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사진,답사기
가을의 길목에서 쌍미륵불을 만나다 ~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도봉산 고양이
2008. 10. 14. 20:48
'쌍미륵불을 만나다 ~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龍尾里 石佛立像)'
▲ 머리 둘, 몸통 둘에 용미리 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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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더위로 막바지 위세를 떨친 여름의 제국이 슬슬 그 힘을 다하던 9월의 끝 무렵, 친한 후배와 쌍미
륵불로 유명한 파주 용미리 석불을 찾았다.
용미리 석불까지는 서울 도심에서 서울시내버스 703번(광탄◀고양동▶서울역)이 강물 흐르듯 빈번히
운행하여 접근성은 편하며, 서울역에서 1시간(길면 70분) 정도면 충분히 닿는다.
▲ 용암사를 알리는 표석 |
절 입구에는 용암사를 알리는 표석(標石)과 문화재가 있음을 알리는 갈색바탕의 이정표(전봇대 에 달려있는 이정표)가 있어 용미리 석불을 찾은 중생들의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용암사 가는 길은 푸른 옷을 걸친 숲길이다.나무들이 베푼 산내음이 나의 코끝을 강하게 스치 면서 번잡한 마음과 뇌리가 말끔히 정화된 듯,시원해 짐을 느낀다. |
| 숲길을 100m 정도 오르면 조그만 주차장이나오 며 여기서 다시금 100m를 오르면 용암사경내에 도달한다.
이곳은 다른 절과 달리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구 분 짓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허나 그런문이 꼭 있어야 할 필요는 없겠지. 울창한 숲길로 들 어섬으로써 산문에 발을 내디딘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
▲ 푸르름으로 가득한 용암사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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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미리 석불입상을 지키는 조그마한 산사 ~ 장지산 용암사(長芝山 龍巖寺)
▲ 용암사의 법당인 대웅보전(大雄寶殿) |
용미1리의 동쪽을 이루고 있는 장지산의 서쪽 자락에는 용미리 석불입상을 든든한 후광(後光) 으로 삼은 조그만 산사(山寺), 용암사가 포근히 들어앉아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의 말사(末寺)이다. 창건 시기는 확실치는 않 으나 경내 북쪽에 용미리 석불이 있고, 석불 조성과 관련된 절의 창건 설화―절 이름은 전해오 지 않음―가 전해오고 있어 석불이 만들어진11세기로 여겨진다. 하지만 창건 이후 이렇다 할 사적(事績)을 남기지 못했으며, 1936년 파주 지역 유지들이 돈을 모아 지금의 절을 세우고 승려 혜성(慧城)이 그 불사를 담당하여 절 이름을 용암사라 하였다. * 절과 석불에 얽힌 설화는 용미리 석불 부분 참조 (☞ 창건 설화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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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암사 범종각(梵鍾閣) 부처의 중생구제를 향한 은은한 메세지가 담긴 범종의 보금자리로 1984년에 지어졌다. | ▲ 용암사 요사(寮舍) 1982년에 세워진 건물로 용암사 승려, 신도 들의 생활, 교육 공간이다. |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대웅보전을 비롯하여 범종각, 요사, 삼성각, 미륵전 등 4~5동의 건물이 있으며 지금의 절은 1970년대 이후에 새롭게 지은 것이라 고색(古色)의 분위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절의 규모가 작고 아담하여 아늑하기 그지없으며 불전들도 절의 규모 마냥 적당한 크기를 지니 고 있어 두 눈에 넣고 살피기에 별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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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자리해 있고 그 앞에 하얀 피부의 맨들맨들한 5층석탑이 심어져 있다. 그 주변으로 요사, 범종각이 자리해 있고, 석불로 가는 길목에 삼성각(三聖閣)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1978년에 지어졌다. 석가여래 3존불을 중심 으로 뒤에 석가여래후불탱화가 있으며 주변으로 지장탱화, 감로탱화 등의 불화(佛畵)가 대웅보 전 내부를 휘양찬란하게 치장해 준다.
