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권 사진,답사기/북한산(서울 구역)

4월 초파일 나들이 ② 북한산 삼천사

도봉산 고양이 2009. 5. 12. 11:19

' 2008년 4월 초파일 기념, 사찰 순례기 2편'
<북한산 삼천사(三千寺)>

삼천사 세존사리탑
▲ 부처의 진신사리가 담겨진 삼천사 세존사리탑


4월 초파일을 하루 앞둔 11일, 후배 몇몇과 북한산 삼천리골에 숨어있는 삼천사(三千寺)를
찾았다.
불광동에서 서울시내버스 7211번 (기자촌↔신설동)을 타고 기자촌에서 내려 신도시 개발의
꿈을 안으며, 요란하게 꿈틀거리는 은평뉴타운 건설 현장을 지난다. 삼천사로 갈려면 어쩔
수 없이 지나야 되는 공사현장, 다행히 일요일이라 대다수의 공사판은 달콤한 휴식에 들어
갔으며, 일부에서만 포크레인 등으로 지구의 겉면을 딱따구리처럼 쪼아댈 뿐이다.
도로 주변으로 회색 철제담장이 천리장성처럼 길게 둘러져 도로와 공사구역을 나누고 있으
며, 주변 야산은 온통 대머리처럼 벗겨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2009년 이후
이 일대는 하얀 색의 밋밋한 아파트가 파도를 이루며 북한산을 압박할 것이다.

삼천사에서 관리하는 사회복지재단 인덕원을 지나면 삼천사로 통하는 2차선 길이 나오는데
여기서부턴 공사판 대신 온갖 들풀과 들꽃,나무들이 살랑살랑거리는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뉴타운 공사장에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삼천리골 하류를 건너 수풀로 무성한 삼천리골
등산로로 들어선다.



▲ 삼천사 가는 숲길

숲길은 강렬한 햇빛도 감히 범하지 못할 정도로 나무가 무성해 선선하다. 절까지 이어진 초롱초
롱한 연등은 우리를 삼천사로 묵묵히 인도한다, 지금은 족구장으로 변해버린 옛 사슴농장을 지
나면 북한산의 여느 등산로와 마찬가지로 파전과 동동주, 백숙 등을 파는 주막들이 나그네의 오
감을 간지럽힌다. 지금은 삼천탐방지원센터로 변신한 옛 매표소,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낼까?
그냥 들어갈 수 있을까? 잔머리를 굴리던게 진짜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그런 수고로움도 옛말이
되었다.

탐방센터를 지나 2분 정도 걸으면 제법 가파른 고개가 나온다. 고개 앞에는 삼천사를 알리는 표
석이 멀뚱히 서 있는데, 여기서 고갯길과 계곡길 2갈래로 갈린다. 어느 길로 가던 삼천사는나
오게 되어 있으나 시멘트길인 고갯길은 다소 가파르고 돌아가는 편이며, 수레들의 왕래가 잦다.
반면 계곡길은 빠르게 갈 수 있는 지름길이나 계곡을 점유하며 밥벌이를 하는 주막이 몇집 있으
며, 흙길이라 비온 뒤에는 노면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 삼천리골 계곡과 연등의 행렬


계곡길로 10분 정도 오르면 고갯길과 재회하면서 북한산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운 계곡,삼
천리골의 상류가 한 폭의 수묵담채화처럼 펼쳐진다. 봄가뭄이 극심해서인지 암반 사이로 흐르는
수량은 극히 적다. 계곡물의 졸졸졸~♪♪음악소리도 듣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곳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초소에 출입신고를 하고 신분증을 맡겨야만 들어갈 수 있던민간인
출입통제구역이었다. 물론 승려나 불교신도라고 예외는 없었다. 그러다가 1991년 통행제한이 속
시원하게풀렸다. 하지만 계곡 주변으로 철조망과군부대 훈련장, 수영장 등이 옥의 티처럼 남
아 있고, 삼천사와수영장 사이의 계곡은 상수원 보호를 이유로 접근이 통제되어 다소 아쉬움을
준다. 허나 그 덕분에 삼천리골은 아직까지도그 청정함을 유지할 수가 있었으며 서울에서 제일
깨끗한 계곡으로써의 명성을 지킬 수 있었다.


