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권 사진,답사기/서울 도심(북촌, 서촌 등)

서울 도심 산책 (선희궁~청와대앞길~경복궁신무문~인사동)

도봉산 고양이 2009. 4. 6. 09:35

' 서울 도심 산책 (선희궁 ~ 청와대 앞길/분수대 ~ 경복궁 신무문 ~ 인사동) '


서울의 영원한 우백호(右白虎) 인왕산(仁王山) 동쪽 자락에 안긴 신교동은 청운동(淸雲洞)에 속한

동네이다. 신교동 한복판에는 국립서울농학교(예전 선희학교)가 자리해 있는데, 그 서쪽 교정에는
고색이 약간 깃들여진 기와집이 놓여져 있다.바로 선희궁의 옛 사우(祠宇)이다.


▲ 선희궁(宣禧宮)터 사우 - 서울 지방유형문화재 32호

선희궁은 영조(재위 1724~1776년)의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신주(神主)를 모신 왕실의 사묘
(私廟)이다. 여기서 사묘(= 사친묘(私親廟)란 왕후의 반열에 들지 못하거나 추존되지 못한 제왕의
어미나 친조모를 위해 지은 사당을 일컫는다.

영빈이씨는 창경궁 선인문(宣人門)에서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로 1764년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죽인 자책감에 늘 괴로워하던 영조는 그녀에게 의열(義烈)이란 시
호를 내리고, 사당의 이름을 의열묘(義烈廟)라 하였으며,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는 선희궁
으로 이름을 갈았다.

1870년(고종 7년) 신주를 청와대 옆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겼다가 1896년(고종 건양 원년) 원위치
시켰다. 1908년(순종 융희 1년)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묘(祠廟)을 대거 정리하면서 다시 육상궁으
로 옮겨지고 기존의 선희궁은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되었다. 그 터에는 1931년 제생원(濟生院
) 소속 맹아부(盲兒部)가 새롭게 둥지를 트면서 지금의 서울농학교와 맹학교를 이루게 되었다.

신교동4거리에서 선희궁길을 따라 농학교로 다가서면 길 오른쪽으로 세월의 무게에 단단히 억눌린
듯, 콘크리트 밑에 깔린 길다란 석축(石築)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바로 선희궁을 받치던 빛바랜
초석들로 지금은 그 위로 농학교 운동장을 깔았다.


▲ 칼로 싹둑 다듬은 듯 정연해 보이는 선희궁터 초석
햇빛도 잘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같은 곳에서 숨이나 제대로 쉬고 사는지 모르겠다.
문화유산 보호를 위해서라도 콘크리트를 좀 걷어내면 안될까?

▲ 왕실 사당으로써의 위엄과 기품을 그대로 간직한 선희궁터 사우

▲ 벽돌로 3면을 두룬 선희궁 사우의 뒷모습

▲ 사우 좌측 화단에는 옛 주춧돌 몇 기와 학교에서 쓰는 듯한 장독대가
나란히 놓여져 있다. 장독대 안에는 무엇인가가 한참 숙성의 과정을 밟고 있을 것이다.

농학교 서쪽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선희궁 사우는 툇마루를 갖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정면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로 둘렀으며 건물 안은 텅 비었다. 세월의 때가 아낌없이 깃들
여진 주춧돌 위로 가지런히 들어앉아 나름대로의 위엄과 기품을 드러내 보이지만, 한참 후배인 학
교 건물 속에 파묻혀 오히려 초라하게 다가온다.

교정에는 옛 선희궁의 식구였던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다. 하나는 사우 부근에,다른 하나는
학교 정문 쪽에 있는데 정문에 있는 느티나무는 나이가 225년에 이른다고 한다.225년이면 선희궁
을 세우고 대략 20여 년 뒤에 심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높이는 16m, 둘레는 4.3m에 달한다.
사람들의 보살핌과 세월의 양분이 듬뿍 더해져 나날이 커져가는 느티나무는 올해도 변함없이 겨울
의 제국을 영접했다.앙상한 가지를 하늘높이 치켜들며 봄을 염원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김없이 저
물어가는 한 해의 아쉬움과 원망이 가득 더해진다.


