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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누님을 만나다 ~ 장수 의암사(논개사당)

도봉산 고양이 2008. 11. 14. 12:09


♠ 논개 누님을 만나다 ~ 장수 의암사
(義巖祠)

논개 영정
▲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려 바친 의암 논개의 영정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꽃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수주 변영로(樹洲 卞榮魯)



▲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지는 논개


때는 1593년 7월 7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로 명성이 높은 진주 촉석루(矗石樓)에서 왜장(倭
將)들의 진주성 점령기념 승전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강제 징발된 기생들을 하나씩 옆구리에 끼며 부어라 마셔라, 춤추자~ 흥이 오른 왜장들 중에는 진
주성 공격의 주장(主將)인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도 있었다.
술잔을 들이키며 취기를 즐기는 게야무라는 문득 강가를 바라본 순간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말았
다. 강가에는 왠 이름모를 아리따운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
게 단단히 눈이 도망간 게야무라는 술취한 몸뚱이를 간신히 겨누며 강가로 내려갔다. 논개는 계속
웃음을 띄워 보내며 그를 유혹하고, 게야무라는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비틀비틀 그녀에게
다가선다.

논개는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그를 안으려고 하고, 그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이게 왠 떡이냐 싶어
군침을 삼키며 그녀에게 안기려 든다.
떡 안긴 순간, 논개는 그를 힘껏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왜장의 목
숨을 선물로 진주성 싸움에서 숨져간 군사와 백성, 그리고 남편 최경회의 곁으로 떠났던 것이다.

이상이 코 흘리게 어린애도 줄줄 외고 있다는 논개의 순절 부분이다.
논개는 임진왜란이 낳은 수많은 영웅 중의 하나이다. 비록 칼과 활을 들고 싸우진 않았고, 남자가
아닌 연약한 여인네였지만, 왜군과의 싸움에서 숨져간 이들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
진 논개의 의기와 충절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는다.

이순신(李純臣)과 더불어 삼척동자도 다 아는 대중적인 위인~ 논개, 하지만 논개의 성씨를 비롯하
여 그녀의 생애, 신분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너무 적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진주성에서 몸을
던진 부분만 너무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평양 기생 계월향(桂月香)과 더불어 임진왜란 시절, 조선 여인의 의기를 잘 보여준 논개는 장수지
역 3명의 의인(義人)을 뜻하는 장수 3절(節)의 하나이자, 장수 고을이 낳은 여걸(女傑)로 장수 사
람들의 자랑이다.

장수 고을에는 논개의 흔적이 곳곳에 서려있다. 장계면 대곡리에는 그녀가 태어나고 살았던 생가
가 복원되어 있고, 장수군청 앞에는 그녀가 심었다고 전하는 '의암송'이란 소나무가무럭무럭 자
라고 있다. 또한 읍내 동남쪽에는 그녀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의암사(義巖祠)가 있다.
그중에서 내가 문을 두드린 곳은 의암사로 이미 2003년 1월에 다녀간 바가 있다. 그럼 5년여 만에
다시 찾은 장수 의암사를 둘러봄에 앞서 논개 누님의 생애를 먼저 짚어보도록 하자.


