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권 사진,답사기
늦여름의 부산 산사(山寺) 나들이 <내원정사, 만덕사터>
도봉산 고양이
2009. 9. 11. 17:27
' 늦여름의 부산 산사(山寺) 나들이 ~ 내원정사 / 만덕사 '

▲ 내원정사
8월의 마지막 주말, 친분이 두터운 부산 광안동(廣安洞) 형님 집에서 하루를 머물고 다음
날 오전, 갈만한 절 2곳을 정하여 사찰 투어에 나섰다. 그중 제일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은
부산도심과 지척인 꽃마을의 내원정사이다.
내원정사에 오르기 전, 국제시장에서 점심으로 돼지고기를 구워먹으며 뱃속을 달랜다. 그
집은 소주를 매우 착한 가격인 100원에 팔고 있었는데,고기에 곡차(穀茶)가 빠질 순 없는
터라 비록 낮술은 즐기진 않지만 곡차 1잔의 여유를 즐긴다. 절에 가는데 고기 냄새도 모
잘라 술 냄새까지 풍기는 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닌데 말이다.하지만 2명이서 고작 1병을
마신 것이니 그 냄새가 미미할 것이니 부처님도 웃으면서 봐줄 것이다. 고기와 곡차를 겯
드린 점심을 마치고 곧이어 밀려온 졸음의 희롱과 유혹을 과감히 남포동 앞바다에 내던지
며 택시를 잡아타고 구덕고개에 자리한 꽃마을을 찾았다.
꽃마을은 처음에는 범일동의 안창마을과 비슷한 산동네이거나, 내원정사와 관련된 복지시
설을 일컫는 이름인줄 알았다.허나 꽃마을까지는 수레가 마음놓고 들어오게끔 2차선 도로
가 깔려져 있고, 등산객과 나들이객들로 바글바글하며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주막들
이 깔끔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는 모습은 정말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국립공원에 조성된
주막과 숙박시설을 갖춘 관광단지를 방불케 한다. 부산 도심이 바로 아래인데, 도심과 지
척에 이런 곳이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꽃마을은 부산 도심을 품은 구덕산(九德山, 565m)과 엄광산(嚴光山, 503m) 사이에 둥지를
튼 마을로 구덕고개 정상부에 자리한다. 구덕산을 통해 억새로 유명한 승학산(昇鶴山,496
m)까지 산행이 가능하며, 휴일에는 등산객들로 홍수를 이룬다. 여기서는 남쪽으로 도심과
영도(影島), 부산 앞바다가, 북쪽으로는 사상구(沙上區) 일대가 거침없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 남쪽 아래로 구덕산과 엄광산이 베푼 옥계수를 모아둔 커다란 연못이나그네의 발길
을 멈추게 한다. 아름답게 꾸며진 연못에는 오리 몇 마리가 순찰하고 있을 뿐, 수면은 그
저 잔잔하기만 하다. 연못과 주변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원정사는 잠시 잊고 오로지 풍
경 출사에 몰두하였다. 그러는 사이 1시간의 시간이 훌쩍 흘러갔으니 정말 시간도둑이 따
로 없다. 연못 주변에는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평온한 휴일 분위기를 두텁게 드리운다.
 ▲ 꽃마을 아래에 자리한 거대한 연못 주변 산들이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피며 매무새를 다듬느라 여념이 없다. 장차 다가올 가을에 대한 설렘 때문일까?
 ▲ 산내음으로 가득한 내원정사 가는 길
|
꽃마을에 오긴 했는데 정작 내원정사를 알리는 이정표가 없다. 한참을 두리번거려 꽃마을
동쪽 끝에 절로 가는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점심을 먹고 왔음에도 주막에서 진하게 풍기는 막걸리와 파전 냄새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
렵다.간신히 마을을 벗어나니 절로 통하는 숲길이 속세의 냄새를 털어내려는 나그네를 맞
는다.