▲ 삼천사에 이르렀음을 알리는 육중한 석등


삼천리골의 아름다움의 취하기도 잠시. 다시 숨가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오르막을 5분 가
량 오르면 대진국(大震國, 발해)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석등(石燈)을 빼닮은 우람한 석등
1쌍이 힘들게 올라온 중생을 맞이하니. 여기서부터 산사의 향기와 초파일의 기쁨이 가득 서린
삼천사 경내가 펼쳐진다.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불상이 깃들여진 산사(山寺) ~
북한산 삼천사(三千寺)

▲ 삼천사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삼천사는 북한산 서쪽 삼천리골에 숨어있는 오랜 산사로 서울에서 제일 오래된 마애불을간직
한 유서 깊은 절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찰 출입의 많은 제한이 따랐으나 1991년 비봉과
북한산성으로통하는 등산로가 활짝 개방되면서 절의 출입이 자유로워졌다.

깊숙한 골짜기에 숨어 있는 이 절은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 부흥군과 고구려를 상대로 맞
짱을 벌이던 661년에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를 곧이 곧대로 믿으
면 정말로 곤란하다. 삼천사가 정말 원효가 세웠는지 검증된 바도 없고, 그 당시 신라를 둘러
싼 동북아 정세도 한가롭게 절이나 지을만한 상황이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에 지나칠 정
도로 목숨을 걸었던 신라도 그 시절까지는 왕경(王京, 경주)을 중심으로절이 지어지고 있었을
뿐이며, 원효대사 역시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던 시기이므로 절을지을 겨를이 없었다.

▲ 일주문 못미쳐에 자리한 삼천사 연못

연등으로 가득한 대웅전 앞쪽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은 원효대사, 그는 무열왕(武烈
王)과의 친분으로 과부로 있던 그의 딸인 요석공주(瑤石公主)에게 장가들어 왕실의 일원이 되
었고, 전쟁으로피폐해진 민심을 달래고자 귀족중심으로 돌아가던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면서
자장율사(慈藏律師)를 강원도 산골짜기로 밀어내고 신라 불교의 일인자로 우뚝 선다.

그러던 중 661년, 당나라 황제 고종(高宗)은
'이제 백제(百濟)도 망했으니 고구려를 쳐도 별무
리는 없을 것이다'
싶은 엉뚱한 생각에 단독으로 고구려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 고구려 정벌에는 당나라의 이름있는 맹장 방효태(龐孝泰)를 주장(主將)으로 10만이넘는
대군을 파견했는데, 방효태는 천하장사에 버금가는 그의 아들 12명(혹은 13명)을죄다끌고 나
오면서 고구려 정벌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압록강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당군은 평양 부근 사수(蛇水, 지금의 합장강으로 대동강의
지류) 부근까지 용케도 들어왔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파상적인 반격에 10만 대군은 완전히
전멸되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은 모조리 목 없는 귀신이 되어버렸다.

한편 바다를 건너 평양 서쪽으로 들어온 소정방(蘇定方)은 방효태의 대군이 절딴났다는 소식에
큰 충격에 빠진다. 날씨는 춥지 식량은 부족하지 언제 고구려군이 들이닥쳐 목을 댕강해 갈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서둘러 신라에 전령을 보내 식량과 원군을 요구했다.

신라 정부는 당나라와의 관계도 그렇고, 나중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들을 이용하기 위해서라
도 소정방의 요구를 쉽사리 무시할 수가 없었다.그래서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군량을 수
송케 했는데 이때 분황사(芬皇寺)에 머물던 원효는 그를 따라 종군(從軍)하게 된다.