♠ 의암 주논개(朱論介, 1574 ~ 1593)의 생애


♣ 논개의 생애가 밝혀지기까지

충의의 고장 장수가 낳은 인물,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於于堂 柳夢
寅)이 저술한 '어우야담(於于野談)'이다. 하지만 논개의 집안이나 생장과정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18세기 초, 진주 사람들은 논개의 순절을 널리 알리고 기려줄 것을 나라에 건의했다. 이에 조
정에서는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에 논개의 후손을 찾아 포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병영은
영남 일대에 관문(官文)을 띄워 후손을 수소문했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논개는 후손이 없음)
그 후, 논개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국가차원에서 논개에 대한 조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에
이른다.
우선 18세기 중반 권적(權適)의 '경상우병사 증좌찬성 최공시장<慶尙右兵使 贈左贊成 崔公 諡狀
, 여기서 최공은 최경회(崔慶會)>'을 비롯하여,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호남읍지(湖南邑誌)
','동감강목(東鑑綱目)','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매천야록(梅泉野
錄)' 등의 여러 문헌과 장수, 진주 지역에 전해오는 논개 관련 이야기들, 그리고 노공(老公)들
의 증언을 통해 논개에 대한 많은 정보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논개의 탄생
논개는 1574년 9월 3일 밤, 지금의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주달문(朱達文)의 외동
딸로 태어났다. 주달문은 선비로 마을에서 서당을 꾸리고 있었으며 부인은 밀양박씨이다.
논개의 집안은 '신안주씨(新安朱氏)'로 넉넉하진 못했지만 기풍이 서린 양반가의 집안이었다.
일부에서는 논개가 기생 출신으로 알고들 있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논개는 특이하게도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고 한다. 갑
술년은 개의 해인데, 월과 일, 시(時)까지 모두 개를 상징하는 시간에 세상에 나온 것이다.
주달문은 딸의 사주를 살펴보고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며 크게 기뻐했다. 딸에게 어여쁜 이름
을 지어줄 만도 하지만 그는 계집의 이름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논개'란 이름을 지어주었
다. 그 이유는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 개를 낳은(놓은) 것과 같고, 그것을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가 된다. '놓은개'를 빨리 발음하면 '논개'로 발음되니 그 발음 그대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 순탄치 않은 논개의 어린 시절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범했으며 효행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그런데
로 화목을 누리며 살았으나, 5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뜨면서 논개 모녀는 몇년동안 모진
고초를 겪는다.

의지할 곳이 없던 모녀는 같은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朱達武)의 집에 얹혀 살게 되었다.
주달무는 형과 달리 거의 인간말종에 가까운 위인이라 매일 노름에 빠져 가산(家産) 말아먹기에
바뻤다고 한다. 결국 집까지 죄다 날려먹자 숙부는 풍천마을에 사는 김풍헌(金風憲)이란 사람에
게 조카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는 멀리 줄행랑을 쳤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모녀는 외가가 있는 함양 안의(安義)로 급히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고발로 장수 관아로 압송되고 만다.


▲ 장수 관아에서 최경회에게 재판을 받는 논개 모녀


♣ 최경회(崔慶會, 1532 ~ 1593)와의 만남
그 시절 장수현감(長水縣監)은 장차 논개의 지아비가 되는 최경회였다. 자초지종을 알아보니 달
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음이 드러나면서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한다.

최경회의 부인인 나주김씨는 그들이 오갈게 없는 처지임을 알고 내아(內衙)에서 지낼 것을 권했
다. 최경회 내외의 배려로 내아에서 생활하게 된 논개는 낮에는 잔심부름을 하거나, 김씨 부인
을 간호하고, 저녁에는 공부를 하였다.

몇 해가 흘러 논개의 어머니가 별세하고, 최경회의 부인마저 병으로 죽는다. 서로의 소중한 존
재를 잃은 최경회와 논개는 서로를 더욱 의지하며 같이 살게 된다. 두 세대에 버금가는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이를 초월한 그들의 연분은 점점 커져만 가고, 결국 담양부사(潭陽府
使) 재직 중이던 1590년 혼인을 하기에 이른다. 이때 최경회의 나이는 58세, 논개는 겨우 17세
였다. (아우 부러워라 ~~
)

1591년(혹은 1590년 후반) 모친상을 당한 최경회는 3년상(喪)을 위해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능주(綾州, 화순군 능주면)로 가면서 논개를 장수로 보냈다.

♣ 임진왜란 발생과 최경회의 죽음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최경회는 다시 장수를 찾았다. 그는 월강리 들판에 의병청(義兵聽)
을 세우고 의병을 모아 매일 훈련에 임했다. 논개는 동네 아낙들과 함께 의병들의 식사와 병영
청소, 빨래 등을 도맡아 하며 최경회를 도왔다.

그의 의병은 무주 우지치에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을 격퇴시킨 것을 시작으로 산청, 김천,
성주 지역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다.
1593년 4월 조정에서는 그의 공에 대한 답례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를 재
수하였다.
최경회는 논개를 데리고 부임지인 진주로 떠났는데, 진주로 온지 채 1달도 되지 않은 1593년 6
월 19일, 왜군의 13만 대군이 진주성을 공격했다.
전쟁이 한참일 때 최경회는 성 밖으로 나가 후일을 기약하라고 하였다. 그의 권유에 논개는 밖
으로 빠져나가 외진 곳에 숨어 있으면서 전황을 살폈다.