운치가 가득 서린 숲길은 속세와 부처의 세계를 구분 짓는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솔내음
의 향기에 취하며 온갖 번뇌를 산바람에 흩날려 보낸다. '내원정사는 어떻게 생긴 절집일
까?' 기대를 품으며 8분 정도를 들어가니 드디어 내원정사가 그 모습을 진하게 드러낸다.
♠ 구덕고개에 둥지를 튼 커다란 절, 범어사와 더불어 부산을 대표하는 절로 자리매김한 도솔산 내원정사(兜率山 內院精舍)

 |
4. 내원정사 수장 묘법연화경(收藏 妙法蓮華經, 부산지방유형문화재 45호) - 조선 인조 때 간행 5. 목조관음보살좌상(부산지방유형문화재 47호) - 조선 영조 때 조성 등의 지방문화재 5점을 간직하고 있으나 모두 동산문화재라 관람은 거의 어렵다.
절의 연륜이 짧아 고색(古色)의 내음은 없으나 도심과 무척이나 가까운 산사로 산림이 울창하고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속세의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가다듬기에는 적당한 곳이다. 절 뒤쪽에는 넓은 대나무숲이 펼쳐져 있으며, 조그만 차밭과 해바라기 등의 꽃밭도 한켠에 자리를 지키고 있 어 자연과 어우러진 절의 아름다움내원정사는 엄광산 서남쪽, 구덕고개 언저리에 포근히 안긴 산사(山寺)이다. 그리 큰 규모는 아 니지만 대적광전과 만불전 등 한덩치 하는 건물이 중심에 포진해 있어 경내가 다소 넓게 다가온 다. 절의 이름인 내원(內院)은 부처가 인도에서 태어나기 전까지 머물던 곳이라고 하며, 지금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보살(彌勒菩薩)이 부처가 되는 그날을 기다리는 곳이라고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으로 처음 생각과는 달리 역사가 무지 짧은 절이다. 1972년 11월 현 주지 승인 정연(定鍊)이 지금의 자리에 법등(法燈)을 키면서 절의 역사는 시작되며 1973년부터 1983 년까지 10년에 걸친 대불사(大佛事)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1997년에는 창건 27주년 기념으 로 만불전, 장경각, 진영당, 설선당, 덕화실과 도량정비공사를 벌였다. 또한 1985년에는 유치원 (내원정사 유치원)을 세웠고, 1996년에는 복지사업에 뛰어들어 몰운대종합사회복지관을 운영하 고 있으며, 사회복지법인 '내원'과 재단법인 '내원청소년단'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경내에는 대적광전과 만불전, 범종각, 관음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으며, 소장 문화유산은 1. 진언집(眞言集, 부산지방유형문화재 42호) - 조선 효종 때 간행 2. 조상경(造像經, 부산지방유형문화재 43호) - 조선 숙종 때 간행 3. 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 부산지방유형문화재 44호) - 조선 영조 때 간행 을 한껏 드러내 보인다.
