
생긴 모습이 꼭 나팔 같다.. 그 이름도 너무 특이하고..
자칫 인터넷 세계의 용어인 '비추(비 추천)'로 오인할 수도..


♠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던 탕춘대성의 성문, 홍지문(弘智門)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3호


상명대 입구에서 홍은동 방면으로 3분 정도 가다보면 고색창연한 모습의 성문(城門)인 홍지문
과 '탕춘대성(蕩春臺城)'이라 불리는 성곽을 만나게 된다.

조선 숙종은 혹 일어날지도 모르는 청나라와의 맞짱을 대비하기 위해 한양 도성 북쪽에 있는
북한산성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며 산성을 크게 중축하였다.
그리고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고 부암동, 평창동 일대 주요 국가시설(평창<平
倉>, 선혜청) 등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1715년, 도성의 인왕산(仁王山)과'북한산성'을 잇는
약 7km의 성을 쌓았는데, 그 과정에서 홍지문이 탄생하였다.

이 성은 세검정 부근에 연산군이 세웠다는 '탕춘대'의 이름을 따서 '탕춘대성'이라 부르며간
단하게 2글자로 서성(西城)이라고도 부른다.

홍지문은 한북정맥(漢北整脈)이 지나는 길목에 세워져 있어 '한북문(漢北門)'이라 불리기도
하며 성안쪽 동네인 부암동, 구기동, 평창동은 선혜청(宣惠廳), 평창(平倉), 조지서(造紙署)
등의 주요 국가시설이있던 중요한 곳이다.

200년 가까이 잘 살아오던 홍지문은 1921년 1월, 지붕에 쌓여진 세월의 무게를 감당치 못하고
문루가 폭삭 붕괴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홍수로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마저 무책임하게
떠내려가 터만 남아있던것을1977년 7월, 홍지문과 함께 복원하였다.

우리나라 성문 중 거의 유일하게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케이스로 어린 시절 문루까지 올라가
놀던 기억이난다. 하지만 지금은 보호를 위해 문루와 오간대수문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문 밖에는 벤치 등이 마련되어 있어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 주변으로
나무들이 무성히 심어져, 한여름에도 시원하다.
또한 문을 경계로 하여 안쪽은 종로구 부암동(홍지동), 바깥쪽은 서대문구 홍은동이다.

홍지문 찾아가기 (2007년 9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18번, 홍지문 하차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730번, 홍지문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10, 153번 홍지문 하차

▲ 홍지문의 뒷모습
오는 이, 가는 이, 누구 하나 막지 않고 언제나 활짝 열려있는 홍지문.
문루는 흔히 성문에서 많이 쓰는 우진각 지붕으로 탕춘대성의 유일한 성문이다.
<암문(暗門) 같은 것은 제외>

홍지문 천정에 그려진 와운문(渦
雲紋)

신선의 오색구름처럼 영롱하게 그려진
구름의 모습이 마치물결의 거센 소용
돌이를 보는 듯 하다.

▲ 홍지천의 물을 하염없이 흘려 보내는 오간대수문
북한산과 북악산 백사골에서 발원한 홍지천의 물은 졸졸졸 노래는 부르며 저 문을 거쳐 한강
으로흘러간다.
마치 냇물 위에 떠 있는 5개의 무지개를 보듯, 유연하게 구부러진 홍예의 곡선이 그저 아름답
기만 하다.


♠ 고려시대에 조성된 거대한 하얀 불상 - 보도각 마애보살좌상(普渡閣 磨崖菩薩坐像)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17호


홍지문을 지나 큰 세상을 향해 부지런히 갈 길을 재촉하는 홍지천을 10분 정도 따라 가면 냇
가 건너로 커다란 하얀 불상이 보인다. 이가 바로 상서로운 관음보살로 통하는 '보도각 백불'
이다.

보도각 백불은 서울에 남아있는 8개의 오래된 마애불(磨崖佛)의 하나이자, 딱 4개 밖에 없는
고려시대마애불로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세검정 부근에 터를 잡던 고려 때 사찰
장의사(藏義寺)의 불상으로 여겨진다.