김유신의 수송부대가 추운 겨울을 뚫고 고구려의 영역으로 들어오자 고구려군은 김유신군을때
려잡고자 길목에 매복을 하며 기다렸는데 소정방이 이를 눈치채고 급히 복잡하게 쓰인 암호문을
김유신군에게 보낸다.그 암호문을 바로 원효대사가 해독한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군을 격퇴하
고 무사히 군량 수송을마칠 수있었다.

이것이 661년부터 662년 초까지 원효대사의 행적이다.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던 그가 언제 고구
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자 전쟁터나 다름없는 북한산 부근에 삼천사를 세웠겠는가? 이는 절의
내력을 화려하게 부풀리고자 원효를 내세운 것이다. 실질적인창건 시기는마애불과 옛 삼천사
터에 깃들여진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기로 여겨진다.
다만 조선 초에 편
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과 조선 후기에 간행된 북한지(北漢誌)에 따르면 최대3,000
명이 머무를 정도로 번창했다고 하며 거기서 절의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름은
지금과 음은 같으나 가운데 한자가 다른 삼천사(三川寺)였다.

고려 초에는 개경 현화사(玄化寺)의 초대 주지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大智國師 法鏡)이 주지로
있었으며 고려왕실의 각별한 지원을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지휘
아래 승병(僧兵)의 주요 집결지가 되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으며 그 이후 진영화상이
삼천사의 암자가 있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세워 삼천사(三千寺)라 했다. 절은 원래 지금보다 1
km 안쪽 깊숙한 산자락에 자리해 있었다.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다시 지었으며, 1970년대에 성운(聖雲)화상이 절의 주지가 되면서경
내에 자리한 마애불이 오래된 불상임을 증명하여 1979년 보물 657호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또
한 20년 동안 꾸준히 불사(佛事)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1994년 사회복지법인 '인
덕원'을 설립하여 복지사업에도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보전과 산령각, 천태각,
요사채 등의 전각과 석가세존사리탑, 5층 나한사리탑,지장보살상 등의 석조물이 있으며 고색
이 짙은 문화유적으로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명품급의 마애불이 있다.

산속에 파묻힌 옛 절터에는 대지국사의 비석을 비롯하여 부도탑의 옥개석, 주춧돌 등이 남아있
으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500여 점의 유물을 건졌
다. 현재 그 박물관에서 다시금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으며, 수풀과 바위로 뒤덮여 정신이 없던
절터를 말끔히 정화했다.

서울시내와 제법 멀리 떨어져 있고 버스에서 내려서30~40분 이상을 걸어 들어가야 될 정도로
깊은 산골짜기에 숨은 절로 비록 고색의 내음은 현저히 떨어지지만 아늑한 산사의 멋과 향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멋드러진 계곡을 옆에 끼고 있어 한여름의 더위도 산바람에 씻겨
사라지고 온후한모습의 마애불에 마음이 포근해지는 곳, 마애불을 품에 안은 하얀 바위가 멋
드러진 삼천사 경내를 아낌없이 둘러보도록 하자.

※삼천사 찾아가기 (2009년 5월 기준)
① 3호선 구파발역(1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04,7733,8772번 이용
- 704번 버스를 이용할 경우, 삼천리골입구나 입곡3거리에서 하차, 도보 35분
- 걷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줄이고 싶다면 7733번 시내버스를 타고, 삼천사입구 종점에서 내린
다, 도보 26분, 다만 배차간격이 15~20분으로 길다.
- 주말, 휴일에는 북한산 등산객을 위해 8772번 시내버스가 임시운행된다.
② 3호선 연신내역(3번 출구)에서 서울시내버스 720,7211번을 타고 은평노인복지회관 하차, 북
한산성 방면으로 도보 40분
③ 구파발역(2번 출구) 인덕원 셔틀버스 정류장에서 셔틀버스가 1일 4회 운행한다. 운행시간은
8시20분, 10시, 11시, 13시30분 (자세한 운행 정보는 삼천사 홈페이지 참조)
- 법회와 행사가 있는 날에는 오전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며, 사월초파
일에는 저녁까지 자주 운행된다.

