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사진,답사기

4월 초파일 나들이 ③ 안성 서운산 석남사

도봉산 고양이 2009. 5. 19. 17:01

' 2008년 4월 초파일 기념, 사찰 순례기 3편'
<안성 석남사(石南寺)>


▲ 석남사 영산전과 관정의식의 현장


사월 초파일 연휴의 마지막이자 초파일 당일인 12일, 천안에 사는 후배 여인네와 서울에서
남쪽 멀리 떨어진 안성 석남사를 찾았다.
내가 서식하는 서울 도봉동에서 안성까지는 정말 까마득한 길이다. 안성의 이웃 동네인 평
택까진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이어져 있고, 전철과 경기도 시내버스와의 환승할인이 가능하
여 카드 사용시 3000원 내외로 저렴하게 갈 수 있지만 거진 3시간이 걸리는 그야말로 만만
치 않은 여정이다.

후배와는 오후 2~3시 정도에 안성시외터미널에서 보기로 했다. 그는 안성과 가까워 천천히
와도 되지만 나는 일찍 서둘러야 된다. 허나 이리저리 꾸물거리다보니 시간은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의 고속 질주에 내심 혀를 내두르며 서둘러 전철에 나를 싣는다.

거대한 서울을 벗어나 안양과 군포, 의왕, 수원, 오산 등 수도권의 기라성 같은 도시를 지
나서 경기도의 최남단을 장식하는 인구 40만의 도시, 평택(平澤)에 들어선다. 평택이 수도
권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서울에서 100리(10리=5.5km)이상 떨어진 머나먼 곳이고, 이상하
게시리 인연이 없는 동네라 평택에 발을 들인 것은 이번까지 겨우 5번에 지나지 않는다.평
택역에서서 안성으로 넘어가는 평택시내버스 50번
(세교동◀공도▶안성시청)을 타고 다시 동쪽
으로 30여 분을 달려 14시 30분 경, 안성터미널(2008년 가을 시내외곽으로 이전됨)에 이른
다.
집에서 안성까진 거의 3시간, 차비는 환승할인의 혜택으로 2800원이 들었다.
평택과 더불어 경기도 남방에 자리한 안성은 17만(2009년 3월 기준)의 인구를 지닌 고장으
로 평택, 화성과 함께 점점 몸집을 불리고 있는 신흥도시이다.안성도 평택만큼이나 인연이
지독하게 없는 곳으로 거의 4년 만에 발자국을 남긴다.


안성터미널에서 애타게 날 기다리던 여인네와 인지동 주택은행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석남
사에 가려면 거기서 안성시내버스 100번을 타야 되는데 가서 시간표를 확인하니
'우악~ 10
분만 일찍 올걸~!!'
14시 30분 차는 이미 떠났고 1시간 뒤인 15시 40분에 차가 있다.
'이런
~ 1시간 동안 무엇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까?'
마침 둘 다 점심을 못먹은 터라 밥먹을 곳을
물색했다. 어차피 절을 보고 저녁밥도 먹어야 되니 간단히 요기하고자 터미널 부근 분식집
에서 순두부찌게로 늦은 점심을 때운다.

시간이 약간 남아돌아 시골시장의 구수한 멋이 깃들인 안성시장을 어슬렁 구경하다가 15시
40분 차를 타고 근 15분을 달려 상중리 종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바로
충북 진천인데 버스는 고개를 넘을 재간이 없는지 바로 길을 돌려 안성시내로 돌아가 버린
다.

석남사는 오랜 역사와 전통,수많은 문화유산을 지닌 안성 굴지의 절집이고 그날이 바로 초
파일이라 종점부터 사람들이 어느 정도 북적일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사람과 수레 구경
하기가 힘들다. 또한 종점에는 그 흔한 가게조차 없다.다만 예전에 가게 겸 주막으로 쓰인
건물이 싸늘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킬 따름이다. 종점 앞 도로에는 2008년 봄, 전국을 공포
에 떨게 했던 조류바이러스 차량 소독 장치가 설치되어 진천에서 넘어온 수레를 간단히 샤
워시키고 안성 관내로 들여보낸다.

종점에서 진천 방면으로 2분 정도 걸으면 오른쪽으로 절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오는데 여전
히 썰렁함이 감돈다. 사람은 2명 정도 본거 같고 수레도 고작 두 대가 전부라 이상한 생각
이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오늘이 초파일인데 그래도 이곳은 안성 제일의 사찰이야. 절에는
사람들이 많을꺼야'
중얼거리며, 이상한 생각을 일시 잠재워 본다.



