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권 사진,답사기

옛 안라국(아라가야)의 도읍, 경남 함안을 가다 ~~

도봉산 고양이 2008. 1. 20. 19:59


' 옛 안라국(安羅國)의 터전, 경남 함안 고을~ '


▲ 옛 무덤의 거대한 물결 ~ 함안 말산리 / 도항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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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 고을의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
함안박물관(咸安博物館, Haman Museum)


▲ 안라국 불꽃무늬토기들 ~
1600년의 기나긴 잠을 깨고 다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 보인 옛 안라국의 토기들
불꽃무늬토기는 함안 지역 고유의 토기 양식으로 왜열도 오사까, 나라 지역 토기의
큰 영향을 주었다.


함안 고을은 나의 오랜 미답지(未踏地)로 인연이 참 지지리도 없던 곳이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드디어 함안 고을에 발을 들여놓았다.

함안 고을의 중심지인 가야(伽倻) 읍내 서쪽 언덕(함안군청의 서쪽)에는 옛 안라국의 높다란
무덤(도항리, 말산리 고분군)들이 빼곡히 자리해 있고, 그 언덕을 넘으면 서쪽자락으로 함안
고을의 오랜 내력과 민속, 문화를 담고 있는 작지만 수려한 외모의 군립(郡立)함안박물관이
나온다.

이 곳은 제2차 가야문화권 정비계획에 따라 함안군청에서 1998년에 건립 계획을 세우고, 2003
년 5월에 건물이 완성, 동년 10월 30일에 개관을 했다.
5,200평의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물 면적은 550평이다. 박물관을 세운 이유는 가야
연맹의 하나였던 안라국의 역사와 유물을 전시, 연구, 홍보하기 위함으로 안라국 외에도 함안
고을의 역사와 문화, 생활 등을 꼼꼼히 담고 있다.

박물관 1층에는 함안 지역 고분에서나온 안라국 시절 유물들이 조명의 후광(後光)을 받으며
당당히 관람객들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으며, 2층에도 앞층과 마찬가지로 안라국 유물들이 주류
를 이루나 좀 더 세심히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박물관 부근 성산성(城山城)에서 출토된 목
간(木簡) 160점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목간 중에서 제일 양이 많고 가장 오래된 것으로 문헌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열쇠로써 그 가치는 매우 크다.
하지만 해독(解讀)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어 목간의 내용과 성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체로 물품 꼬리표라는 설과 신분증이라는 설이 있음)
그 외에 안라국 특유의 토기인 불꽃무늬토기와 그 시절 철기 문화 수준을 짐작케 해주는 말갑
옷과 기타 여러 갑옷 등이 주 볼꺼리이며, 7세기 이후, 함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다룬 전시
실도 따로 베풀어져 있는 가히 함안 고을의 역사, 문화를 한 곳에 담은 휼륭한 문화적 공간이
라 하겠다.
(박물관 내부 유물에 대한 언급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며 안라국에 대한 것은 아래 말산리/도항
리 고분군 참조 ~)


박물관이 세워진지 어언 5년이 다 되어가지만 인지도는 아직 형편없다. 박물관과 미술관 쪽에
훤한 나 역시도 이번에야 그 존재를 알았을 정도니까.. 게다가 편의시설도 없고, 매표소도건
물 안에 들어가야 있으며, 이를 알리는 이정표도 없어, 이 곳의 초행인 사람들을 은근히 당황
케 만들고 있어, 박물관의 관람객들에 대한 좀 더 세심한 배려가 절실하다.

비록 아직 찾는 이도 적고, 규모도 작지만, 전시 유물들은 정말로 알차다. 입장료가 별로 아깝
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 함안박물관 찾아가기 (2008년 1월 기준)
* 부산(사상)에서 함안행 직행버스, 마산에서 함안행 직행/완행버스 이용.
* 함안터미널과 함안역에서 택시로 6분
* 함안(가야)터미널 / 함안역 → 함안군청 → 아라공원 혹은 고분군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언덕으로→언덕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하산 → 함안박물관 (도보 30분)
* 함안(가야)터미널 / 함안역 → 진주 방면으로 5분 정도 가면 함안여중, 박물관을 알리는 이
정표 있음→ 함안여중 → 함안박물관 (도보 30분)
* 승용차로 박물관까지 접근 가능, 주차료는 공짜임

♣ 관람시간 : 3월 ~ 10월까지 9시 ~ 18시
11월 ~ 2월 : 9시 ~ 17시
♣ 관람요금 - 일반 500원(단체 400원) / 중고생 300원(단
체 200원) / 어린이 200원(단체 100원)
♣ 65세 이상 및 국가유공자, 장애인, 7세 이하는 무료
♣ 휴관일 - 매주 월요일 / 1월 1일 / 설과 추석
♣ 소재지 -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748
♣ 박물관 홈페이지는 오른쪽 '수레바퀴토기(5세기 유물)'
를 클릭 할 것~ (☎ 055-580-3621)

◈ 박물관을 둘러보고 뒷산의 말산리, 도항리 고분군을 후식삼아 같이 둘러보길 권한다.