1592년 진주성 대첩과 달리 이번에는 왜군에게 승리의 여신이 돌아가면서 성은 끝내 함락되고
만다. 6만의 관,군,민은 거진 전사하고, 최경회는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남강에 뛰어들어 장렬
한 최후를 마친다.

♣도도히 흐르는 남강 위에 한송이 꽃이 되어 떨어지다.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죽었다는 소식에 논개는 비통에 사로 잠겨 어찌할 바를 몰랐다.
힘겹게 진주성에 입성한 왜군은 1년 전, 김시민(金時敏)에게 당한 개망신을 만회한 기쁨을 누리
고자 7월 7일 기생들을 죄다 불러놓고 촉석루(矗石樓)에서 승전연을 열기로 하였다.


▲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논개는 이 때가 기회다 싶어 진주 수안기생(首安妓生)
에게 기생들의 명단이 적힌 기적(妓籍)에 자신의 이름
을 넣어줄 것을 부탁하고 오로지 칠석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이 밝았다. 진주 기생의 협조를 얻어 촉석
루로 들어선 논개는 누각으로 오르지 않고, 강가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몇몇 자료에는 누각에 들어가 왜장
과 잠시 어울려 놀았다고도 함)
승리의 기쁨에 취한 왜장은 기생들의 미모와 곡차에
다시금 취하면서, 연회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만
간다.
그런 왜장 중에는 진주성 공격의 선봉이었던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란 체격이 좋은 장수가 있었다.
그는 문득 강가를 바라보니 왠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
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여인에게 단단히 눈이 도망간 게야무라는 저도 모르게 강가로 내려갔다. (진주 기생들이 논
개를 돕기 위해 내려가 보라며 부추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논개는 그를 계속 유혹하고, 그녀를 덥썩 안으려는 순간, 그의 허리를 단단히 껴앉고 남강에 몸
을 던져 최경회에게 줄 선물을 가지고 뒤따르니, 그녀의 나이 불과 19살이었다.


▲ 의암사 기념관에 마련된 촉석루 배경의 기념촬영코너

♣ 그 이후
논개에게 얼떨결에 폐기처분된 게야무라의 고깃덩어리는 낙동강 하류에서 발견되어 왜국으로 수
습해 갔다고 한다. 논개의 시신 역시 부근에서 발견되어 장수 근처인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에
유택을 만들어 모셨으나, 관리소홀로 그만 무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근 300년 이상 무덤의 위치를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으며 '의암사적보존회'와 향토사학자
들의 노력으로 1976년 간신히 무덤을 찾기에 이른다.

후세 사람들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바위를 '의암'이라 하였으며, '의암'은 점차 논개
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세상 사람들이 그녀에게 바친 일종의 시호(諡號)라
고나 할까..?

♠ 논개의 혼과 정신을 모신 사당, 장수 의암사(義巖祠, 논개사당)
- 전북 지방기념물 46호


의암사는 장수 고을의 자랑이자, 장수3절의 하나로 추앙받는 논개의 사당으로 장수읍의 동남쪽,
남산 자락에 자리해 있다.
의암사는 몇백년 된 오래된 사당은 아니다. 불과 50년 정도 된 곳으로, 1956년 장수 지역 유지
들이 돈을 모아 세운 것이다. 이때 부통령을 지냈던
함태영(咸台永)이 친필 휘호를 보냈으며,
친일 화가인 김은호가 자신의 마누라를 모델로 삼아 논개의 영정을 그려 바쳤다.
1960년대 후반, 본격적으로 의암사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2만여 평에 대지
를 마련하여 사당을 옮겼다.

경내에는 논개생향비를 비롯하여 기념관, 의암사 등이 있으며, 사당 앞에는 '의암공원'과 '두산
제'란 호수를 만들어 군민과 관광객의 휴식처로 꾸몄다.
의암사는 장수를 찾은 관광객들이 거의 꼭 들르는 장수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이자, 장수 사람들
의 자부심이 깃든 곳으로 그들의 의암사에 대한 애정은 실로 지대하다.

