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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문, 옛 서울시장공관(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 혜화동 봄맞이 나들이 '
(혜화문, 옛 서울시장 공관, 선잠단터)

옛 서울시장 공관

▲  옛 서울시장 공관(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혜화문(동소문) 옛 서울시장 공관 소나무

▲  혜화문(동소문)

▲  옛 서울시장 공관 소나무

 


봄이 차디찬 겨울을 몰아내고 하늘 아래 세상을 곱게 물들이던 4월의 첫 무렵, 종로구(鍾
路區) 동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혜화동(惠化洞)을 찾았다.
혜화동은 서울의 주요 대학가이자 유흥가 및 연극가로 지금까지 수천 번 이상 들락거리거
나 지나다녔는데, 고색의 명소도 여럿 지니고 있어서 가끔 그들을 복습하러 간다. 이번에
는 혜화문과 옛 서울시장 공관 등을 진득하게 복습할 생각으로 길을 나섰는데, 그날의 첫
메뉴는 혜화동고개에 있는 혜화문이다.


♠  한양도성 혜화문<惠化門, 동소문(東小門)> - 국가 사적

▲  동쪽에서 바라본 혜화문

대학로 북쪽 끝인 혜화동로터리에서 삼선교(한성대입구)로 넘어가는 혜화동고개(동소문고개)
에 혜화문(동소문)이 고즈넉하게 자리잡고 있다.
혜화문은 옛 한양도성(漢陽都城)의 동북쪽 성문이자 사소문(四小門)의 일원으로 여기서 사소
문은 북소문<창의문(彰義門)>, 서소문<소의문(昭義門)>, 남소문<광희문(光熙門)>, 그리고 동
소문(혜화문)을 일컫는다.

한양도성 초창기에 지어진 것으로 처음에는 창경궁(昌慶宮) 정문과 이름이 같은 홍화문(弘化
門)이라 불렸으며, 1511년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갈렸다. 임진왜란 때 문루(門樓)가 소실되어
홍예문과 성곽만 있는 상태로 허전하게 있다가 1744년에 다시 문루를 달게 되었다.
혜화문은 동소문 외에 소청문(小靑門)이란 별칭도 가지고 있었으며, 서울에서 경기도 북부와
강원도, 함경도(간도, 연해주 포함)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사람과 화물의 왕래가 빈번했다.

혜화동고개를 오랫동안 지켰던 혜화문은 고약한 왜정(倭政) 시절에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왜정은 1928년 문루를 밀어버렸으며, 1938년에는 홍예문과 북쪽 성곽까지 모두 부시고 고개를
깎아 도로(현재 창경궁로)를 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혜화문은 세상에서 잠시 지워지고 잊혀
진 상태가 되었다.

이후 한양도성 복원계획에 따라 1994년 복원, 재현되면서 다시 살아났는데, 제자리에 세우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창경궁로가 단단히 말뚝을 박은 상태라 원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13m 떨
어진 도로 북쪽 높은 곳에 간신히 자리를 마련해 성문을 닦았다. 그런 연유로 창경궁로에서
봤을 때 성문이 들어앉은 자리가 다소 좁아 보인다.
문 북쪽으로 성곽을 일부 재현했지만 옛 서울시장공관 뒷쪽 성곽과 끊어져 있으며, 남쪽은 창
경궁로로 인해 낙산(駱山) 쪽 성곽과 끊겨 있다. 하여 혜화문 성곽은 그들만의 작은 세상처럼
다소 외로운 모양새가 되었다. 그래도 왜정에게 강제로 사라진 3개의 성문<소의문, 돈의문(서
대문), 혜화문> 가운데 유일하게 복원되었으니 그것이 어디인가. (돈의문과 소의문은 원래 자
리도 여전히 아리송하며 복원할 자리도 여의치 못함)

혜화문 문루는 우진각지붕으로 성문 천정에는 봉황 1쌍이 화사하게 그려져 있는데, 혜화문 주
변이 새들로 인해 농사 피해가 크자 이를 막고자 비보풍수(悲報風水)의 일환으로 그려 넣었다
고 전한다.

혜화문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한양도성의 일원으로 성문은 24시간 개방되어 있으나 문루는
접근이 통제되어 있다.