절의 가람배치는 하나의 금당(=법당, 대웅보전)과 하나의 탑 형식으로 금당과 탑이 용미리 석 불을 닮아서 그런지 한결같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하긴 절이 들어앉은 지형을 보니 남향으 로법당을 세우기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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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미리 석불에서 떨어져 나온 7층석탑과 동자불상 |
용암사 승려의 생활공간인 요사 뒤쪽으로 소박한 모습의 아담한 동자불상(=동자상, 사진 우측 석상)과 날렵한 몸매의 7층석탑(사진 좌측 탑)이 자리해있다. 그 사이로는 조그만 불상이 마 치 석탑과 동자상의 새끼마냥 앉아있어 단란한 가족처럼 보인다. 이들은 원래 용미리 석불과 한 몸으로 지내던 것들로 1990년대 이전 석불 사진을 보면 동자불 상은 석불의 오른쪽(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기준) 어깨 위쪽에 솟아 있고, 7층석탑은 그 오른 쪽아래에 있었는데,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시주로 달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1987년 석불에서 떼어내 지금의 자리로 옮겨놓았는데, 그 이유는 미관상 그리 어울리 지도 않고 국가 문화유산이자 용암사의 소중한 밥줄인 석불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기 위한 것으 로여겨진다.하긴 동자상 때문에 2체불이 아닌 3체불(體佛)로 오인을 받는 경우가 많긴 했다. 7층석탑은 군살이 없는 날씬한 모습으로 백제 칠지도(七支刀)를 연상케 만드며 동자상은 어린 동자를 보듯 표정이 포근하다. 그래도 50년 이상 묵은 것들이라 몸통에는 반백년 세월의 때가 가득하다. 용미리 석불과 한 몸에 있던 시절을 그리워 하듯 서쪽을 바라보는 그들 우측으로 공양용으로 쓰이는 샘터가 있으나 굳게 입을 봉해 있으며, 석탑 좌측으로 종이 등의 쓰레기를 처리하는 조 그만 소각장이 있다.
절에서 북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가볍게 1분 가량 오르면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한주인공, 한 바위에 머리 둘, 몸통 둘이 달린 거대한 불상 용미리 석불을 만나게 된다.
※ 용미리 석불입상(용암사) 찾아가기 <2008년 10월 기준> * 서울역, 광화문, 구파발에서 서울시내버스 703번이 용암사 아래까지 다닌다. * 703번 버스와 환승이 가능한 전철역 - 광화문역(5호선 6번출구), 시청역(1,2호선 8번출구), 서울역(1,4호선 3번출구), 서대문(5호선 6번출구), 독립문(3호선 2번 출구), 녹번역(3호선 1 번출구), 불광역(3,6호선 1번출구), 연신내(3,6호선 3번출구), 구파발(3호선 2번출구) * 승용차 ① 서울시내 → 구파발3거리에서 파주방면 → 대자동에서 의정부방면 39번국도 → 고양동에서 벽제묘지, 광탄방면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미리 → 용암사 ② 수도권외곽고속도로 → 통일로나들목을 나와 파주방면 → 대자동에서 의정부방면 39번국도 → 고양동에서 벽제묘지, 광탄방면 좌회전 → 벽제3거리에서 광탄방면 좌회전 → 용암사
★ 용미리 석불입상(용암사) 관람정보 * 용암사 아래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음 * 주변에 가게나 먹을 곳은 없음 * 주변 명소(반경 3km이내) - 윤관장군묘, 심지원선생묘, 공순영릉(파주삼릉), 공릉저수지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산 11 (용암사 ☎ 031-942-0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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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막히게 거대한 고려시대 석불, 독특한 개성과 멋이 넘쳐흐르는 ~ 용미리 석불입상 (보물 93호)
▲ 용미리 석불은 받들며 두려워해야 될 대상이 아닌 곡차 한잔 같이 걸치고 싶은 친근한 인상의 불상이다. |
용암사 북쪽 산자락에는 고려 전기에 조성된 거대한 불상, 용미리 석불이 커다란 바위를 몸통 삼아 자리해 있다. 무덤에 묻힌 망자(亡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일까? 용미리 시립묘지를 바라보고 있는이 석불은 오랫동안 미륵불, 쌍미륵불 등으로 통해왔으며, 광탄면에 있다고 해서 '광탄석불'로도 불린다. 11세기 후반, 선종의 3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의 시주로 조성된 것으로 전하며, 석불의 위용은 한때 잘나가던 궁주 모자(母子)의 위세를 보여주는 듯 하다.