이 불상은 붙임바위라 불리는 커다란 바위에 둥지를 텄는데 높이는5m에 이르며, 온 몸이 새
하얀 탓에 보통 '백불'로통하지만 다른 애칭으로 '해수관음(海水觀音)'이라 불리기도한다.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바위 주변으로 사방이모
두개방된 각(閣)을 세웠는데, 그 이름이바로
'보도각'이다. 그래서 '보도각 백불'이란 이름
을 얻게되었던 것.

보도각 백불은 처음부터 백불이 아니었다. 하지
만그 범상치 않은 모습 때문인지 조선을 세운
태조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하여 제일 먼저 이
곳을찾아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조선왕실의 주요 기복처(祈福處)로
각별한 인연을 지녔으며 조선 후반에 이르러흥
선대원군의 부인이자 고종(高宗)의 생모인 부대
부인민씨(府大夫人閔氏)도 여기서 아들의 천복
(天福)을빌면서 그 기념(?)으로조개껍데기를
태워서만든'호분
(胡粉, 여자들 화장품으로 많
이 사용)
'으로하얗게 도배를 했다.

▲ 시원하게 흐르는 홍지천 변에 들어앉은
'보도각 백불' 정말 여름피서가 따로 없다.

이 불상은 고려대 뒤쪽에 있는 보타암(寶唾庵)의마애불과 여러모로 비슷하여, 혹 쌍둥이로착
각을불러일으킬 정도인데, 공교롭게도 두불상의 조성시기가 비슷하여 같은 사람이나 서울
을 배경으로 한 지방세력이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백불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한 커다란 바위는 '붙임바위'라고 하는데, 그 바위에 돌을 붙이면 소
원이이루어진다고 하여 중생들이 쌓아놓은 돌탑들로 가득하다.

보도각 백불 찾아가기 (2007년 9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18번,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 3호선 녹번역(4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730번,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 2호선 신촌역(1,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110, 153번 유원하나아파트 하차

▲ 홍지천 건너에서 바라본 옥천암(玉泉庵)
홍지천 위에 떠 있는 이 다리를 건너면 하얀 피부의 '보도각 백불'과 그 불상으로 먹고 사는
옥천암이 나온다. 이 절은 조선시대에 창건되었는데 아마도 파괴된 장의사의 뒤를 잇고 백불
을 관리하려는목적에서 세워진 것 같다.


▲ 가까이서 바라본 보도각 백불

불상의 덩치가 워낙에 커서 그의 모습을 한 장
의사진으로 담는 것은 힘들다.
게다가 불상 앞으로 어지럽게 걸려진 연등과
전깃줄이 그의 온전한 모습을 담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불상의 전신(全身)은 모두 새하얗지만, 그의
장식물은 특이하게도 금색으로 되어 있다.
오른손에 걸린 금팔찌, 삼도(三道) 아래로커
다란 목걸이(?), 주렁주렁 매달린 장식으로 무
거워만보이는 보관(寶冠), 그리고 귀에걸린
귀걸이까지 갖출 건 정말로 다 갖추었다.
그의 얼굴은 거의 포근한 인상으로 중생들의
소원은 그게 무엇이 되었든 다 들어줄 것만
같다.

홍지천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은 '一'자모습
으로 지그시 뜨고 있으며, 길다란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닿는다.
살짝 다문 입술은 립스틱을 넘치도록 바른 듯
상당히 찐하다.

◀ 불상의 아랫 도리
불상의 몸을 덮고 있는 옷의 주름이 세세히묘
사되어 있어 마치 진짜 옷을 걸친 듯 하다.

백불 앞에는 아줌마 4명이 정성스레 기도를 드
리느라 여념들이 없다. 부디 그 정성이 백불을
감동시켜 그들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
라면서 본 글을 마친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6년 6월 25일 / 8월 2일
* 작성 시작일 - 2006년 8월 2일
* 작성 완료일 - 2006년 8월 4일
* 숙성기간 - 2006년 8월 5일 ~ 2007년 8월 30일
* 공개일 - 2007년 8월 30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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