* 혜화문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28-5 (창경궁로 307)


▲  속세를 향한 절반의 마음, 반쯤 열린 혜화문

▲  혜화문 성문 천정에 그려진 봉황의 위엄

혜화문 주변이 새 때문에 농사 피해가 크자 이를 막고자 비보풍수에 따라 성문 천정에 봉황 1
쌍을 담았다. 과연 봉황의 효과를 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로 인하여 성문 천정이 꽤 장엄하고
화사해졌다.


▲  혜화문의 안쪽 모습

▲  혜화문 북쪽 성곽

혜화문 북쪽 성곽은 옛 서울시장 공관 이전인 창경궁로35길까지 70m 내외로 짧게 재현되어 있
다. 저 성곽길을 통해 창경궁로35길로 내려갈 수 있으며, 혜화문 북쪽과 남쪽은 도로와 주택
들로 인해 성곽 재현이 쉽지가 않다.


▲  혜화문 북쪽 성곽에서 바라본 옛 서울시장 공관
혜화문과 저곳 사이로 성곽과 언덕을 깎아서 골목길과 주택을 내었다.
그래서 혜화문과 저곳이 남남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  혜화문 북쪽 성곽에서 바라본 성북동 지역과
북악산(백악산) 동쪽 자락

▲  혜화문 북쪽 성곽과 옛 서울시장 공관 성곽 사이 골목길

이곳은 창경궁로35길과 창경궁로35다길이 만나는 곳으로 혜화문 북쪽 성곽이 여기서 잠시 끊
긴다. 성곽 안쪽은 한양도성 내로 종로구 혜화동, 바깥쪽은 도성 바깥으로 성북구 성북동(城
北洞)으로 성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이 미묘하게 바뀐다. 물론 같은 서울 하늘 밑이
다.
혜화문 북쪽 성곽과 옛 서울시장 공관 성곽은 근래 손질된 부분이 많아서 일부를 제외하면 맨
들맨들한 하얀 피부를 자랑한다.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옛 서울시장 공관)

▲  옛 서울시장 공관(公館) 정문

혜화문(동소문) 서북쪽이자 한양도성 안쪽 언덕에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로 살아가고
있는 옛 서울시장 공관이 포근히 둥지를 틀고 있다.
이곳은 서울시장이 생활했던 공관으로 시장 공관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닌 왜정 말기인 1941
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사장인 왜인 '다나카 사부로'가 지은 80년 묵은 집이다. 응접실을
갖춘 문화주택 스타일과 왜식 도코노마가 혼합된 잘 지어진 2층 목조 주택으로 전망이 좋은
한양도성 성곽 위에 자리를 잡은 것이 특징이다.

다나카 사부로는 여기서 4년을 팔자 좋게 서식하다가 해방으로 폭삭 망하면서 왜열도로 떨려
났다. 하여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를 지낸 '하준석'이란 친일파 개잡것이 매입하여 10년
을 서식했으며, 독립운동가로 초대해군참모총장과 제5대 국방부장관을 지냈던 '손원일(孫元一
)'이 1955년에 구입해 2년을 거주했다. 그러다가 1957년 기업가 '한석진'이 소유했으며, 1959
년 8월 국가에서 사들여 22년 동안 대법원장 공관으로 굴렸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 3~4대 대법원장 '조진만'이 살았고, 1968년부터 1979년까지 5~6대 대
법원장인 '민복기'가 살았는데, 4.19혁명재판 판결문의 초고가 여기서 작성되었으며, 1971년
에 검찰과 법원의 갈등으로 터진 제1차 사법파동도 바로 이곳에서 타결되는 등, 나름 역사적
인 사건들이 많이 거쳐갔다.

1981년 서울시 소유로 넘어가면서 서울시장 공관으로 전환되었다. 하여 제18대 서울시장 '박
영수'부터 제35대 서울시장 '박원순'까지 32년 동안 13명의 시장이 이곳을 거쳐갔는데, 공관
1층은 공적 공간으로 회의실과 응접실을 갖추고 있었으며, 2층은 시장과 그의 가족의 생활공
간으로 쓰였다.
1991년 세월을 크게 탄 시설을 정비하여 집을 크게 수리했으며, 1995년 주요 행사를 위한 공
간을 증축했고, 2010년에는 지붕을 보수했다.