박물관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고분이 있는 언덕과 봄소풍 장소로 제격인 조그만 공원이 있고,
서쪽에는 넓은 뜰이 소박하면서도 어여쁘게 꾸며져 있다. 마치 미술관의 야외 전시를 보는 듯,
곳곳으로 함안 땅 곳곳에서 가져온 동산문화재들이 배치되어 눈을 심심치 않게 해준다.

수레바퀴토기를 크게 확대해서 만든 거대한 모형과 굽다리 토기의 확대 모형이 박물관의 좌,우
를 지키고 서 있으며 개성이 넘치는 박물관 건물 부근으로 적석목곽분(積石木棺墳)의 복원 모
형과 고인돌, 선돌이 자리해 있다.

▲ 박물관 동쪽에 조성된 공원
돗자리 하나 피고 도시락을 까먹으며, 낮잠을 즐기고 싶은 곳이다.
겨울에 푹 잠긴 공원 가운데로 개울 대신 맨홀뚜껑이 펼쳐져 있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위로 나무 다리까지 버젓히 걸어놓았으니
무슨 맛으로 다리를 건넌단 말인가...?

▲ 덧널 무덤(土壙木槨墓)
덧널 무덤의 형태 및 발굴 당시에 무덤 내부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덧널 무덤이란 땅을 파서 목곽(木槨)을 안치한 무덤을 말한다.

옛 안라국 지배층의 시신을 안치했던 목곽에는 그들이 쓰던 토기들로 가득하다.
그 모습도 정말 가지각색.. 옛 안라국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 함안 군북에서 가져온 고인돌(支石墓) ~ 경남 지방기념물 183호
잔디 위로 뚜껑돌만 덩그러니 놓인 고인돌로 삼한시대에 함안 군북 지역을
다스리던 군장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얼핏 보면 땅 위에 그냥 엎어진 평범한 바위로 오인 할 수 있다.

▲ 선돌(立石)
뚜껑돌만 놓인 고인돌 옆으로 손을 대면 비어서 피가 날 정도로
날카로운 기세의 선돌이 심어져 있다.
선돌은 신앙의 대상물 혹은 지배자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목적,
세력이나 지역의 경계로 세웠다고 한다.

▲ 머릿 부분만 덩그러니 남은 8각원당형 부도(浮屠)
부도의 몸뚱아리는 어디가고 머리장식만 저렇게 외로이 남아 있는 것일까??
지금은 부도탑의 탑신(塔身) 대신 잔디를 덮어주고 있다.


▲ 옥개석이 심하게 손상된 3층석탑과 항아리 형제들 ~~


♠ 옛 안라국(安羅國)의 영화로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
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 - 사적 84호 ~ 85호


▲ 말산리 제3호분


함안(가야)읍내의 서쪽 언덕, 그러니까 함안군청의 뒤쪽 언덕으로 1500년 전에 사라진 안라국(아라가야)의 옛 무덤들이 옛 영화로움을 조용히 간직하며 옹기종기 모여들 있다.


안라국은 함안 일대에 둥지를 튼 나라로 흔히 가야 연맹의 하나였던 아라가야(阿羅伽倻)로통한
다. 하지만 아라가야는 신라 중기 이후에 생겨난 명칭이며 안라국이 정확한 이름이다.

평지에 조성된 백제, 신라의 옛 무덤과는 달리 가야의 옛 무덤들은 유난히도산자락이나 구릉

고령 지산동 고분군, 성주 성산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을선호하
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진 속 시원한 해답이없는 것 같다.


▲ 말산리 제10호분

이들 고분은 안라국 지배층들의 유택(幽宅)으로확인
된 무덤이 무려 120기에 이르나 봉분(封墳)이제대로
남아있는 것은 불과 40여기 정도에 불과하다.