* 삼천사까지 차량 접근 가능하며, 주차 공간이 있으나 공간은 좁음
*삼천사 입장료 - 없음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 34 (☎ 02-353-3004)
* 삼천사 홈페이지는 위에 지장보살상 사진을 클릭하거나 ☞ 이곳을 클릭

♣ 안보면 통곡하는 삼천사 관람포인트
1. 삼천사 마애여래입상과 부처의 사리가 봉안된 세존사리탑
2. 나반존자가 모셔진 천태각
3. 삼천사에서 북한산성 방면으로 10분 가량 오르면 '탐방로없음'이라 쓰인 이정표가 나온다.
그 이정표 방향으로 들어가면 삼천사터의 일부로 전해오는 드넓은 절터가 나온다. <서울역
사박물관에서 발간한 문화유적지표조사종합보고서에는 삼천리골사지(寺址)2라 나옴>
4. 삼천사에서 북한산성 부왕동암문 방면으로 20분 정도 오르면 옛 삼천사터가 나온다. 이곳에
삼천사의 옛 흔적들이 진하게 배여있으므로 꼭 둘러보길 권한다.


♠ 삼천사 5층석탑과 연못

경내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4마리의 사자가 탑신을 받쳐든 5층석탑을 만나게 된다. 하늘을 가득
메운 고운 연등 사이로 간신히 보여 마치 구름 위로 솟은 거대한 탑마냥 웅장해 보이는 이 탑은
삼천사주지인 성운화상이 1988년 미얀마마하시타타나 사원을 방문하여 아판디타 대승정(大僧
正)에게선물로 받은 나한사리를 봉안하고자 세운 것이다. 4마리의 돌사자가 5층의 탑신(塔身)
을 가볍게 받들고 있는 형태로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 석탑을모델로 한 것 같다.

탑의 우측 높다란 곳에는 지장보살상이 자리해 있고 좌측으로 조그만 연못이 놓여져 있는데,조
그만 용머리가 북한산의 옥계수를 하염없이 뿜어내어 연못은 가히 마를 날이 없다. 연못 가운
데에 잠겨 있는 돌그릇에는 중생들이 내던진 동전들이 수북하다. 연못 바닥에는골인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가라앉은 비운의 동전들이 빼곡히 자리를 채운다.

우리는 소원도 빌겸 장난 삼아 잠자고 있는 동전을 꺼내 연못 가운데에 놓여진 돌그릇에 던진다
. 거리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다들 자신만만해 하며 던져보나 어느 누구도 속시원하게 골인이
되질 않는다. 사람들 모두 오기가 생겨 애궂은 동전을 죄다 동원해 동전던지기에 집중한다. 하
지만 10번에 1~2번 빼고는 죄다 연못 바닥으로 허무하게 침몰해 버린다. 마치 인간의 삶이 허무
하고 부질없음을 보여주듯이...

5층석탑을 지나면 뒤늦게나마 일주문(一柱門)이 나타난다.보통 일주문은 절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우기 마련이나, 삼천사는 특이하게도 대웅보전 입구에갖다 놓았다.세로로 걸린 현판에는 '
三角山 三千寺'라 쓰여 있으며 절을 찾은 중생들을물끄러미바라본다. 문 좌우로 법주사(法住
寺) 석등을 닮은 새하얀 석등 1쌍과 돌사자 1쌍이 문을 지킨다.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보이고, 길 오른쪽에 종무소가, 왼쪽으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지닌 고운 관음보살(觀音普薩)이 자리해 있다.


♠ 삼천사 대웅보전(大雄寶殿)과 관정(灌頂)의식

▲ 1년 만에 바깥 나들이를 나온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삼천사의 법당(法堂)인 대웅보전(대웅전)은 원래 적멸보궁(寂滅寶宮)이었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사리를 모신 절의 법당으로 불단에 불상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의 적멸보궁도 처음에는 불
상이 없던 것으로 기억나는데, 언제부터인가 대웅보전을 칭했으며 석가불과 지장보살 등의 불상
과 불화를 봉안하였다. 겹지붕으로 된 대웅전은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며, 호화로움이 물씬 배어
있는 건물 내부는 금빛찬란한 석가3존불의 광채로 가히 눈이 달아날 지경이다.