▲  정문에서 전시안내센터로 인도하는
계단길

▲  정문 기둥에 박힌 갈색 피부의
서울미래유산 딱지


2007년 이후 문화재청은 한양도성 복원을 위해 시장 공관의 이전을 요구했다. 그때부터 이곳
은 한양도성 복원에 방해가 되는 미운털 취급을 받게 되었는데, 공관을 부실 것인가.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계속 논쟁이 오갔다.
그러다가 2012년에 마련된 '한양도성 보존관리활용 마스터플랜'을 통해 한양도성의 재현, 복
원이 아닌 원형 존중과 보존에 초점을 두면서 공관의 살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2013년 발굴
조사를 위해 성곽 하부 구조 위에 지어진 건물 일부를 부셨는데, 시장 공관이 성곽 하부 구조
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여 공관을 보존하기로 흔쾌히 결정을 보면서
미운털 신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2013년 12월 시장 공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했으며, 공관에서 물러난 기존 건물은 한양도성과
이곳을 거쳐간 역사를 다룬 전시관으로 손질하여 2014년 속세에 임시 개방되었다. 허나 그해
7월 사적분과 제8회 문화재위원회 검토에서 확대발굴조사가 결정되면서 8월부터 다시 발굴조
사를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성벽 뒤채움 영역 위에 있는 건물의 일부를 부셨다.

이후 건물을 손질해 2016년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란 이름으로 속세에 완전히 개방되
었다. 오랫동안 있는 것들과 고위 위정자들의 폐쇄된 비싼 공간으로 살아오다가 누구든 마음
편히 발을 들일 수 있는 대중적인 공간으로 전격 해방된 것이다.
이후 입소문을 통해 찾는 이가 부쩍 늘었으며, 대학로 주변의 새로운 명소이자 혜화동의 꿀명
소로 바쁘게 살아간다.

건물 자체가 전시안내센터로 살아가고 있는데, 1층에 제1,2전시실, 2층에 제3,4,5전시실을 닦
았다. 제1전시실에는 한양도성과 혜화문의 역사를, 제2전시실에는 한양도성의 지세와 혜화문
주변 지형과 경관을, 제3전시실은 시장 공관과 이곳을 거쳐간 서울시장, 그리고 그들이 이곳
에 기증한 유물을, 제4전시실은 공관의 전체적인 역사와 사연을, 제5전시실은 영상실로 대한
뉴스에 나온 서울시장 공관의 문화행사 소개와 조선시대 역대 한성판윤(漢城判尹, 서울시장).
역대 서울시장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1층 옆구리에는 까페가 있어서 차 1잔의 여유도 누릴
수 있다.

공관에 딸린 정원은 고급 주택 정원급으로 상큼하고 정갈한 모습이며, 온갖 나무와 수풀, 꽃
이 자라나 봄과 가을 풍경이 꽤 달달하다. 시장 공관으로 살았던 시절에 건물 수리와 시장직
인수인계 과정에서 집이 비어있던 때가 있었는데, 그 사이 관리소홀로 수풀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나 입주를 꺼린 시장도 있었다.
집 북쪽과 동쪽은 한양도성 성곽으로 막혀있으며, 서쪽은 주택으로 막혀있다. 하여 정문이 있
는 남쪽으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관람시간 9시30분~17시30분, 입장료 없음, 매주 월요일과 1월 1일, 추석, 설날 휴관)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27-1 (창경궁로35길 63,
  ☎ 02-766-8520~21)
*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홈페이지는 ☞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  근사한 모습의 옛 서울시장 공관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중간쯤에 보이는 유리문을 통해 건물 내부로 발을 들이면 된다. 내부로
들어설 때, 실내화로 갈아타서 들어가야 되며, 신발은 신발장에
잠시 맡겨두면 된다.