※ 내원정사 찾아가기 (2009년 9월 기준) * 지하철 1호선 서대신역(4번 출구)에서 구덕운동장 방면으로 100m 정도 걸으면 마을버스 정류 장이 있다. 거기서 서구마을버스 1번을 타고 꽃마을 종점 하차. * 꽃마을 종점에서 오른쪽(북쪽 방향을 기준)으로 펼쳐진 꽃동네 주막촌을 지나면 막다른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내원정사이다. 꽃마을 종점에서 도보 11분 * 승용차로 내원정사까지 접근이 가능하며 절 앞에 주차장 있음 * 소재지 - 부산광역시 서구 서대신동3가 산3-2 (☎ 051-242-0691) * 내원정사 홈페이지는 위에 사진들을 클릭바람
|
♠ 내원정사 둘러보기
 ▲ 내원정사 범종각(梵鍾閣) |
내원정사는 절에는 으례 있는 일주문(一柱門)이 없다. 대신 절로 들어서는 길목에 울창한 숲길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2층 규모의 범종각이 절의 정문 역할을 한다. 범종각 아랫층은 경내로 들어 서는 계단이 있으며 계단을 오르면 넓다란 내원정사 경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 범종각에 대롱대롱 매달린 목어(木魚)
|
범종각에는 중생구제를 향한 부처의 메세지가 담긴 4가지의 물건, 범종(梵鍾)과 운판(雲版), 법 고(法鼓), 목어 등의 사물(四物)이 담겨져 있다. 목어는 수중생물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것으로 그의 생김새가 절마다 가지각색이나 이곳의 목어 는 메기마냥 수염까지 달려있다. 멀뚱하게 벌려진 입에는 여의주(如意珠)로 보이는 구슬이 혹 떨 어질새라 꽉 물려져 있으며, 지느러미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을 보는 것 같다. |
 ▲ 내원정사 대적광전(大寂光殿)
|
 | 경내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내원정사의 법당(法堂) 인 대적광전과 시선이 마주친다. 정면 5칸, 측면 3 칸의 우람한 팔작지붕 건물로 화려함의 극치를 이 룬 내부는 너무 환하다 못해 눈이 멀 지경이다. 불 단(佛壇)에는 부처를 중심으로 한 3존불 대신 금동 이 입혀진 5층탑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눈길을 단 단히 붙든다. 탑에는 1967년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 의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따로 부도탑(浮屠 塔)을 만들지 않고 법당 불단에 사리를 위한 탑을 만든 것이다. 고로 탑이 부처를 상징하는 본존불( 本尊佛)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탑에는 각 층마 다 조그만 불상이 촘촘히 새겨져 장관을 이루며 탑 양쪽으로 관음보살 등의 협시불(夾侍佛)이 자리해 있다.
대적광전 우측에는 관음전(觀音殿)과 요사(寮舍)로 쓰이는 만불전(萬佛殿)이 있다. 만불전은 내원정사 에서 가장 큰 건물로 1990년에 지어진 것이며 승려 의 생활공간 및 법회, 교육의 공간으로 쓰인다. |
 ▲ 이색풍경 ~ 해우소 벽을 가득 메운 조그만 존재들 (동자상, 불상, 돌하루방, 다보탑 등)
|
 ▲ 석암당 혜수 대종사(昔巖堂 慧秀 大宗師)의 부도탑과 비석 석암당 대종사는 절을 세운 정연의 스승으로 그가 입적(入寂)하자 경내 좌측에 그의 사리탑과 비석을 세워 그를 기린다.
|
♠ 내원정사 북쪽에 마련된 자연공간
 ▲ 절 좌측에 자리한 해바라기의 보금자리
 ▲ 푸르게 익은 차밭 |
경내 우측에는 절에서 가꾼 대나무밭과 차밭, 꽃밭이 있다. 해를 닮고 싶어 늘 햇님을 사모하는 해바라기의 수줍은 모습은 극락(極樂)을 꿈꾸며 혹은 부처를 꿈꾸며 그리는 중생들의 모습이다. |
 ▲ 차밭 우측의 대나무숲
| 해바라기 맞은편에는 보성의 녹차밭을 닮은 조 그만 차밭이 있다. 푸르게 익은 차잎은 따뜻한 차 생각을 간절하게 만든다. 이들 자연공간은 내원정사 유치원 아이들의 자연학습을 위해 만 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차밭 우측에는 담양 대나무골테마공원의 죽림 (竹林)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대나무숲이 푸른 물결을 출렁인다. 대나무의 잎사귀 소리 에 귀가 방긋거린다. 대나무 산책로는 조금의 햇볕도 허용치 않을 정도로 무성하여 나를 끈 적거리게 만든 더위의 부산물(땀)이 나살리소 줄행랑을 친다.