▲ 진천에서 넘어온 수레가 차량 소독기의 검문을 받고 있다.


▲ 연등이 초롱초롱 길을 안내하는 석남사 길


계곡을 옆에 낀 석남사 길은 산내음이 충만하여 기분이 개운할 정도로 시원스럽다. 게다가 산이
나 절 입구에 으례 진치고 있는 주막도 없고(펜션같은 건 1~2개 정도 보임), 민가(民家)도 듬성
듬성 자리해 있을 뿐이라 길은 그야말로 평온의 극치이다. 색깔도 제각각인 연등은 절까지 대롱
대롱 이어져 우리를 다른 길로 새지 않게 인도해 주며, 꾸준히 오르막이 이어지긴 하지만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그리 힘든 것은 없다.

나의 마음을 점유하고 있는 온갖 번민을 계곡에 내던져 저멀리 흘려보내고 싶지만 거머리처럼
붙은 번뇌는 좀처럼 나를 놓아주려 하질 않으니 참으로 야속할 뿐이다. 그러고 보면 역시 부처
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초행길인 석남사에 나름대로의 기대를 품으며 15분 정도 걸으니, 드디어 그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담장으로 내부를 꼭꼭 가리고 있고 그 정면으로 금광루를 성문처럼 배치했는데, 그
모습이 자못 웅장해 보인다.


▲ 석남사의 정문인 금광루(金光樓)

석남사 앞 주차장에는 수레로 파도를 이룰 꺼라
는 당초 예상과는 달리 3대 정도만이 주인을 기
다리며 조용히 낮잠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이상하다 너무 벽지라 사람들이 없는 걸까? 아
니야 절 안에는 사람들이 좀 있겠지'
담장으로 가려진 석남사 경내로 들어설려면 금광
루 앞에 펼쳐진 계단을 올라 절의 정문인 금광루
의 아랫도리를 지나야 된다. 다른 길로는 해우소
좌측으로 뻥 뚫린 부분이 있는데, 이는 수레를 위
한 길이다.

'서운산 석남사(瑞雲山 石南寺)'의 현판을 단 금
광루는 근래에 지은 건물로 1층은 경내로 통하는
통로이며, 문이 없는 열린 공간의 2층은 교육이나
행사의 공간으로 쓰인다. 금광루를 들어서면 산사
의 내음으로 가득한 석남사 경내가 아낌없이 펼쳐
진다.


♠ 안성 지역 제일의 고찰, 서운산 동쪽 자락에 둥지를 튼
~ 서운산 석남사(瑞雲山 石南寺)



안성의 진산(鎭山)인 서운산 동쪽 자락에 계단식으로 둥지를 튼 석남사는 조계종(曹溪宗) 소속
으로 화성에 있는 용주사(龍珠寺)의 말사(末寺)이다.

신라 중기인 680년(문무왕 19년), 승려 담화(曇華, 또는 석선)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신빙성은
많이 떨어진다. 876년(문성왕 18년) 염거화상(廉居和尙)이 이곳에 머물며 절을 중수했다고 하
며, 고려 제4대 군주인 광종(光宗)의 아들 혜거국사(慧炬國師)가 중창하여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 만큼 큰 절로 성장했다.

조선 때는 불교를 때려잡는 이른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일환으로 전국의 절을 대거 통폐합할
때 안성 고을을 대표하는 절로 선정되었으며, 세조(世祖)는 석남사의 오랜 전통과 명성에 감복
하여 친히 친필교지(親筆敎旨)를 내려 석남사 승려의 부역(負役)을 면제시켜 주었다.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터만 남은 것을 효종(孝宗) 때 해원선사(海源禪師)가 다시 일으켜 세웠
으며, 1732년(영조 8년) 대웅전 등을 중수하였다.

이렇게 안성 제일의 사찰로 일컬어지던 석남사는 19세기 이후 근래까지 그 명성을 많이 잃으며
사세가 극도로 쇠하였다. 1970~80년대 사진을 보니 지금과 달리 정말 대웅전과 영산전, 요사채
가 전부이며, 그 외에는 온통 수풀 투성이다. 그러다가 1980년대 이후, 절 아래까지 포장도로
가 뚫리면서 찾는 이가 늘어나고, 수입이 정비례하면서 절을 대대적으로 확장,정비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석남사는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주변을 담장으로 둘렀으며, 오르막 지형을 이용하여 계단식
으로 4단의 축대를 쌓아 그 위에 뿌리를 내렸다. 절 가운데로 계단이 대웅전까지 곧게 이어지
며, 계단 좌우로 건물이나 탑 등이 자리해 있다. 또한 대웅전과 영산전, 금광루는 한결같이 동
향(東向)을 취하고 있다.