▲  제1전시실 하얀 벽에 그려진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文分界之圖)

제1전시실은 한양도성과 혜화문의 역사를 다룬 공간으로 관련 자료(상당수는 모조품)를 여럿
머금으며 그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영조(英祖) 시절 한양도성을 3개 구역으로 나누어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 어
영청(御營廳)의 삼군문(三軍門)에서 관리하게 했는데, 그 구역을 표시한 지도가 '도성삼군문
분계지도'이다. (지도 원본은 서울대 박물관에 있음)


▲  도성도(都城圖)
조선 영조 때 간행된 조선강역총도에 포함된 도성도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도성도 가운데 가장 늙은 것으로 혜화문에 문루가 없는 것으로 보아서
문루가 다시 세워진 1744년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 도성도는 모조품;)

▲  탁본된 혜화문 현판
1744년 혜화문 문루를 다시 달면서 마련된 현판으로 그 시절 명필로
명성이 자자했던 조강이(趙江履)가 썼다.

▲  1928년 이전에 담겨진 옛 혜화문의 빛바랜 흑백 사진과
그 이후 혜화문 사진(1929~1938년 사이)

▲  동아일보 1928년 7월 12일 2면에 실린 동소문과 수구(水口)
무단 철거 관련 기사

▲  2층에 있는 제3전시실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이곳을 거쳐갔던 서울시장 관련 자료와 영상, 사진,
그들이 기증한 물건과 문서를 머금고 있다.

▲  2층에 있는 제4전시실
이곳 공관의 전체적인 역사와 주요 사연을 머금고 있다.

▲  속살을 드러낸 2층의 목조 천정

▲  옛 서울시장 공관의 2층 구조

◀  서울시장 공관 시절, 여기서
쓰였던 고급진 그릇과 컵들

▶  박원순 시장이 이곳에서 살았을 때
신었던 하얀 고무신

     ◀  제27대 시장인 이원종의 유물들
1993년 이원종 시장이 왜열도 동경에서 열렸던
세계수도시장회의에서 중공 북경시장에게 선물
로 받은 삼정솥을 비롯해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종이칼, 시장 재임 기간에 사용했던 안경
과 안경집, 만보계, 만년필 등이 들어있다.


▲  제22대, 제31대 서울시장을 지낸 고건의 유물들
고건이 시장 재임 시절, 자신의 집무실 책상 유리 밑에 항상 끼워두었던
도시고속화 도로망도와 지하철 노선망, 2000년 7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사용했던 업무 일정표이다.

        ◀  이명박이 남기고 간 것들
최악의 시장과 대통령으로 악명이 높은 이명박
이 하이서울 장학생에게 형식적으로 보낸 친필
편지 초고와 2003년 10월 23일 잠실실내체육장
에서 열린 챔피언결정전 3차전 시구에서 썼던
글러브와 야구공이다.

     ◀  오세훈이 남긴 개량한복과 컵
이명박 못지 않은 최악의 시장으로 악명이 대
단한 오세훈이 학생들 급식 문제로 아주 개난
리를 피우던 예전 시장 시절 여기서 입은 옷과
컵이다.
어리석은 서울 시민들은 그를 그렇게 겪었음에
도 또 시장으로 뽑아주는 희대의 개짓을 보여
주었으니 서울의 앞날이 참으로 걱정된다.


▲  봄이 내려앉고 있는 공관 앞 뜨락 산책로

▲  1층 제2전시실 (북쪽 공간)

제2전시실은 1층 안에 들어있지만 실내화로 갈아타야 되는 제1전시실과 2층(3/4/5/전시실)과
달리 바깥으로 나가서 접근해야 된다. 관사 손질 및 한양도성 발굴조사로 내부를 밀어버리고
마치 옛 가옥의 부엌이나 창고처럼 만들었는데, 여기는 발굴로 나온 한양도성의 흔적과 성돌,
그리고 이곳에 있던 관사 시설의 일부가 들어있다.

▲  1층 제2전시실의 목조 천정

▲  1층 제2전시실 (남쪽 공간)


▲  글씨가 새겨진 옛 한양도성 성돌 (제2전시실)

숙종(肅宗) 시절 것으로 여겨지는 늙은 성돌이다. 그때는 도성 수비군이 성곽 보수를 담당했
는데, 공사를 담당한 군영과 책임자, 감독관, 공사 시기 등을 성돌에 새겼으니 그 성돌을 어
려운 말로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 부른다. 즉 글씨가 새겨진 성돌이다.
한양도성에는 이런 각자성석이 200개 이상 발견되어 도성에 얽힌 이야기를 많이 알려주고 있
으니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보따리처럼 소중한 존재들이다. 옛날에는 성곽 같은 국가의 주요
시설에 대한 신축, 중수, 보수 때 대략적인 것만 기록하지 소소한 것들까지는 잘 남기지 않는
편인데, 조선은 작은 것까지 배려하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이래서 조선은 기록 최강의 왕조라
고 하는 모양이다.