대나무숲을 거닐면 아무리 문학과 담쌓고 살아 도 누구나 문학 및 사색쟁이가 된다. |
내원정사를 둘러보고 다음 목적지인 만덕사로 길을 향한다. 만덕사는 사상 방면으로 내려
가야 되는데 택시운전사가 사상 쪽으로 내려가는 고갯길은 험하다며 구덕운동장으로 내려
가서 구덕터널을 지나 감전동에서 내려준다.
감전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만덕역(3호선)에서 내려 절을 품은 만덕골로 올라간다.부산의
부도심인 동래(東萊)와 구포(龜浦) 사이에 들어앉은 만덕동은 구포 방면인 서쪽을 제외하
고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북쪽은 부산의 진산(鎭山)인 금정산(金井山), 남쪽은
백양산이다. 지금은 대단위 아파트와 주거단지로 인구가 제법 많지만, 만덕터널과 만덕사
주변은아직도 전원(田園) 분위기를 진하게 간직하고 있다. 만덕골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
는 거의 산촌이라고 할까? 여기가 정녕 대도시 부산이 맞더냐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만덕역에서 만덕사까지는 2가지 길이 있다.만덕역 2번 출구에서 만덕1터널로 가면 병풍사
입구 정류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가면 만덕사터가 나온다. 이 길은 빠르게 접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만덕1터널은 수레의 통행이 빈번하고 인도도 따로 없으므로 조
금 위험할 수 있다.
다른 길은 만덕역 1번 출구에서 신만덕으로 3분 정도 가면 '중리8길'이란 길이 나온다.그
길로 접어들어 4분 정도 걸으면 4거리가 나오는데 왼쪽으로 꺾으면 굴다리가 나온다.굴다
리를 지나면 3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바로 왼쪽에 소나무가 약간 우거
진 곳이 있다. 자세히 보면 산길이 보일 것이다. 그 산길로 들어서면 밭이 나오면서 내리
막길과 함께 계곡이 나타난다. 계곡의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길다란 돌덩어리와 안내판
이 나오는데, 바로 우리나라에 몇 없다는 알자리 유적이다. 그곳을 지나면 만덕사터 당간
지주를 만나게 되며, 산길의 끝은 바로병풍사입구 버스 정류장이다.
▲ 만덕동 사기부락 알터유적 (배바위) |
만덕사 당간지주 아랫쪽 밭에 누워있는 길다란 돌덩어리, 배처럼 길다고 해서 배바위란 이름을 지닌 이 돌은 윗면이 평평하여 잠깐 누워 한숨 자기에 적당해 보인다. 허나 이곳은 우리나라에 몇 없다는 알터유적으로 '신비스런 바위구멍','신령이 깃든 성혈(聖穴)'이라 불리는 구멍이 발 견되었는데, 이 구멍을 알터라고 한다. (새가 낳는 알과는 전혀 다르다) 이 알터는 단순한 구멍이 아닌 인공이 가미된 2개의 원형으로 정교하게 패인 동심원(同心圓) 알 터로 알터바위는 여러 개 발견되었지만 동심원 형태는 이곳이 유일하다고 한다. 알터의 정체는 아직까지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나 선사시대 신앙유적의 하나로 여기고 있다. 옛 사람들의 손길이 고스란히 담겨진 바위로 중요한 가치를 지녔음에도 아직까지 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도 못하고, 세상에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이렇게 방치되고 있음이 안타깝다. |
▲ 만덕사터 당간지주와 성황당(城隍堂) |
▲ 이보다 더 외로울 수 있을까? 짝을 잃은 채 홀로 서 있는 만덕사터 당간지주 - 부산 지방유형문화재 14호 | 만덕사터에서 남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만덕사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다. 당간지주는 당간(幢 竿)을 걸던 2개의 돌기둥으로 보통 절 입구에 세 워 부처의 세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5분 정도를 올라야 만덕사가 나오니 왕년 의 절의 영역과 규모가 상당했음을 가늠케 한다.