대웅전 앞에는 오색찬란하게 치장된 아기부처상 세트가 베풀어져 있는데, 바로 초파일 행사의
백미(白眉)인 관정의식의 현장이다. 관정은 성스런 존재의 머리에 물이나 향수를 뿌리는 의식으
로 종교에서 많이 한다. 초파일이 부처의 생일이다 보니 관정의 주인공은 바로 귀여움이 묻어난
아기부처상이다.

부처상 앞에는 시주함이 있는데, 보통 시주를 하고 바가지에 물을 담아 아기부처 머리에 3번 껴
얹으면서 소원을 빈다. 우리 역시 시주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정성을 담아 관정의 예를 올렸다.
요령이 없는 일행들은 부처의 몸에 물을 껴얹는 등 실수도 많이 저지르는 통에 부처상 옆에 한
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가 친절하게 관정의식 절차를 알려준다.

삼천사의 아기부처 세트는 다른 절보다 엄청 화려하고 규모도 큰 것 같다. 삼천사에서 자랑으로
삼는 것 중의 하나로 기둥과 천장, 부처 주변에 빼곡히 달린 연분홍 꽃과 장식물로 너무 화사한
나머지 두 눈이 단단히 호강을 한다.

▲ 대웅보전 뒷뜰을 가득 메운 연등의 행렬

▲ 대웅보전 석가3존불


♠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명품급 마애불, 삼천리골의 은둔자 ~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보물 657호

대웅보전을 지나면 계곡 왼쪽으로 범상치 않은 모습의 눈썹바위를 만날 수 있다. 그 바위에는
내가 제일로 사모하는 마애불 한분이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바로서울에
서 가장 연세가 깊은 마애불, 삼천사 마애여래입상이다.

불상 앞에는 그에게 예불을 드리는 기도처가 넓게 펼쳐져 있는데 1992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는 저런 기도처가 없었다. 계곡을 건너가서 마애불 바로 앞에 조그만 예불 장소가 있었을뿐,
허나 지금은 탄탄한 재정을 과시하듯 계곡 위를 덮어서 거대한 기도의 장소를 만들었다.

서울에 전하는 4개의 고려시대 마애불의 하나
로고려 초기(혹은 신라 후기로 보기도 함)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선으로 표현된 선각마
애불(線刻磨崖佛)이다. 불상 대부분은 선으로
처리되었지만, 일부는저부조(低浮彫, 얕음새
김)로 되어있으며 전체 높이는 3m, 불상의높
이는 2.6m에 이른다.

예전에는 전체적으로 윤곽을 따라 금분이 칠해
져 있었는데, 2000년 이후에 없어졌다. 불상의
오른쪽 부분을 자세히 보면 약간붉은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는 불상에 붉은채색을 했던
흔적이다. 마애불에 색을 칠한 것은 삼천사 마
애불과 왜관(倭館) 부근의 노석동 마애불 등이
전부로 그 예가 희귀하다.불상의 머리 뒤에 떠
있는 두광(頭光)은 2겹으로 된 둥근 모양으로
소발(素髮)한 머리 위에 무견정상(無見頂相)이
솟아 있다.

눈썹바위에 아늑하게 자리한 마애불

눈은 지그시 감아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이며, 코의 끝부분은 두툼하다. 입은 오무려서 중생들
에게 약간의 미소를 던지고 있으며, 눈썹 사이에둥그런 모양의 백호(白毫)가 있다.
불상의 키는 장신(長身)으로, 몸의 윗부분에는 두 어깨를가린 법의(法衣)를 걸쳤는데, 법의가
약간은 두터운 인상을 주니. 아무래도 마애불이 추운 겨울에 만들어진 모양이다. 불상의 아랫
쪽에는 연화대좌(蓮花臺座)가 있으며, 몸 뒤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광배(光背)가새겨져 있다.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신체적인 균형이 맞으며, 몸매는 단정하고 단아한 인상을 준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렸고, 왼손은 배 앞에 댄 모습인데, 이는 석가불의 성도(成道)를 상징한다고한다.