가람배치를 보면 절의 가장 높다란 곳에 법당(法堂)인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그 앞에 계단이
있다. 계단을 1단 내려가면 왼측으로 영산전이 있으며, 계단 좌우로 3층석탑 2기가 자리하여
형식적으로는 1금당 2탑 형식을 띄고 있다. 다시 계단을 1단 내려가면 좌우로 요사(寮舍) 등의
생활공간이 나오고, 다시 한 단계 내려가면 금광루와 넓은 공터가 나온다.

원래는 영산전이 절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하며, 그 앞에 대웅전이 있었는데 1978년 주
지승이 풍수지리에 따라 영산전 뒤쪽에 새롭게 터를 닦고 대웅전을 옮겼으며, 계단을 대웅전
앞까지 연장시켰다.


▲ 어처구니가 없는 맷돌


▲ 종무소로 쓰이는 요사(寮舍)


경내에는 대웅전과 영산전, 금광루, 종무소 등 7~8동의 건물이 있으며, 처음 생각과는 달리 다
소 아담한 모습을 지녔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영산전을 비롯하여 지방문화재
인 대웅전과 마애불, 안성시 지정 향토유적인 3층석탑과 부도 2기(향토유적 28호)가 있다.
그 외에 1580년에 만들어진 1.2톤 규모의 동종(銅鍾)은 순금 1.2kg를 넣어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용주사(龍珠寺)에 가 있으며, 영산전 부근에는 오래된 맷돌이 놓여져 있다.

석남사는 서운산 등산코스 기점의 하나이다. 석남사계곡을 따라 2km 정도 오르면 서운산 정상
(547m)에 이르며 여기서 좌성사(座聖寺)나 은적암(隱寂庵)을 거쳐 청룡사(靑龍寺)로 내려갈 수
있다. 좌성사에는 오래된 미륵불(彌勒佛)이 있으며, 청룡사는 안성의 주요 고찰로 석남사 못지
않은 많은 문화유산을 품고 있다. 또한 서운산 서쪽 능선(좌성사 부근)에는 임진왜란 때 홍계
남(洪季男) 장군이 왜군을 크게 때려잡은 서운산성(瑞雲山城)이 있어 등산 겸 답사를 즐길 수
있는 휼륭한 산이다.

서운산 깊은 골짜기에 둥지를 튼 석남사는 산사의 향기와 고찰의 내음을 가득 느낄 수 있다.
대웅전까지 간선도로처럼 뻗은 계단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앉은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
금 안정감을 선사하며, 절의 규모는 조촐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으리으리한 대도시의 큰 사찰보
다 정감이 많이 가는 그야말로 작지만 알찬(다량의 문화유산, 오랜 역사와 명성) 절이다.

그동안 초파일에 찾은 절은 2006년에 찾은 성남의 망경암(望京庵)을 빼고는 죄다 사람들로 미
어터져 사람구경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조그만 절집이라도 초파일에는 어디나 사람들로 넝실
거리기 마련인데, 석남사는 절의 오랜 전통과 명성에 비해 찾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초파일
이라 시끌벅적한 모습을 기대했는데, 너무나 썰렁한 석남사의 모습은 그날이 초파일이 맞나 의
심이 들 정도였다. 대신 고요한 산사의 멋과 분위기는 정말 지대로 누렸으니 그것으로 만족하
련다.