▲ 수령 225년의 느티나무 - 서울시 보호수 1-27호
학교 아이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주고 삭막한 세상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삶의 희망을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소중한 정자나무이자 고마운 스승이다.

※ 선희궁터 찾아가기 (2009년 4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3번 출구)에서 0212, 1020, 1711, 7016, 7018, 7022번 버스를 타고 효자동 하차
버스에서 내리면 바로 청운동주민센터가 있는 신교동로터리이다. 거기서 왼쪽으로 길을 건너면
서울농학교는 이정표가 나오며, 선희궁 사우까지는 걸어서 3분, 출입과 관람에 제한은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종로구신교동 산1-1 서울농학교 내


선희궁터를 둘러보고 신교동로터리로 나와 전,의경들이 삼엄히 지켜선 동쪽 길로 들어서면 청와대
분수대 광장이 나온다. 동그랗게 펼쳐진 푸른 잔디밭에 솟아난 분수대는 가운데에 제왕을 상징하
는 고운 맵시의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펴 기지개를 켜고 있고, 그 주변으로 4개의 석상이 적절히 배
치되어 높은 기품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그들 뒤로는 서울의 변함없는 북현무(北玄武) 북악산(北
岳山)이 우리나라 정치, 행정의 1번지 청와대(靑瓦臺)를 포근히 감싼다.

이곳은 1992년까지만 해도 백성들은 감히 발도 들여놓지 못했던 금표(禁標) 구역으로 문민정부(文
民政府)를 자처하던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앞길과 분수대가 개방되어 지금은 육상궁 주변까지 접
근이 가능하다. 또한 휴일에 한해 개방된 것을 평일까지 확대했으며, 2008년에는 시청과 청와대를
순환하는 8000번 시내버스가 신설되어 버스를 타고 편히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분수대 광장 북서쪽에는 무궁화동산이란 공원이 넓게 자리를 닦았다. 이곳은 그 유명한 1979년 10
. 26사건(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정동(宮井洞) 안가(安家) 자리이다.
궁정동은 말그대로 궁궐 우물이 있던 동네이다. 고위 권력층의 비밀 놀이터이던 그 안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 녹아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시민을 위한 푸른 공원이 싹을 틔워 세월과 권력의 무상함
을 말해준다. 지금의 권력집단이 그것을 좀 깨달았으면 좋으련만 역시나 쇠귀에 경 읽기인 모양이
다.


▲ 청와대 분수대 ~ 그 너머 왼쪽에 세모 모양으로 솟은 산이 북악산이다.

▲ 분수대광장 소나무 숲에 자리한 큰 북의 보금자리 ~ 대고각(大鼓閣)
백성의 소리를 듣는다는 신문고(申聞鼓)의 부활일까? 이 시대에 필요한 건 무늬뿐인
신문고가 아니다. 아무리 북을 두들겨 패며 민의를 밝혀도 그걸 제대로 들어줄 위정자가
없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귀울이고 그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의 가려운 데를
속시원히 긁어주는 그런 나라는 정녕 될 수 없는 것일까?

현대사의 쓰라린 아픔의 현장을 무궁화로 보듬은 무궁화공원 동쪽 길 건너로 높다란 담이 길게 늘
어서 있다. 담 너머로 선희궁 사우와 닮은 기와집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이곳은 선희궁과
성격이 같은 왕실의 사묘(私廟)인 육상궁(毓祥宮)이다.

사적 149호인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이자 숙종(肅宗)의 후궁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사당이다. 영
조는 재위에 오른 바로 이듬해(1725년)생모의 사당을 지어 숙빈묘(淑嬪墓)라 하였으며 1744년 육
상묘로 이름을 고쳤다. 육상궁은 다른 말로 칠궁(七宮)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1908년 시내에 흩어
져 있던 5개의 사묘(私廟)를 이곳으로 옮기고 1929년 덕안궁까지 옮겨오면서 7궁을 이루었기 때문
이다.