마애불 양쪽으로 네모난 구멍이 보이는데 저 구멍은 예전에 마애불을
보호했던 보호각의 흔적으로 보호각이 감싸주던 부분은 까무잡잡한 바위의
다른 표면과 달리 어둠 속의 하나의 촛불처럼 밝고 하얗다.
마치 광배(光背)에서 나온 빛이 그의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처럼 말이다.


마애불 어깨 좌우와 윗부분 바위 면에는 4각형 모양의 구멍이 파여져 있는데, 이는 자연현상이
아닌 마애불을 모시는 목조 전각을 세웠던 흔적으로 목조 전각은 오래 전에 녹아 없어졌다.

보호각이 사라진 이후, 마애불은 눈썹 모양의
바위의 보호를 받으며 눈과 비를 피했으며, 깊
숙한계곡 바위에자리한 탓에 태풍 등의 거센
바람의 공격을 피할 수 있어서 1,000년의 세월
을살았음에도 건강 상태는무지 양호하다. 오
랜 세월을 삼천리골의 은자로 조용히 숨어산
것도 그의 건강비결 중 하나일 것이다.
솔직히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 불상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냥 아는 사람만 찾아올
정도로.. 하지만 2000년 이후 삼천사의 존재와
함께 마애불의 존재가 약간이나마속세에 알려
지면서 그를 보러 오는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조금 늘어나긴 했으나 아직까지는 인지도가 현
저히 떨어지는 실정이다.
내가 마애불의 존재를 안 것은 1992년, 처음에
는 진관사 부근 야산에 숨어 있는 줄 알고 부
근 야산을 뒤적거리다가우연찮게 듣도보도 못
한 삼천사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이다.


마애불의 발 부분
연꽃으로 치장된 연화대좌 위에 불상이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몸을 걸친 법의 아래로
그의 두 발이 나와 있는데, 오리발처럼 다소 두텁고 어색해 보인다.

서울에도 이렇게 휼륭한 마애불이 있었다니! 정
말 감탄의 감탄을 연발하면서 슬슬 그에게매료
되고말았다. 그때이후 벌써 7번째 만남을 가
지게 되었는데,마애불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
진건 없는 것같다.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오
늘도 삶에지친 중생을 반가운 미소로 맞는다.

지금은 삼천사 경내에 있지만, 예전에는 절로
들어가는 길목을 지키는 불상으로그 주변은 이
름이 전해오지 않는 삼천사의 조그만 암자가 있
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소원을 들어준다는 영험(靈驗)을가
진부처님으로 소문이 자자하여 많은 사람들이
10리를 걷는 수고로움을 마다하고 이곳을 찾는
다.

머리와 몸 뒤에 두광과 신광은 마치
그의 몸에 빛이 발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도록 그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꾸며 준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마애불에게 예불을 드리는 기도처 앞에는 네모난 대(臺)가 있는데 그 위로 석종형(石鐘形)부도
1기가 세워져 있다. 이 탑에는 1988년 삼천사 주지인 성운화상이 미얀마를 방문하여 마하시타
타나 사원의 아판디타 대승정에게 선물로 받은 부처의 사리 3과가 봉안되어 있다. 부도(탑신)
주변으로 중생들이 갖다 놓은 연분홍 촛불과 동전들이 가득하며, 부도 좌측에는 세존진신사리
비(世尊眞身舍利碑)가 자리를 지킨다.