다른 곳의 당간지주는 각각 제 짝과 마주보며 행 복에 겨워하겠지만 이곳의 당간지주는 오래 전에 그 짝을 잃었다. 늙은 홀아비처럼 쓸쓸히 서 있 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안스럽게 한다. 그 래서일까? 그의 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 보 인다, 허나 그의 곁에는 특이하게도 만덕1동 사 기부락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당이 자리해 있어 짝을 잃은 당간지주의 오랜 벗 역할을 해준다.
이 석주는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돌 기둥의 높이는 약 3.5m에 이른다. 다른 당간지주 와 달리 돌을 다듬는 수법이 돋보여 기둥 바깥면 가운데로 도드라진 선을 한 줄 새겼고, 안쪽 면 꼭대기에는 네모난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키도 록 하였다. |
기둥 머리에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2단의 굴곡을 주면서 둥글게 깎았으며, 돌 위에 서 있는 태 반의 당간지주와 달리 파여진 홈에 돌기둥을 심었다. |
♠ 오리무중에 휩싸인 거대한 절터, 왕권분쟁에 휘말려 한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던 어느 고려 왕족의 애달픈 애환만이 잔잔히 전하는 만덕사(萬德寺)터 ~ 부산 지방기념물 3호
|
백두대간의 남쪽 끝으머리인 금정산(金井山)의 남쪽 산자락에는 옛 만덕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만덕사는 창건시기와 자세한 사적(事蹟)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신라 후기나 고려 초에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며 고려 후기에 충혜왕(忠惠王)의 서자(庶子)인 석기(釋器)가 강제로 머리 를 깎고 머물던 곳이라 전한다. 왕족이 머물 정도의 절이니 제법 규모와 인지도를 갖춘 절임이 분명하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경영에 어려움으로 망하거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사라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이후 오랜 세월 자연 속에 파묻힌 이곳은 1970년 동래와 구포를 잇는 만덕터널을 만들기 위 해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다량의 기와조각과 주춧돌이 발견되면서 다시금 세상에 그 모습을 비 추었다. 본격적인 발굴은 1990년부터로 1990년에 1차 발굴(30.25평), 1996년 2차 발굴(150평), 2001년 3차 발굴(500평)을 통해 3층 석탑의 잔재, 불상의 머리, 1m가 넘는 커다란 치미, 팔각좌 대석, 분청사기(粉靑沙器) 등 수많은 유물이 앞다투어 쏟아져 나와 속세를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이곳을 석기가 머물던 만덕사로 굳게 믿었으나 절터에서 '若~'와 기비사(祇毗寺)라 쓰 인 기와 9장이 나와 만덕사가 아닌 기비사란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부산지역 고고학자와 몇 몇 역사학자는 기비사로 여기고 있음) 기비사는 왜국(倭國) 동경국립박물관에 있는 금산사 향완 (香椀)에 적혀있어 현존하던 절임을 알 수 있다.
만덕사터는 전체 면적이 32,865㎡에 이르는 대가람이었다. 금당(金堂)터는 가로, 세로의 길이가 각각 20m로 범어사 대웅전의 4배에 이른다. 절터 전체를 드러내면 이곳의 구체적인 정체와 보다 많은 유물이 나올 것이지만, 절터 대부분이 사유지이고 관계당국의 무관심으로 2002년 이후 발 굴조사는 멈추고 말았다. 지금은 만덕사의 주지인 금산이 힙겹게 혼자서 발굴을 하고 있다고 한 다. 그가 발굴을 하면서 봉황머리 모양의 잡상(雜像)과 치미의 날개, 연꽃이 새겨진 수막새 등 30여 점을 건졌다. 특히 잡상은 궁궐과 성문에 달던 특수한 것으로 만덕사가 예사롭지 않은 사 찰임을 보여준다. 또한 잡상과 더불어 거대한 치미와 금당터는 석기가 머물던 만덕사가 이곳임 을 알리는 조그만 증거라 할 수 있으며, 다시금 절터 전역에 대한 세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절터의 정체가 보다 속시원하게 밝혀졌으면 좋겠다.