※의암사 찾아가기 (2008년 11월 기준)
* 서울남부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4회 운행
* 대전동부터미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8회 운행
* 광주터미널과 남원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9회 운행
* 전주에서 장수행 직행버스 1일 17회 운행
* 장수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의암사까지 걸어서 12분 거리
* 승용차로 갈 경우 (의암사 앞에 주차장이 있음)
- 대전~통영고속도로 → 익산~장수고속도로 → 장수나들목에서 장수방면 19번 국도 → 계남 →
장수읍내 → 장수교 → 의암사입구에서 좌회전 → 의암사
- 88올림픽고속도로 → 남장수나들목 → 장수 방면 19번 국도 → 장수읍내 못미쳐 의암사입구
에서 우회전 → 의암사


♣ 의암사 관람 정보(2008년 11월 기준)
* 입장료와 주차료는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9시 ~ 18시
* 매년 음력 9월 3일, 의암공원을 중심으로 장수군의 축제인 '의암 주논개 대축제'가 열린다.
축제기간은 2~3일 정도로 첫날에 의암사에서 대제(大祭)를 지낸다.
(축제 문의는 장수군청 산림문화관광과 063-350-2535)
* 소재지 - 전북 장수군 장수읍 두산리 산3 (의암사 관리사무소 ☎ 063-350-2561, 351-4837)


♠ 의암사를 들어서며


▲ 의암사의 외삼문(外三門)인 숭앙문(崇仰門)


두산제와 장수읍내를 바라보고 있는 의암사에서 제일 먼저 바깥 3문인 숭앙문이 나온다. 가운데
문은 굳게 닫힌 채, 양쪽 문만 열려있는 숭앙문을 들어서면 논개의 혼이 깃든 의암사 경내가 펼
쳐진다. 가운데 문을 닫아놓는 것은 사당의 주인인 논개의 혼령만이 드나드는 문이기 때문이다.


▲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

숭앙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논개생향비가, 우측으로 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이 비석은 1846년 장수현감
정주석()이 장수가 논개의 고향임을 기리고자 세운 것이다.
그 후 어찌된 영문인지 땅 속에 파묻혀 있다가, 사당을 세울 때 발견되어 경내에 안착시켰다.
확실치는 않지만 왜정 시절에 왜인들이 땅에 파묻은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 의암사 기념관


▲ 논개와 최경회 관련 유물과 디오라마를 갖춘 기념관

논개생향비를 마주하고 있는 팔작지붕의 기념관에는 논개 관련 유물과 서적, 생애를 다룬 디오
라마를 비롯하여, 최경회의 유물과 관련 서적, 장수 지역 동산문화재 등이 전시되어 있다.

▲ 장수 지역 사람들이 사용한 백자 등의
도기(陶器)들

▲ 그릇과 신발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 병자호란 때
활약했던 호남 지역 사람들의 행적을 적은
기록물로 1799년에 간행되었다.

▲ 여인들이 사용한 비녀와 노리개 등의
여러 장신구들

◀ 최경회가 무주 우지치 전투에서 왜장을
죽이고 얻은 언월도(偃月刀)


♠ 의암사 경내

▲ 내삼문(內三門)인 휘광문(揮光門)

▲ 의암문(義巖門)


▲ 논개의 영정을 모신 의암사 본관


외삼문에서 의암사 본관까지는 무려 3개의 문을 거쳐야 된다. 휘광문이란 내삼문을 들어서면
길게 펼쳐진 계단길이 있는데, 그 끝에 자리한 문턱을 지나야 비로소 본관이 나온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논개의 영정이 소중히 모셔져 있으며, 건물 좌측 칸에 마
련된 참배록에는 이 곳을 찾은 이들의 이름 석자가 빼곡히 적혀 있어, 논개에 대한 대중의 인
기를 보여준다. 나도 참배록에 이름을 남겼다. 논개 누님의 눈에 띄고 싶어 한자로 요란하게
쓰긴 했는데 과연 보셨을진 모르겠다.


▲ 의암사에 모셔진 논개누님의 영정(影幀)


이 곳 논개의 영정과 남원 광한루(廣寒樓)에 있는 춘향(春香)의 영정, 그리고 밀양 아랑각(阿
娘閣)의 아랑 영정을 가만히 살펴보면 분명 다른 시대에 살다간 여인들인데도 마치 세 쌍둥이
마냥 거의 비슷함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가 그린 영정인데, 그
들의 모습을 실제로 본 사람도 이 세상에 없을 뿐더러, 그들의 외모에 대해서도 그저 아리땁다
는 기록만 있을 뿐이니 그리기가 꽤 막막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그의 마누라를 모델
로 삼아 그렸다는 것이다.