▲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 영산전 16나한상


※석남사 찾아가기 (2009년 5월 기준)
① 대중교통
* 서울강남고속터미널, 동서울터미널, 남부터미널(서초동)에서 안성행 고속/직행버스가 수시로
떠난다.
* 인천, 성남, 수원, 천안에서 안성행 직행버스가 자주 떠난다.
* 경부선 평택역에서 안성터미널까지 50번 시내버스가, 역전과 가까운 평택터미널에서 70, 370,
370-1, 370-2번 시내버스가 물 흐르듯 끊임없이 다닌다.
* 안성터미널 건너편 정류장에서 안성시내버스 100번을 타고 상중리 종점에서 내려 도보 20분.
버스는 50~70분 간격으로 1일 14회 정도 다닌다.
② 승용차 (절 아래에 주차공간이 있으며, 주차비는 공짜)
* 경부고속도로 → 안성나들목을 나와서 안성방면 38번국도 → 공도읍 → 안성시내 → 안성시
민회관을 지나 옥천교로 우회전 → 옥천교를 건너 좌회전하여 진천 방면으로 직진 → 상중리
종점 → 석남사입구에서 우회전 → 석남사

♣ 석남사 관람정보
*입장료 - 없음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508 (☎ 031-672-0044)

♣ 안보면 땅을 치고 후회하는 석남사 관람포인트
1. 영산전과 그 내부
2. 영산전 우측 3층석탑 2기
3. 석남사 마애여래입상 (석남사에서 계곡을 따라 7분 도보, 이정표 있음)
4. 금광루에 걸려있는 이쁜 목어(木魚)


♠ 석남사 금광루와 연못


▲ 맞배지붕의 간결한 모습을 지닌 금광루의 뒷모습


금광루를 통해 경내로 올라서면 대웅전까지 시원스레 뻗은 계단이 정면으로 펼쳐진다. 계단 주
변으로 아름다운 색채의 연등이 바람에 휘날리며 초파일 분위기를 진하게 자아낸다. 연등이 고
운 것은 단순히 색이 이뻐서가 아니다. 열심히 살고 있는 중생들의 조그만 소망과 마음이 한가
득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금광루와 그 좌우 담장은 석남사의 1단 석축을 이루고 있는데 마치 성곽(城郭)을 보는 듯 하다.
금광루 2층에는 '석남사 사적기'가 좌측 벽 위쪽에 걸려 있으며, 사물(四物)의 일종인 운판(雲
版)과 목어(木魚)가 있다.


▲ 석남사의 상징물로 손색이 없는 어여쁜 금광루 목어
내가 물고기였다면 저 목어에 반해 석남사를 쉽사리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금광루 목어는 그 생김새가 암컷 물고기 같다. 동그랗게 뜬 눈하며, 얼굴 표정까지 거의 여자의
얼굴이다. 꼬리와 머리 부분에 꽃을 꽂으며 꽃단장까지 취한 목어의 모습은 정말로 깜찍하기 이
를 데 없다. 내가 봐온 수많은 목어 중 이렇게 아리따운 것은 처음이다. 다른 것은 다 잊을지언
정 목어만은 절대로 잊지 못할 듯 하다. 기분 같아서는 집으로 보쌈해 가고 싶지만 차마 그러지
는 못한다.

금광루 좌측에는 종무소(宗務所)로 쓰이는 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 2층 규모의 해우소(解憂所
)가 있다. 볼일을 보는 곳에서 아래층이 죄다 보여 약간은 섬뜩한데, 냄새도 조금은 풍긴다. 마
침 해우소에 들어간 여고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기겁을 하고 뛰쳐나와 소란을 피우는 모습이 목
격되었다. 아무래도 현대식 변소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재래식 해우소는 감당하기가 버겨울 것
이다.

금광루 우측에는 'ㄱ'자 모습의 도중당(道中堂)이 있는데 좌측 요사와 마찬가지로 승려들의 생
활공간으로 쓰인다.


▲ 꿈엔들 잊을까? 한 폭의 그림 같은 석남사 연못


요사 뒤에는 창고가 있고, 그 좌측으로 노란색 꽃(난초?)이 피어난 아담하고 동그란 연못이 놓
여 있다. 연못 앞에는 나그네의 발길을 쉬게 해주는 나무로 된 벤치가 베풀어져 운치를 자아내
며 연못 뒤쪽에는 커다란 바위가 우주에서 뚝딱 떨어진 운석마냥 놓여져 연못을 꾸며준다. 연못
에는 개구리의 운동장인 연잎으로 가득한데, 여름에는 연꽃의 즐거운 향연이 연출될 것이다. 다
만 옥의 티가 하나 있다면 바위 뒤에 달린 안테나..!!