오랜 세월 쓸쓸히 터만 남던 이곳은 근래에 절터 한켠에 비록 가건물이긴 하지만 선원(禪院)과 요사(寮舍) 등의 건물 3~4동을 지어 오랫동안 끊긴 옛 만덕사의 유지를 이어간다.
소장 문화유산으로는 앞에서 언급한 당간지주가 있으며 파괴된 탑의 석재를 수습하여 부산시립 박물관 뜨락에 복원했는데, 10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넓다란 절터에는 발굴조사로 다시 햇빛을 쬐게 된 주춧돌이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채 한가로이 여름 햇살을 즐기고 있으며, 절을 받쳐들던 거대한 석축이 진하게 남아있다. 지금은 비록 옛날의 영화로움은 모래성처럼 사 라지고 자연에 파묻힌 폐허의 상태지만, 절의 옛 모습을 머리 속에 나름대로 그려보며 둘러보는 것도 절터 답사의 재미를 한층 더해 줄 것이다.
※ 만덕사터 찾아가기 (2009년 9월 기준) * 지하철 3호선 만덕역 2번 출구에서 만덕제1터널 방면으로 걸어서 13분 * 지하철 3호선 만덕역 1번 출구에서 만덕삼성아파트 정류장, 굴다리를 거쳐 걸어서 20분 * 1호선 동래역(2번 출구), 2,3호선 덕천역(9번 출구)에서 46번 시내버스를 타고 병풍사입구 하 차, 걸어서 3분 * 신만덕 경유 시내버스를 타고 만덕삼성아파트나 만덕역(만덕교차로)에서 걸어가도 된다. * 절까지 차량 접근은 불가하며 주차는 부근 골목에 해야 된다.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1동 32-2 (☎ 051-337-6128) |
▲ 만덕사 금강문(金剛門) 다시 만덕사의 옛 영화를 되찾고자 절이 세워지고 이렇게 초라하지만 금강문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절의 사세가 아직까지는 많이 미약하여 금강문을 지키는 금강역사의 우람한 형상 대신 '金剛力士'라 쓰인 현수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
♠ 만덕사와 인연을 맺은 고려왕족 석기(釋器)는 누구인가? 석기는 충혜왕과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어난 해에 대해선 알려진 바 는 없다. 충혜왕은 고려 제일의 패륜군주로 일컬어질 정도로 꽤 문제가 많았던 위인으로 그의 후궁인은천옹주 역시 충혜왕과 쌍벽을 이루던 음탕한 여인이었다.
충혜왕이 몽고에 의해 폐위되어 이역만리로 귀양가 비명횡사하자 석기는 충정왕(忠定王)에 의해 강제로 만덕사로 보내져 승려가 되었다. 아마도 왕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 여겨 개경(開京)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추방시킨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恭愍王)이 제위에 오르자 몽고에 잠시 갔다 왔으며 1356년 임중보(林中甫) 등이 석기를 왕위에 추대하며 반란을 획책하려다 발각되자 임중보는 처형되고 석기는 제주도로 유배형(流配 刑)에 처해지면서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
|
▲ 만덕사 샘터 절을 찾은 목마른 중생에게 시원한 물을 베푸는 고마운 샘터이다. 거북이가 하루종일 물을 내뿜어 석조에는 물이 마를 날이 없다. |
공민왕은 그가 꽤 부담스러웠는지 석기를 압송해가는 관원(官員)들에게 몰래 바다에 던져 죽일 것을 명한다. 그러나 석기는 운이 좋게도 빠져나와 민가(民家)에 몸을 숨겼는데 석기 제거에 실 패한 관원들은 거짓으로 석기를 죽였다고 보고함으로써 석기는 당분간 자신의 신분을 숨기며 편 안히 은신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1363년, 서북면 도순무사(西北面 都巡撫事) 전녹생(田祿生)은 석기라 불리는 자가 평 양(平壤)에 숨어 반란을 꾀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바로 조정에 보고했는데 공민왕은 바로 의심 이 들어 석기라 불리는 자를 잡아 죽일 것을 명한다. 그리고 얼마 뒤, 전녹생이 석기라 불리는 자를 잡아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는데 공민왕은 그의 목과 함께 석기를 죽였다고 허위 보고를 올렸던 관원들과 석기의 외할아버지가 되는 은천옹주의 아비인 임신(林信)을 처단하여 그 목을 개경 십자(十字)거리에 걸었다.