김은호(1892~1979)는 대한제국 마지막 어진화가(御眞畵家)로 1924년 왜열도 동경으로 넘어가
우에노(上野)미술학교에서 미술을 배웠다. 1937년부터는 철저한 친일파로 변신하여 1945년까지
그에 걸맞는 행동을 일삼아 문제가 다소 많은 인물이다.
해방 이후 죽을 때까지 우리나라 현대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부탁으로
이순신, 권율을 비롯한 여러 위인들의 영정을 그렸다. 하지만 친일파 출신이 임진왜란 때 나라
를 지킨 이들의 영정을 그렸다는 것이 영 찝찝하다. 논개의 영정을 보면 기품과 절의(節義)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아리따운 여인 하나가 덩그러니 그려져 있을 뿐이다. 논개의 외모가 아리
따운 것은 사실이겠으나, 너무 미(美)적에만 신경을 써서 그린 듯 하다.

논개도 친일파가 자신을 그렸다는 것에 대해 지하에서 매우 속상해 하고 있을 것이다. 하루 빨
리 영정을 교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왜로부터 나라를 지킨 이들을 어째서 왜에 빌붙어 자신
의 영달을 꾀한 이가 그려야 되는가. 이건 완전 말이 되지 않는다. 친일파와 불의의 작자들이
잘처먹고 잘사는 이 나라의 안타까운 현실을 논개의 영정이 여실히 보여주는 듯 하여 마음 한
켠이 씁쓸할 따름이다.


♠ 의암사 앞에 펼쳐진 휴식공간 ~ 의암공원과 남산공원


의암사 앞에는 '두산제'란 넓다란 호수를 품에 안은 의암공원과 남산공원이 자리해 있다. 군
민과 의암사를 찾은 관광객의 휴식공간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이들 공원은 의암사 성역화 사업
으로 조성되었다.


▲ 누런 갈대가 심어진 두산제 호수


▲ 두산제 호수와 마봉산

한 폭의 그림처럼 베풀어진 두산제, 의암사 뒤에 자리한 마봉산 등의 산과 호수 주변 나무들이
잔잔한 호수를 거울 삼아 그들의 매무새를 다듬으며 그렇게 봄을 기다린다.


▲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남산공원에 어느 정자
푸른 하늘에 떠 있는 부메랑 모양의 구름이 이채롭다.


▲ 저녁으로 먹은 전주 콩나물국밥


장수에서 논개 누님을 만나 뵙고, 진안(鎭安)을 거쳐 전라북도의 수부(首府)인 전주(全州)로
나왔다. 전주를 찾은 것은 저녁으로 콩나물국밥을 먹기 위함으로 전주에 올 때마다 꼭 국밥을
먹는다. 전주는 음식의 고장이라 전주비빔밥과 한정식, 오모가리탕, 콩나물국밥이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저렴하게 그리고 많이 먹을 수 있는 건 바로 콩나물국밥이다.

단돈 4,000원(2008년 2월 기준)에 콩나물과 해산물, 밥이 듬뿍 말아져 있는 국밥을 비롯하여
호남의 인심이 돋보이는 맛깔스런 반찬들(장조림, 김, 깍두기, 젓갈, 계란) 거기에 밥 1공기
가 따로 더 나온다. 솔직히 국밥 1그릇으로도 배가 차는데 정말 뱃가죽 두둑히 채우기에는 안
성맞춤이며 목구멍과 혀가 즐거워 비명을 지를 정도이다.

이렇게 하여 본 글은 대단원의 막을 고하며 끝으로 논개를 너무 미화했다는 식의 헛소리는 정
중히 사절한다. ~~~


* 답사, 촬영 일시 - 2008년 2월 21일
* 상편 작성 시작일 - 2008년 3월 8일
* 상편 작성 완료일 - 2008년 3월 12일
* 숙성기간 ~ 2008년 3월 12일 ~ 2008년 11월 12일
* 공개일 - 2008년 11월 12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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