하나의 언덕을 가득 메우며 들어앉아 있지만 행정구
역이 약간 어긋나는 관계로 군청 뒤쪽의 4기는
'말산
리 고분군'
으로 그 외에는 모두 '도항리 고분군'으로
분류하였다.

1917년 왜인들이 처음으로 발굴 조사를 한 이후, 상당수의 무덤들이 소리소문도 없이 도굴을
당했으며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창원문화재연구소가 3차례에 걸쳐 발굴을 하여 수레바퀴토
기(土器)와 새모양토기 등의 각종 토기류, 철로 만든 무기와 갑옷, 말에게 입히던 여러 장식
물, 그리고 안라국 사람의 뼈가 출토되었다.

무덤의 내부 구조는 덧널무덤(목곽묘)이 주류를 이루
며 일부는 구덩이식 돌방무덤(竪穴式)을 취하고있는
데, 덧널무덤들은 대체로 4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조
성된 것으로 보이며 수혈식의 하나인 34호분은이 곳
에서 제일 큰 무덤으로 직경이 40m, 높이가무려 10m
에 이르러 거의 하나의 조그만 언덕이다.

그렇다면 무덤의 주인들이 다스렸던 안라국은 과연
어떤 나라일까?

청동기시대, 함안 지역에 둥지를 튼 세력은 주변의 여러 세력을 통합하여 기원전 3세기 경,조
그만 나라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안라국의 전신(前身)인 안야국(安倻國)이다.
안야국은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도 그 이름이 등장하는데 경상남도 일대를주
름잡던 변한 연맹(弁韓 聯盟)의 하나로 변한은 12개의 작은 나라로 이루어져있었다.

1세기 경, 김수로(金首露) 세력은 변한연맹의 하나인
구야국(狗倻國, 경남 김해)에서 세력을 일으켜가락국
(駕洛國 = 금관가야)을 세웠다.
가야는 점차 세력을 확대하여 변한 제국(諸國)을대부
분통합해 나가는데, 기존 세력을 인정하면서그 군장
(君長)에게 통치권을 부여하거나, 가락국의 왕족이나
망족(望族)을 파견, 그 지역의왕으로 봉하면서 연맹
국가 체제를구축하였다.

변한을 대신한 가야의 출현으로 안야국도 별 수 없이 가야연맹의 일원이 된다.
비록 가야라는 이름으로 뭉치긴 했지만 모두 독자적인 나라라 국익에 따른 분쟁은 항시 일어났
던 모양인데 그 중에 하나가 3세기 초반에 일어났던 포상팔국(浦上八國) 전쟁이다.

가야 연맹의 중심인 가락국(駕洛國)은 주변 나라와의 해상교역권을 송두리째 차지하며 혼자서만
배를 불리자 경남 남부 해안가에 있던 안야국을 비롯한 8개의 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가락국
을 공격했다.
가락국은 서둘러 신라에 구원을 청했으나, 8국 연합군의 수군(水軍)이 신라 땅인 울산까지 치고
들어와 그 기세를 떨치니 가락국은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안야국은 가야 연맹의 주 세력으로
우뚝 서게 되며, 이 시기에 안라국(安羅國)으로이름
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4세기 후반, 백제(百濟)는 숙적 신라를 치기 위해속
국(屬國)인 왜(倭)의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공격케
했다. 신라 내물왕(奈勿王)은 급히 고구려에 살려달라
요청을 했고, 고구려의군주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은 기병 5만을 이끌고 서라벌을 포위한 왜군을 공격
한다.

고구려의 파상적인 공격에 혼비백산한 왜군은 가야로 급히 줄행랑을 치는데, 고구려군은 그들을
쫓아아예 가야까지 풍비박산을 내버린다.
그 과정에서 대가야(경북 고령)를 비롯한 대다수의 가야연맹국들은 큰 혼란에 빠져 허우적거렸
으나 안라국은 다행히도 혼란을 잘 수습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529년에는 도성(함안)에 높다란 건물을 짓고, 신라와 백제, 왜의 관리들을 초청해 몇달 동안국
제회의를 개최하니 이것이 그 유명한 안라고당회의(安羅高堂會議)이다.
이 3개국 국제회의로 안라국은 그 국위를 크게 떨치며 가야의 중심국으로 막바지 성장을하게
된다.

그러나 532년, 가야 연맹의 오랜 맹주인,가락국이 신
라에게 무너지면서 안라국과주변 연맹국들은 큰 위기
를 느낀다. 어떻게든 나라를 유지하기위해 백제와 왜
열도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동맹관계 강화에 주력
했다.