♠ 아기부처의 희열(喜悅) ~ 관정(灌頂)의식



4월초파일 주요 행사 중의 하나로 아기부처에게 물을 끼얹고 예를 드리는 관정의식이 있다. 석
남사는 영산전 아래 약수터 좌측에 그 의식의 현장을 베풀어 놓았는데, 장미와 온갖 꽃으로 아
기부처 주변을 아리땁게 치장했다. 꽃에 둘러싸여 그런지 아기부처의 표정이 해맑아 보인다.
그동안 초파일에 만났던 관정의식의 현장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줌마 신도(보통 2명)가 아
기부처를 지키며 사람들의 의식을 도와주고, 의식을 치르려는 사람과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장사
진을 이루었는데, 이곳은 어째 지키는 사람도 없고, 의식을 치르는 사람도 거의 없어 그저 썰렁
함만이 주변을 휘감아 돌 뿐이다.

우리는 무척 심심해 할 그에게 물을 3번 부으며
관정의 예를 올린다. 물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흘
러내리는 '관성의 법칙'의 현장을 지켜보며 나름
대로의 소망을 슬쩍 들이밀어 본다.

관정의식 곁에 자리한 약수는 서운산이 절을 찾은
중생들에게 베푸는 약수로 봄가뭄이 여전함에도
늘 물로 넘쳐나 서운산의 넉넉한 마음을 보여준다. 시원하게 몇 모금 들이키니, 오장육부가 싹
시원해짐을 느끼면서 마음까지 맑아진다.

약수터 뒤에는 아기동자상과 호랑이상 등 조그만
형상들이 어지러이 널려져 있고, 그들을 꽃을 든
관음보살(돌에 새겨진 불상)이 인자함이 가득 깃
든 표정으로 넌지시 지켜본다. 마치 어미가 아기
를 보듯이~~


♠ 석남사 영산전(靈山殿) - 보물 823호


관정의식의 현장에서 대웅전을 향해 1단계 더 오르면 오른쪽으로 영산전이 나온다. 영산전은 석
가여래의 생애를 묘사한 8개의 그림이 있는 건물로 팔상전(八相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건물
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건물은 17세기 중반, 해원선사가 절을 다시 일으
켜 세울 때 재건된 것으로 여겨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공포가 기둥 사이에 촘촘히 박
힌 다포(多包) 양식을 취하고 있다. 밖으로 뻗쳐 나온 공포의 끝이 짧고 약간 밑으로 처진 곡선
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 건물에 많이 나타나는 기법이라고 한다. 작지만 날렵하며 균
형 잡힌 모습이 인상적인 영산전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건물 불단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석가3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그 좌우로 8명씩 16나한(羅漢)
이 앉아 있다. 영산전 좌측 뜰에는 부도탑으로 쓰이는 3층석탑(1층 탑신이 까맣다)과 담장에 둥
지를 튼 석불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 영산전 석가3존불
흙을 빚어서 만든 소조불(塑造佛)로
가운데 석가불이 문수, 보현보살
을 좌우로 대동하고 있다.

◀ 표정도 제각각인 16나한상
이들도 흙을 빚어서 만든 것으로 금동
으로 산뜻하게 도금을 하였다.

16나한은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부처
의 법을 수호하는 존재로 우리나라 인
구 만큼이나 다양한 표정과 포즈로 한
자리씩 서로 담소하듯 앉아 있는 나한
의 모습에 여유로움이 가득해 보인다.


▲ 석남사 3층석탑 2기 - 안성시 지정 향토유적 19호


영산전 오른쪽, 그러니까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을 사이에 두고 3층석탑 2기가 마치 서로를 연
모하듯 자리해 있다. 이들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탑의 높이는 2.3m 정도이다. 탑의 일부
부재(部材)가 없어진 상태로 영산전 쪽 석탑의 1층 탑신(塔身)에 조그만 감실(龕室)이 있을 뿐,
별 꾸밈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4~5층탑으로도 보이는데 3층 윗부분은 상륜부(相輪部)로
노반(露盤)과 복발로 여겨진다.


▲ 좌측 3층석탑 감실에 누군가가 조그만 불상을 갖다 놓았다.
공간은 작지만 그에게 딱 맞는 보금자리로 그의 집에 부러움이 잔뜩 일어난다.