바위에 전신상(全身像)을 새기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와갓, 목 부분의 불두(佛頭)를 만들 어 얹힌 형태로 머리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바위에선각(線刻)으로 처리되어 마애불(磨崖佛) 로 봐도 상관은 없다. (몇몇 자료에는 마애불로 나옴) 이런 형태의 마애불로 안동 제비원 석불이 그 대표격인데, 그 불상 역시 자연바위에 몸을새기 고 그 위에 다른 돌로 머리를 얹혔다. 본 석불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가 2개, 즉 우리나라 유일의 쌍두불(雙頭佛)이라는 것이다. 그 렇다고 몸 하나의 머리가 둘 달린 괴물은 아니다. 비록 하나의 바위에 의지해 있지만 바위 사 이로 마치 둘을 가르듯 틈이 나 있으므로 엄연히 몸통 둘의 머리 둘이라고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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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불 앞 노천 기도처 중생들의 소망이 한가득 담겨진 연분홍 연등의 행렬이 아무도 없는 기도처 주변을 감싸 흐른다. |
높이는 19.85m, 반올림하면 근 20m에 이르는 장대한 불상으로 바위에 그대로 만든 탓에신체비 례가 다소 맞지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것이 고려시대 석불이 지닌 특징이자 개성이니 이에대 해뭐라 왈가왈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려 때 만들어진 불상은 다른 시대와 달리 덩치가 유난히 크며 얼굴과 외모가 수려한불상보 다는 생김새가 정말 가지각색인 개성파 불상들이 많다. 용미리 석불 역시 그 시대의 유행에 충 실하여 불상이라기 보다는세속적인 특징이 배어있는 석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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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서 바라본 용미리 석불 900년의 세월을 견뎌 내면서도 그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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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사이에 틈을 경계로 왼쪽의 불상은 선비마냥 둥근 갓을 쓴 원립불(圓笠佛)이다. 보통 불 상은 화려한 보관(寶冠)을 쓰는데 그런 화려함 대신 많은 사람들이 쓰고 다니는 갓을 씌워 놓 아 무척 친근하게 보인다. 은연히 미소가 깃들여진 그의 얼굴은 거의 네모난 모습으로 논산에 있는 관촉사(灌燭寺)은진미륵(恩津彌勒)과 비슷한 생김새이다. 불상의 얼굴이라기보다는 그 만의 특유하고 재미난 색채가 강하게 배어있다. 목은 원통형이고 두 손은 가슴 앞에 대고 연꽃을 살짝 들고 있으며, 몸통이 들어앉은 바위에 는 옷을 입혀놓았는데, 옷의 주름을 선각으로 세심히 처리했다. 오른쪽 불상은 동그란 갓대신 네모난 갓, 즉 방립불(方笠佛)을 머리에 걸쳤으며 눈썹과 눈이 길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아 합장인(合掌印)을 선보이고 있으며, 왼쪽 불상보다 키는 약간 크지만 덩치는 좀 작다. 하지만 듬직한 몸집에 넓은 어깨를 가지고 있어 석불은 더욱 커져만 보인다. 이 지역 구전에 따르면,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男像), 네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女像)이라고 하는데 듣고보니 정말 그럴듯한 모습이다. 금슬이 가득한 부부처럼 다정히 자리하며 중생들에게 군림하려는 근엄한 모습이 아닌 자식을 대하듯, 그들의 아프고 힘든 것을 어루만져 주고 보살펴주는 어진 부모님 같은 미륵불이다.