그러다가 554년 신라의 배신 행위에 크게 분노한백제
성왕(聖王)은 3만의 대군으로 신라의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을 공격한다. 이에 대가야(大伽倻)와안라
국 등 가야의 여러 제국(諸國)은 서로앞다투어군사
와 군수물자를 보내 백제를적극 도왔다.

거의 국제전에 버금가는 이 전쟁은 처음에는 백제,가
야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다.
허나 고구려와 일종의 불가침 밀약을 맺은신라는북
쪽 전방에 배치된 군사를 관산성으로 대거 투입시키면
서 전쟁은 장기화를 띠게 되고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군사들을 독려하러 간 성왕이 삼년산성(三
年山城)에서 온 신라군의 기습에 사로잡혀 시해(弑害)
를 당하니, 그여파로 백제, 가야 연합군은 크게 전의
(戰意)를 상실. 결국 4만이 넘는전사자를 내고 패퇴
하고만다.

이 전쟁에 마지막 희망을 걸며 젖먹던 힘을 다해백제
를 도왔던 가야 연맹은 전쟁에서 패한 충격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많은 군사와 물자를 쏟아 부으며 전
쟁에 참여했지만, 얻은 것이 없으며그나마 믿었던 우
방, 백제는 제왕을 잃은 충격에더 이상 신라를 공격
하지 못하고 폭삭 주저 앉고말았던 것이다.

가야가 백제를 도운 사실에 뚜껑이 열릴데로 열린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대대적인 보복조치로
가야 정벌을 단행,비화가야(非火伽倻, 경남 창녕)를 비롯한 그나마 남은 가야 제국을하나,둘
청소해버린다. 안라국 역시 신라군의 파상적인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561년경멸망의비운을
맞는다 ~~
그리고 그 이듬해인 562년, 대가야가 무너지면서 가야는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채, 역사 속으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안라국의 영역은 함안을 중심으로 북으로는 의령, 동
으로 마산, 서로는 진주, 남으로는 마산의 진동, 오서
에 이르렀으며 진동에 안라국의 무역항이있었던 것으
로 보인다.
그들은 진동 앞바다를 통해 왜열도로 진출하여 오사까
와 나라 지역 등, 여러 지역을 개척하여 통치했으며
그들의 선진문화를 아낌없이 전해주었으니불꽃무늬토
기가 이를 입증해준다.

안라국의 군주를 비롯하여 지배층들이 고이잠들어 있
는 도항리, 말산리 고분군은 정말로 넓다.
처음에는 1시간 정도로 생각했는데 끝까지 다 둘러보
니 거의 2시간이나 걸렸다.

솔직히 재미도 별로 없는 천년 전의 옛 무덤들을지겹
게 본 것은 작년 3월 하순 '성주 성산동 고분군' 이후
10개월 만으로, 무덤의 모습은 거의 비슷비슷하다. 무
덤의 곡선과크기가좀 다르다는 것 말고는 말이다.
(☞ 성주 성산동 고분군 보러 가기)


저 무덤들을 만들기 위해 강제 동원되어, 땀과 피를
바친 안라국의 수많은 백성들, 그리고 죽어서도 자신
의 권위를 과시하며 누리고자 소망했던 망족(望族)들
의 부질없는 행동, 인생이란 죽으면 그만인 것을뭐가
아쉬워서 그렇게 큰 무덤을 만들었던 것일까? 다 썩어
문드러진 그들의 육신을 위한공간치고는 너무넓은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부질없는 행동은 전설 속으로만 남을
뻔 했던 안라국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 곳
에서 나온 수백점의 유물(함안박물관 소장)은1500년
전 그들의 존재를 약간이나마느끼게 해주기에 충분하
다.

무덤들 사이로 조성된 산길에 가까운 산책로에는산책
을 즐기는 읍민들이 종종 눈에 띈다.
안라국 시절에는 일반 백성들은 함부로 접근도 못했을
지배층의 무덤들이 이젠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산책코
스로 탈바꿈 한 것이다. 물론 무덤이다보니 어둑어둑
한 시간에는 좀 무서울 것 같다.

무덤 봉분에 올라가 천하를 바라보니 함안(가야)읍내
가 두 눈에 훤히 내려다 보이고, 성산(城山)을 비롯한
주변 산들이 내 눈 높이에서 나를 바라본다.
언덕 위로 다시 새로운 언덕을 이룬 무덤들사이로갈
대밭이 바람에 휘날리고, 겨울에 잠긴 나무들은봄의
해방군을 기다리며 다시금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

고분군 중간 부분으로 약 200년 정도 먹은 커다란느
티나무가 있는데, 아마도 당(堂)나무의 역할을했던
모양이다.