세존진신사리비

가까이서 대한 세존사리탑


♠ 삼천사 천태각, 산령각


삼천사에만 있는 독특한 불전 ~ 천태각(天台閣)


마애불 동쪽 담장 너머에는 천태각이라 불리는 약간 특이한 모습의 불전(佛殿)이 있다. 천태각
은 16나한의 하나로 천태산(天台山)에서 몸을 일으킨 나반존자(那畔尊者)의 보금자리로 독성각
(獨聖閣)과 비슷하다. 삼천사는 독성각이란 보편적인 이름을 취하지않고 그가 일어난천태산
의 이름을 땄다.
이 건물은 199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내부는 108개의 인등(引燈)이 내뿜는 무더운 열기로 거의
한증막과 다름이 없다. 인등은 그냥 촛불이 아닌 기름을 담아서 심지를 넣어 24시간 365일 내
내 불을 비춘다. 그래서 건물 내부가 찜질방처럼 더운 것이다.

건물 지붕에는 더운 열을 외부로 배출하고 공기를 통하게 하여 내부의 온도를 어느 정도 유지
시키기 위한 통풍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다른 불전과 들어가는 문이 2개이다. 바깥 미닫이 문
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으나 안쪽 문은 인등을 지키기 위해 항시 닫혀져 있으며, 들락날락 거
릴때 반드시 문을 닫아야 인등의 건강에 지장이 없다.


천태각의 주인, 독성(獨聖, 나반존자)

더운 기운이 온몸을 엄습하는 천태각 내부에는 커다란 독성을 중심으로 좌우에 조그만 16나한
이 어미와 새끼처럼 단란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북한산의 자연석으로 만든 가운데 독성은
대머리에 둥근널쩍한 얼굴, 길다란 귀, 약간 두터워 보이는 옷(얼마나 더울까??), 배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한 채 느긋이 명상에 잠겨 있으며, 이들에게 웃음
과 편안함을 자아내게 한다.
그의 좌우를 호위하는 새끼 16나한은 우리나라 인구만큼이나 제각각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이
들은 전국 각지에서 수습한 자연석으로 정성스레 조성한 것이라 한다.

천태각 앞에는 산령각(山靈閣)이라 불리는 제법 덩치가 큰 2층 건물이 있다. 삼천사에서 두 번
째로 큰 건물로 절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산신각(山神閣)이다. 다만 천태각처럼 누구나 다 아
는 평범한이름 대신 약간 어려운 듯한 이름을 선택하여 사람을 아리송하게 만든다. 산신각이
라고는 하지만 독성과 칠성까지도 모신 삼성각(三聖閣)의 역할까지 하고 있다.

북한산 산신이 깃들여진 불전으로 영험하기로 소문난 산령각은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2칸
으로 산령각은 윗층이다. 삼천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해 있어 경내가 두 눈에 바라보인다.


2층 규모의 삼천사 산령각


금빛찬란한 산령각 산신도(山神圖)


대웅보전 만큼이나 넓은 산령각 내부에는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을 모시고 있는
데, 그 가운데로 거대한 산신탱화가 자리한다. 산신도의 소박한 모습이 좋아서 절에 갈 때마다
꼭 산신도를 사진에 담고 하지만 이렇게 금색으로 금빛나게 도배를 한 산신도는 처음이다. 화
려하게 치장하는 건 좋지만 산신의 얼굴을 빼고는 색이 모조리 같아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하듯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 이 그림은 나무로 돋음새김을 하고 색을 입힌 평범한 산신도였
으나 지금은 눈만 아프다.

산신도 좌측으로 독성(나반존자)이 그려진 독성도(獨聖圖)가 있다. 천태각이라고 독성의 보금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삼천사는 독특하게도 산령각 안에도 그의 자리를 마련하여 다른 절과
달리 2명의 독성을 봉안했다.

이렇게 절을 둘러보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 삼천리골 계곡에서 1시간 정도를 머물며 다과시간을
즐기고 우리가 있어야 될 곳, 아비규환과 다름없는 바깥세상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세상과 완
전 단절되어 있을 듯한 이곳에도서서히 어둠의 물결이 밀려온다. 이리하여 삼천사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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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촬영 일시 - 2008년 5월 11일
*작성 시작일 - 2008년 8월 23일
*작성 완료일 - 2008년 8월 30일
*숙성기간 ~ 2008년 8월 30일 ~ 2009년 5월 8일
*공개일 - 2009년 5월 8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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