▲ 영산전 좌측에 자리한 3층 부도탑과 담장에 둥지를 튼 조그만 석불


♠ 석남사 대웅전(大雄殿)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08호


석남사에서 가장 높다란 곳에 법당인 대웅전이 뿌리를 내리며 경내와 속세를 굽어본다. 초파일
연등으로 주변을 치장한 대웅전은 원래 영산전 앞에 있었으나 1978년 수풀만 무성하던 지금의
자리를 개척하여 옮긴 것이며, 영산전에서 끊긴 계단을 대웅전까지 연장시켰다. 이전 사유에 대
해서는 풍수지리에 따른 것이라고 하며, 덕분에 석남사의 사역(寺域)이 산쪽으로 약간 확장되었
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촘촘히 박힌 다포(多包)
양식이다. 영산전과 더불어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효종 때 다시
세웠다. 지금의 자리로 이전할 때 '옹정(壅正) 10년'이라 쓰인 기와가 발견되어 1732년(영조 8
년)에 중건되었음을 보여준다.

화려한 닫집을 갖춘 불단(佛壇)에는 근래에 새롭게 손질한 석가3존불이 있으며, 석가불을 중심
으로 좌우로 문수,보현보살(文殊,普賢菩薩)이 협시불(夾侍佛)로 자리해 있다. 그들 뒤로 후불탱
화가 든든한 후광(後光)이 되어주고 있으며, 산신도(山神圖)와 칠성탱화, 신중탱화, 지장탱화,
1996년에 제작된 조그만 범종 등이 그 주변을 촘촘히 장식한다. 건물 외벽에는 심우도(尋牛圖)
가 그려져 있는데, 그 10장면 중 마지막 장면을 제외한 9장면이 세세히 채색되어 있다.


▲ 대웅전 석가3존불과 닫집


▲ 칠성탱화(왼쪽)와 산신도


▲ 대웅전 앞에서 굽어본 석남사 경내
저 아래 금광루가 까마득하게 보인다.


♠ 산 속에 숨어있는 거대한 불상, 석남사에서 가장 오래된 보물
~ 석남사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09호


석남사에서 서운산 정상과 마애불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계곡길로 7분 가량 가면 왼쪽으로 마
애불(磨崖佛)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온다. 그의 안내로 약간 경사가 있는 산길을 오르면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장대한 마애불에 가히 넋을 잃고 만다. 그 웅대함 앞에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주눅이 들고도 남음이 있으며, 고개가 아프도록 올려다 봐야 되는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된다.
후배를 불상 옆에 세우고 사진에 한 컷 담아봤는데, 불상 앞에 사람은 역시나 사람 앞에 개미에
불과했다.

석남사가 있는 남쪽을 내려보고 있는 마애불은 높이가 5.3m, 폭이 2.8m에 이른다. 불상이 의지
하고 있는 바위는 높이가 높이 7m, 폭 6.5m에 이른다. 제작 시기는 불상의 얼굴 표현과 옷 주름
등으로 고려 초기로 추정되며, 신라 후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시절에는 유력한 지방세력과
부호(富豪)들이 자신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앞다투어 거대한 불상을 조성하는데, 이 불상 역시
그 유행에 따라 안성지역 세력가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의 표정은 우리가 늦게 온 것에 대한 항의인 듯, 다소 인상을 쓴 듯 보이며, 머리 꼭대기에
무견정상(無見頂相, 육계)이 솟아 있다. 무지개처럼 구부러진 눈썹, 부릅 뜬 눈, 삼각형의 오목
한 코, 길쭉한 두 귀를 갖춘 얼굴 뒤로 동그란 두광(頭光)이 3중으로 강하게 처리되었다.

법의(法衣)는 어깨와 온 몸을 덮고 있으며, 옷주름은 'U'자형으로 흘러내렸다. 법의 아래로 속
옷 같은 옷을 걸쳤는데, 그 아래로 연꽃이 새겨진 대좌(臺座)와 두 발이 묘사되었다. 얼핏보면
앉아 있는 좌상(坐像)으로 보이지만 우중충하게 서 있는 입상(立像)이다. 몸 뒤로 두광과 마찬
가지로 3중으로 진하게 처리된 신광(身光)을 갖추고 있어, 마치 이글이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듯 하다. 수인(手印)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댄 설법인(說法印)이며, 불상의 건강 상태는 양호하
나 얼굴과 어깨에서 균열이 진행되고 있어 보호조치가 시급하다.