▲  글씨가 새겨진 또 다른 한양도성 성돌

▲  하늘을 나는 새의 눈으로 바라본 혜화문(왼쪽 성문)과 옛 서울시장
공관(오른쪽 주황색 지붕)의 항공사진

▲  성곽 여장이 둘러진 공관 동쪽 뜨락
이곳은 뜨락의 동쪽 구석이다. 한양도성 성곽에 완전히 막힌 곳으로
여장 너머로 혜화문과 낙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산책로가 달달하게 이어진 공관 남쪽 뜨락 (서쪽 방향)

▲  그림 같은 2층 주택, 옛 서울시장 공관 (동쪽에서 바라본 모습)

집도 그림 같지만 뜨락 또한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한다. 완전 수채화 속에 깃든 상큼한 풍경
, 이런 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정말 몸살 나게 부러워진다. 아파트나 빌라 같은 성냥갑 거주
지에서는 절대로 누릴 수 없는 단독주택만의 치명적인 매력이다.


▲  봄내음에 잠긴 북쪽 뜨락 (서쪽 방향)
봄의 후광을 받은 온갖 수풀과 꽃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이곳의 봄 풍경을
크게 돋군다. (북쪽은 성곽으로 막혀있음)

▲  봄내음에 잠긴 북쪽 뜨락 (동쪽 방향)

▲  서쪽에서 바라본 옛 서울시장 공관과 까페

이렇게 보면 먼 지방이나 바닷가에 잘 차려진 까페나 펜션 같은 모습이다. 허나 현실은 서울
도심에 있는 한양도성 전시안내 공간.
이곳 까페에서는 커피와 빵을 팔고 있는데, 가격은 시중과 거의 비슷한 것으로 기억한다. 여
기서 일행과 시원한 커피 1잔 섭취하며 잠시 일다경의 여유를 누렸다.


▲  옛 서울시장 공관에서 바라본 동쪽 방향

푸르른 봄하늘 아래로 성북동 남부 지역과 숲동산을 이루고 있는 성북공원, 그리고 언덕에 크
게 들어앉은 한신한진아파트가 두 망막에 들어온다. 제아무리 집과 아파트, 언덕이 크고 높다
고 한들, 하늘 아래에 작은 점일 뿐이다.


♠  한양도성 창경궁로35다길 구간과 선잠단(先蠶壇)터

▲  한양도성과 창경궁로35다길 (옛 서울시장 공관 북쪽 밑)

옛 서울시장 공관을 둘러보고 창경궁로35다길로 나왔다. 이곳 이후로는 메뉴를 정한 것이 없
어서 발길이 닿는데로 움직이기로 했는데, 어차피 이곳 주변에 늙은 문화유산과 명소들 대부
분 인연을 지은 상태라 아무 곳이나 복습해도 상관은 없다.
일단 한양도성 성곽을 따라 성북동으로 이동하기로 했는데, 옛 서울시장 공관 북쪽 골목길(창
경궁로35다길)을 이용해야 된다. 성곽 윗도리에는 옛 서울시장 공관을 시작으로 정원이 딸린
집, 빌라들, 혜성교회, 경신중고교가 연이어 들어서 있는데, 공관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유지
라 이쪽 성곽길을 해방시키기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지금은 성곽길로는 갈 수 없고, 이렇게
성곽 바깥 길로 이동해야 된다.


▲  한양도성과 창경궁로35다길 ① (서쪽 방향)
한양도성 성곽을 경계로 바깥은 성북구 성북동, 성곽 안쪽은 종로구 혜화동이다.