칠궁을 이루는 사묘는 육상궁 외에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靖嬪李氏)의 사당인 연호궁(延祜宮)과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저경궁(儲慶宮), 숙종의 후궁인 희빈장씨(禧嬪張氏)의 대빈
궁(大嬪宮),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경우궁(景祐宮), 고종의 후궁이자 덕혜옹주(德
惠翁主)의 생모인 후궁 엄씨의 덕안궁(德安宮), 그리고 앞에서 언급했던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선희궁이다. 이들은 고종의 후궁 엄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왕의 생모 또는 친조모이다. <영조의
후궁인 정빈이씨는 효장세자(孝章世子, 나중에 진종(眞宗)으로 추존됨)의 생모로 정조가 효장세자
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사묘가 만들어짐>


자신을 낳고 길러준 생모와 친조모에 대한 제왕의 깊은 효성이 잘 드러난 이곳은 종묘(宗廟)와 더
불어 조선 왕실의 묘사(廟祠)제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경내에는 사우와 행랑채, 재실(齋室), 조촐
하게 꾸며진 뜰을 갖추었다.

현재 육상궁은 청와대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청와대 관람을 신청
한 사람에 한해 사당 관람이 가능하다.

※ 육상궁, 청와대분수대, 청와대 앞길(신무문) 찾아가기
(2009년 4월 기준)
* 3호선 경복궁역 4번 출구로 나와서 바로 뒤돌아서면 경복궁 돌담길(효자로)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12분 가량 걸으면 청와대분수대 광장이 나온다. 여기서 정면으로 길을 건너면 바로 무궁화
공원이며, 공원 동쪽에 육상궁 담장이 있다.
* 경복궁역 3번 출구에서 0212, 1020, 1711, 7016, 7018, 7022번 버스를 타고 효자동 하차, 바로
보이는 신교동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걸으면 청와대분수대 광장이다.
* 1,2호선 시청역(7번 출구), 5호선 광화문역(2번 출구)에서 8000번 버스를 타고 청와대분수대 하
차, 청와대 춘추관에서도 승하차 가능, 운행시간은 5시 30분 ~ 20시까지 10분 간격
* 청와대 앞길(신무문)은 5시 30분부터 20시까지만 통행이 허용된다. (그 외에 시간은 접근불가)
* 청와대와 육상궁 관람신청은 ☞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한다.
* 육상궁 소재지 - 서울특별시종로구궁정동 1-1 청와대 내


▲ 굳게 닫힌 육상궁 정문 ~ 정문 앞은 출입통제 구역이다.

▲ 높다란 담 너머로 야속하게 지붕만 드러내 보인 육상궁 - 사적 149호
담장 쪽으로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으니 무리하여 다가서지 말 것.
다만 사진에 담는 것은 허용된다.

▲ 녹음이 깃들여진 청와대 앞길
그저 평범한 산책로 같은 저 길이 우리 곁에 돌아오기까지는 무려 40년 이상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지금은 늦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거닐 수 있는 시민들의
소중한 산책코스로 굳게 자리매김하였다.

▲ 담쟁이덩굴로 몸을 걸친 경복궁의 북문, 신무문(神武門)
궁궐 성문으로써의 위엄은 전혀 녹슬지 않았다.

▲ 신무문 좌측에 자리한 경북궁 암문(暗門)

청와대분수대에서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삼청동(三淸洞)으로 이어진 청와대 앞길은 그야말로 엄숙
과 통제의 공간이다. 비록 자유롭게 거닐 수 있다고 해도 국가의 예민(?)한 곳인만큼 통제도 여전
하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이자 제왕이 살던 경복궁, 그리고 현 정부의 중심
이자 국가원수가 사는 청와대가 서로 마주하는 청와대 앞길은 양 시대를 긋는 경계선인 듯 하다.
그 역사적인 길을 그렇게 거닐다보면 청와대 정문 맞은편에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이 눈
앞에 다가선다.