마애불 앞에는 예불을 드리는 조그만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향과 촛불을 피우는 조그만 돌상에
는 어느 중생이 갖다놓은 사탕이 있는데, 불상이 그 사탕으로 치아가 썩지 않을까 싶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우며 몇 개 집어왔다. 하긴 돌부처가 어떻게 사탕을 먹겠는가..? 그 자리에서
푹 썩던가. 아니면 석남사에서 수거하여 후식으로 삼던가, 아니면 등산객이나 다람쥐가 챙기던
가 하겠지~~


서운산 자락에 숨은 마애여래입상을 끝으로 불두화(佛頭花)의 향기로 가득한 석남사 순례는
마무리가 되었다. 솔직히 절보단 마애불에 더 큰 관심이 쏠렸다. 산 속에 숨어 있어 못찾으
면 어쩌나 걱정을 조금 했으나, 이정표가 불상 아래까지 친절히 베풀어져 찾는데 그다지 어
려움은 없다. 하지만 금광루 부근에 있다는 석남사 부도(향토유적 28호)를 깜박 놓쳐버리는
실수를 범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녹음이 짙은 석남사 계곡에서 잠시 여유를 즐기거나 서운산성이나 청
룡사, 좌성암 등을 둘러보면 정말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텐데 시간은 벌써 18시를 훌쩍 넘긴
상태다. 아쉽지만 우리가 있어야 될 곳으로 나가야 된다.

기상청에서 그날 오후, 비가 온다고 요란하게 선전을 했다. 잔뜩 인상을 머금은 뭉개구름이
안성 일대를 가득 메워 긴장감이 감돌긴 했으나, 다행히 초파일 주인공의 가호 덕분인지 비
는 내리지 않았다.

상중리 종점으로 나와 싸늘하게 변한 옛 가게에 걸린 시간표를 보니 18시 40분에 차가 있다.
약 20분의 여유가 있어 집에서 가져온 과자를 먹으며 느긋히 버스를 기다린다. 18시 35분이
되자 상중리 마을과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100번 버스가 슬금슬금 들어온다. 운전사와 차량
은 아까 전과 같다. 어차피 1대로 때우는 노선이니까..~ 시간이 되자 적막에 잠긴 상중리에
부르릉 한 곡절을 남기며 고요한 산촌을 떠난다. 교통이 편리한 평택에서 저녁을 먹고자 안
성시내에서 안성시내버스 370번을 타고 평택으로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의미심장한 말이 있듯이 여행이나 등산에서 먹는 재미는 빼놓을 수 없
다.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궁리하다가
평택역 부근 '명동칼국수'집이 눈에 들어오면서 칼국
수로 허기진 뱃속을 달래주기로 했다.

이 집의 칼국수는 나름대로 맛을 갖춘 것 같다. 당근과 양파, 조그만 고깃덩어리가 국수 면
발과 즐거운 만남을 이루며 황홀한 맛을 자아한다. 얼큰하고 뜨끈한 국수 국물에 역시 밥이
빠질 수는 없겠지. 밥을 하나 시켜 국물에 푹 담구고 말끔히 먹어 치운다.만두 역시 목구멍
이 탄성을 지를 정도로 맛깔스럽기 그지 없다. 가격은 칼국수와 만두 모두 5000원이었던 것
으로 기억난다. 반찬으로는 김치와 단무지가 나왔고 서비스로 보쌈도 나왔는데 고기는 달랑
3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배불리 저녁을 먹었으니 입가심도 할 겸 후식이 필요하겠지, 후식을 위해 부근 커피
샵에 들어갔다. 그 집은 정말 연말 분위기가 풍길 정도로 새하얀 눈 장식을 갖춘 나무 장식
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창 밖의 풍경만 겨울에 맞춰준다면 완전한 연말로 착각할 정도
다. 여기서는 시원하게 빙수를 먹었는데 나는 초코빙수를 먹었다. 가격은 5천원선으로 양이
정말로 푸짐하여 가까스로 한 그릇을 비웠다.

▲ 저녁으로 먹은 칼국수와 만두, 그리고 서비스로 나온 보쌈


▲ 후식으로 먹은 딸기빙수와 초코빙수

빙수를 먹으며 일다경의 여유를 즐기니 시간은 어언 22시가 넘었다.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
아가야 될 시간이 온 것이다. 평택역에서 아쉽지만 후배 여인네와 작별을 고하며 다시 서울
로 올라왔다. 이리하여 2008년 4월 초파일 순례는 대단원의 막을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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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촬영 일시 - 2008년 5월 12일
* 작성 시작일 - 2008년 9월 6일
* 작성 완료일 - 2008년 9월 16일
* 숙성기간 ~ 2008년 9월 16일 ~ 2009년 5월 14일
* 공개일 - 2009년 5월 14일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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