몇몇 고분들 주변으로는 그들을 든든한 후광으로삼은
민묘(民墓)들이 떡 들어앉아 있다.
오래 전에 사라진 안라국 지배층의 커다란 무덤과 그
런 무덤들 사이로 속칭 꼽사리 낀 서민들의 쥐꼬리만
한 무덤과의 어색한 조화의 현장이다.

비록 오래 전에 사라진 성산가야 지배층의 사후(死後)
공간에 후대 서민들의 무덤들이 건방지게들어앉은
모습이 옥의 티처럼 영 마음에 들지않는다.
문화유적 보호를 위해서라도 저 무덤들은 반드시이장
(移葬)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너도 무덤이냐??
생긴 모습은 좀 우울하지만, 저것도 엄연한 안라국의 옛 무덤이다.
1500년의 세월이 요염하게 솟은 무덤의 모습을 저렇게 평퍼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무덤과 나무

◀ 도항리 제9호 고인돌
땅에 단단히도 박혀 있는 저 돌덩어리가
고인돌이란 말인가..??

▶ 도항리 제10호 고인돌
이건 그래도 9호 고인돌보다는
낫다. 바위 덩어리가 그런데로
솟아나 뚜껑돌처럼 보이니 말이다.

▲ 아라공원(阿羅公園) 표석
함안군청 뒤쪽 언덕, 그러니까 고분군 일대가 아라공원이다.

▲ 아라공원에 세워진 3.1운동 기념탑
말산리 고분군을 뒷배경으로 삼아 읍내를 바라보는 3.1 운동 기념탑
독립만세를 외치던 그날의 함성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며, 탑 옆에 솟아난
나무도 팔을 넓게 활짝 올리며 덩달아 함성을 외치는 것 같다.


※ 말산리, 도항리 고분군 찾아가기 (2008년 1월 기준)
* 함안(가야)터미널 / 함안역 → 함안군청 → 아라공원 혹은 고분군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언덕으로(도보 25분)
* 관람시간에 제한은 없으며, 주차는 함안박물관과 함안군청에 하면 된다.
* 소재지 -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484 / 말산리 325 일대



함안에서 부산으로 넘어가고자 마산을 찍고 진해 시내로 들어섰다.
시내 한복판 8거리에는 진해에서 제일 오래된 근대 건축물인 진해우체국건물이 자리해 있
는데. 그 곳을 끝으로 본 글을 마치고자 한다.


▲ 진해 우체국 - 사적 291호

유달리도 하얀 목조 건물 위로 연녹색의 지붕을 얹힌 근대 건축물로 1912년 10월 25일에 준
공되었다.
이 건물은 왜정 시절, 우편업무와 전기통신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1944년 왜정은 동판지붕과
난간을 군수품으로 뜯어가면서 아연판으로 대체하였다.
1945년 이후에는 진해우체국으로 쓰였다가 근래에 그 옆으로 새롭게 만든 청사로 우체국을
이전하면서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하여 쉬고 있다.
건물 양식은 러시아 풍이라고 하며, 예전 이 곳에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다고 한다. 정면 현
관에는 투스칸 오더(Tuscan order)의 원기둥을 세웠다.

건물 내부는 우체 업무를 보는 영업장과 객장 사이로 높은 카운터를 두었으며 내부 바닥은
원래 목조마루였으나 1984년에 시멘트로 교체했으며 지붕도 아연에서 동판으로 바꿨다.

진해시내에서, 유난히 돋보이는 건물로 대한제국 이후, 어촌에서 어엿한 도시로 성장한 진
해의 역사를 묵묵히 대변해주고 있다.

※ 진해 우체국 찾아가기 (2008년 1월 기준)
* 창원터미널에서 150번 버스 / 마산역 입구, 마산터미널, 마산고속터미널에서 좌석 760번
이용, 진해 문화원 하차
* 소재지 - 경남 진해시 통신동 1 (☎
055-542-0005)


* 답사, 촬영 일시 - 2007년 1월 17일
* 작성 시작일 - 2007년 1월 31일
* 작성 완료일 - 2007년 2월 6일
* 숙성기간 ~ 2007년 2월 6일 ~ 2008년 1월 16일
* 공개일 - 2008년 1월 16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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