보기만해도 시원스런 팔작지붕을 머리에 얹힌 신무문은 경복궁과 지금의 청와대에 있던 경복궁 후
원을 이어주던 통로이다.신무문이란 이름은 1475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하며 신하들의 공훈(功勳)
이 기록된 회맹단(會盟壇)이 있어 제왕이 신하들의 충성서약을 다짐받는 회맹제(會盟祭)에 참여할
때 이 문을 이용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홍예만 남아있던 것을 고종 때 다시 지었으며 영조가
육상궁에 참배하러 갈 때, 경복궁터를 가로질러 이 문을 자주 이용했다고 전한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이 문을 열면 음기(陰氣)가 궁궐을 어지럽힌다고 하여 보통 때는 문을 닫아 걸
었으며 제왕이 회맹제나 후원 나들이, 사냥을 나갈 때만 문을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심한 가뭄이
든 경우 물을 상징하는 숙정문(肅靖門, 한양 도성의 북문)과 이 문을 활짝 열어 기우제를 올렸다
고 전한다.후원은 모두 파괴되어 남은 건 없지만 북악산 바로 아래라 숲이 무성하여 북악산 호랑
이가 종종 놀러왔다고 한다.바로 그 호랑이 때문에 경복궁 후원은 절찬리에 이용되지 못했다. 참
고로 북악산 호랭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곶감이 아닌 수진궁 (壽進宮, 혼인하지 못하고 일찍 죽
은 왕족의 사당)
귀신이라고 한다.

왜정 때는 조선총독의 사저가 있었으며, 해방 이후 경무대로 이름을 바꾸고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
되기 시작했다. 신무문 안쪽에는 수도방위사령부를 두어 경무대를 수비했는데,이때부터 신무문과
그 주변은 감히 발도 들일 수 없는 성역 아닌 성역이 되었고, 2006년 수방사가 이전되면서 집옥재
(集玉齋)와 함께 백성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신무문을 통해 경복궁 진출입이 가능하다.

청와대 앞길과 경복궁 돌담길을 그렇게 거닐고 전통의 향기와 문화가 서린 인사동(仁寺洞)을 찾았
다. 인사동 거리를 누비다가 차(茶) 생각이 간절하여 기와집에 차려진 경인미술관 찻집에 발을 들
인다.
경인미술관은 원래 철종(哲宗)의 사위인박영효(朴泳孝)의 저택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갑신정변(
甲申政變)을 주도하는 등 나름대로 개혁을 꿈꾸었으나 처절하게 좌절을 맛본 후, 왜열도로줄행랑
을 치면서 결국친일매국노가 되버린 뒷끝이상당히 안좋은 인물이다. 그의 집은 남산한옥마을로
이전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경인미술관이 들어와 새롭게 뿌리를 내렸다. 기존의 집은 일부만 남겨
두어 미술관 찻집으로 쓰이고 있으며, 그 좌측에는 경인미술관 건물이 자리해 있다.


▲ 옛풍스런 한옥의 경인미술관 찻집 ~
일다경(一茶頃)의 여유를 즐기는 도시인들로 가득하다.

▲ 찻집에서 즐긴 황홀한 빛깔의 과일차들

시내 나들이를 마무리하며 기분 좋게 즐긴 차 1잔의 여유~ 고풍스런 한옥에서 마시는 전통차는
멋스러움을 한층 더해준다. 차를 같이 한 여인네는 오미자차를 마시고 나는 과일과 관련된 차
를 마셨는데, 야속하게도 차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차의 가격은 보통 6~7천원 선이며, 다른
곳과 달리 리필이 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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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촬영 일시 - 2008년 6월 22일 / 11월 23일
*작성 시작일 - 2008년 12월 20일
*작성 완료일 - 2008년 12월 22일
*숙성기간 ~ 2008년 12월 22일 ~ 2009년 4월 3일
*공개일 - 2009년 4월 3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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