이들의 작품성은 별로 우수한 편(안내문에 그리 나옴)은 못되지만 고려 왕족의 탄생설화가 담 겨져 있고 지방색이 담긴 고려 불상의 특징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중생들의 소망을 들어 주기로소문이 자자하여찾는 이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
※ 용미리 석불입상에 얽힌 설화 고려 13대 군주인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적당한 후사가 없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그의 3번째 부인인 원신궁주<元信宮主, 인주이씨 평장사 이정(李頲)의 딸>의 꿈에 도 승 2명이 나타나 '우리는 파주 장지산에 있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배가고프니 이곳에 있는 두 바위에 불상을 새겨주세요' 이상하게 생각한 궁주는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니, 그럴싸한 큰 바위가 하나 발견되어 바로 불 상 조성에 들어갔다. 얼마 뒤, 그 도승이 다시금 꿈 속에 나타나 '왼쪽 바위에 미륵불을, 오른쪽 바위에미륵보살상 을 만들어 공양하고 기도를 드리면 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아들을 얻고, 병이 있는사람은 완쾌 될 것입니다' 도승의 부탁대로 두 불상을 새기고 그 아래에 용암사의 전신인 절(이름은 전해오지 않음)을 세 워 기도를 드리니 몇 달 뒤, 그렇게나 소망하던 아들 한산후 왕윤(漢山侯 王昀)을 얻었다.
허나 선종은 위의 설화와 달리 아들 왕욱<王昱, 2째 부인 사숙왕후(思肅王后) 소생의 아들로, 후에14대 헌종>이 있었다. 그러나 태자(太子) 왕욱은 심히 병약하여 늘 병을 달고 살았으며 소갈증(消渴症, 당뇨병)까지 앓고 있던 상황이라 만약을 위해 건강한 아들을 하나 더 얻고 싶었던 모양이다. 제왕의 부인치고 자기 아들이 제왕이 되기 싫어하는 여인이 어디 있으랴? 궁주는 한산후외에 이름이 전해오지 않는 아들 2명을 더 출산하여 더욱 승승장구하게 된다.
선종이 붕어하고 헌종이 제위에 오르자(1094년) 자신의 친오라비인 '이자의'와한산후를왕위 에 세우려고 모반을 꾀하다가 선종의 아우 계림공 왕희(鷄林公 王熙, 뒤에 숙종)에게 보기좋 게 선수를 당한다. 결국 원신궁주 모자는 그 대가로 머나먼 곳으로 추방되고, 그들의 행적과 사망 시기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허무하게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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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쪽만 멀뚱멀뚱 바라보는 용미리 석불의 뒷통수 저들이 바라보는 곳은 용미리시립묘지 1구역이다. |
석불과는 이미 2번의 안면이 있다. 2002년 이후 5년 만에 찾았음에도 그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그에 반해 나는 5년의 세월이 누적되어 인정하긴 죽어라 싫지만 그만큼 늙고 변 해 있었다. 향을 피워 그에게 삼배(三拜)의 예를 올리며 마음 속으로 간절히 무언가를 소망한 다. 평소에는 찾아와 안부도 전하지 않으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만 불쑥 찾아와 '이러이러하니제발 좀 살펴주소' 소망을 비는 것도 조금은 염치가 없는 것 같다. 정작 저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 나는 과연 그들을 살펴줄 수 있을까? 나뿐만은 아니지만 소원만 빌러 오는 사람들이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예불을 올리고 석불의 뒷쪽 부분으로 올라갔다. 석불의 머리부분까지는 산길이나 있는데, 그들 의 높이가 20m에 이르러 거의 조그만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경사가 다소 있는 산길을 올라 문화재 보호 철책을 넘어 석불의 뒷통수로 살짝 숨어든다.마치 앞쪽만 죽어라 쳐다보는 사람의 뒤쪽으로 살며시 다가가 팍 기습을 하려는 듯이 말이다. 석불의 뒷부분은 밋밋하고 간소하게 표현된 뒷머리와 목덜미가 전부이다. 그런 머리 위로는 머 리 크기만한 갓이 씌워져 있는데, 갓보다는 탑이나 석등의 윗부분을 보는 것 같다.
천하에 어느 누구도 당해낼수 없는 무구한 세월의 시련, 그것을 100년도 아닌 900년이나 견뎌 내면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을 간직한 석불을 친견하면서나도 그처럼 영원히 한결같 은 인생을 살았으면 싶다.
~~~ 이렇게 하여 한가을의 용미리 석불 답사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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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출사 일시 - 2007년 9월 26일
* 작성 시작일 - 2007년 10월 2일
* 작성 완료일 - 2007년 10월 16일
* 숙성기간 ~ 2007년 10월 17일 ~ 2008년 10월 13일
* 공개일 - 2008년 10월 13일부터
* 최종 업데이트 - 2008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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