|
▲ 만덕사 경내 가득 메운 의자와 넓은 책상, 그리고 조그만 파라솔까지 절집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만덕사를 찾은 나그네의 눈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
하지만 전녹생이 잡아 죽인 석기는 실은 석기가 아닌 그와 친분이 있던 승려였다. 석기는 용케 도 도피하여 백언린(白彦麟)의 집에 숨어 살며 약 10년을 버텼으나 결국 1375년, 이인임(李仁任 )에게 붙잡혀 개경으로 압송되어 살해되었다. 그리고 석기의 단 하나 뿐인 아들(이름 모름)도 계룡산(鷄龍山)으로 강제 출가되어 가던 중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
|
▲ 절터 한켠에 조촐하게 만들어진 연못 연못 한복판에 조그만 석불좌상이 자리해 있다. | 석기가 이처럼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단지 왕족이란 이유 때문이다. 부왕(父王)인 충 혜왕은 행실이 불량하여 강제 폐위를 당하고 결 국 몽고에서 비명횡사를 하면서 그 아들인 석기 는 보호자를 잃게 되었고, 충혜왕 다음으로 제 위에 오른 군주들도 석기를 그리 달갑게 대하지 를 않았다. 한결같이 왕위를 노릴 수 있는 위협 적인 인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석기가 어떤 성품의 인물이고 권력에 대한 마음 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우나 제주도 에서 용케 살아남아 20년이나 버틴 걸 보면 숨 는 재주 하나는 꽤 탁월했던 모양이다. 평양에 숨어들어 나름대로 재기를 노린 듯 하나 결국 발각되는 등 하는 일마다 되는 것이 없었다. 고 작 숨어 사는 것 밖에는 별도리가 없었던 그는 결국 꼬리가 밟혀 한많은 삶을 강제로 그만두게 되었으니 참으로 가련한 인물이 아닐 수가 없다. |
▲ 절터를 받치고 있는 거대한 석축 |
만덕사의 옛 흔적으로 산비탈에 절을 세우다 보니 저런 거대한 석축이 만들어졌다. 크기와 모양 도 다들 제각각인 돌들은 오로지 절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헌신했다. 석축의 높이는 3~4m 로 산비탈에 질서정연하게 들어서며 아래를 굽어봤을 만덕사의 장엄했던 옛 모습이 눈 앞에 아 른거린다.
만덕사를 끝으로 늦여름 부산 사찰 투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
* 까페(동호회)에 올린 글은 공개일 기준으로 10일까지만 수정,보완 등의 업데이트가
이루어집니다. <단 블로그는 한달까지이며, 원본
은 2달까지임>
* 본글의 내용과 사진을 퍼갈 때는 반드시 그 출처와 원작자 모두를 표시해주세요.
* 작게 처리된 사진은 마우스로 꾹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오타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즉시 댓글이나 쪽지 등으로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글을 읽으셨으면 그냥 가지들 마시고 댓글 하나씩 꼭 달아주세요.
*공개일 - 2009년 9월 9일부터
* 최종 수정 - 2009년 9월 12일
Copyright (C) 2009 by Pak Yung(박융),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