▲  한양도성과 창경궁로35다길 ② (동쪽 방향)

▲  움푹 낮아진 한양도성 성곽 (혜성교회 옆 공원) ①

이곳에는 주택들이 가득 들어차 성곽을 가리고 있었으나 근래 그들을 매입하여 밀어버리고 성
곽 앞에 작은 공원을 닦았다. 그로 인해 주택 뒤에 가려졌던 성곽도 다시 모습을 내밀며 햇살
을 누리게 되었는데, 성곽을 이루는 성돌에 검은 고색의 기운이 자욱하다.
옛 서울시장 공관 옆 성곽은 여장이 재현되어 있으나 그 이후부터 경신중고까지는 개인 사유
지에 묶인 탓에 여장은 없다. 그저 장대한 세월에 지친 성곽만 길게 이어져 있을 뿐이다. 일
부 구간은 성곽이 크게 낮아지기도 하나 성곽은 그런데로 남아있어서 나중에 성곽 위에 씌워
진 속세의 굴레를 모두 벗기고 여장과 탐방로만 닦으면 된다.


▲  움푹 낮아진 한양도성 성곽 (혜성교회 옆 공원) ②

▲  한양도성 앞 창경궁로35다길에서 바라본 천하 (북쪽 방향)
봄에 물들어가는 성북동 일대와 북악산(백악산) 동쪽 능선, 그리고
그 너머로 북한산(삼각산)까지 살짝 시야에 들어온다.

▲  선잠단터(국가 사적) 계단과 표석

한양도성 밑도리를 따라 이어진 창경궁로35다길을 따라 경신중고 밑을 지나면 성북역사문화공
원과 함께 성북초교앞 교차로가 마중을 한다. 이곳에 이르니 바로 앞에 한양도성 와룡공원길
구간부터 성북초교 동쪽에 선잠단터, 그리고 심우장과 길상사 등 성북동의 여러 명소를 두고
잠시 선택장애를 겪었는데, 어디를 복습할까 궁리하다가 선잠단터를 사진에 담은지도 오래되
고 해서 그를 찾았다. 선잠단터는 성북동에 들어설 때마다 거의 마주치는 곳이라 너무 익숙해
진 존재이다.


▲  바깥에서 바라본 선잠단 내부

성북초교 동쪽 길가에 자리한 선잠단은 조선시대 주요 국가 제단의 일원이다. 이곳은 누에를
처음 쳤다고 전하는 서릉씨(西陵氏)를 신으로 삼아 제를 지내던 곳으로 그 제례를 선잠제(先
蠶祭)라고 한다.
선잠단은 연해주(沿海州, '연해'란 이름은 고려 때 생겨남)와 만주, 그리고 중원대륙에 많은
지역을 가지고 있던 고려 때 시작되었다. 비리비리한 조선으로 세상이 바뀐 이후, 한동안 중
단되었다가 1400년 3월 초사일(初四日)부터 다시 행했는데, 1414~1430년 사이에 선잠단을 새
로 만들었으며, 1471년 성종 시절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제단은 사직단(社稷壇)과 비슷하게 만들었지만 규모는 그보다 조금 작은데, 둘레는 사방 2장
3척, 높이 2척 7촌이며, 사방(四方)으로 나가는 계단을 4곳 내었다. 그리고 제단을 둘러싼 상
단과 하단의 담장 둘레는 각각 25보였다. 그리고 제단 앞쪽 끝에 뽕나무를 심어 궁궐 잠실에
서 애지중지 키운 누에에게 먹였다. 1477년 창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만들었으며, 누
에치기를 장려하는 차원에서 왕비가 직접 누에를 길러 실을 뽑는 이벤트인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선잠제는 매년 3월 초사일에 지냈는데, 신하를 보내 제례를 주관했으며, 풍악을 울리고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일종의 제례악(祭禮樂)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이 의식은 1908년까지 이어져 오다가 그해 7월 순종이 '칙령(勅令) 제50호<향사리정(享祀釐整
)에 관한 건>'를 내려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당과 제단을 대거 정리하면서 선잠단과 선농단(先
農壇, 서울 제기동)의 신위를 모두 사직단으로 옮겼다. 그로 인해 선잠단은 몸뚱이만 남게 되
었다.

왜정은 선잠단 자리를 민간에 팔아먹었으며, 선잠단의 원래 모습을 알지 못하게끔 아주 깔끔
하게도 부셔버렸다. 그런데 개웃기는 것은 왜정이 조선 땅의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1939년
선잠단터를 문화유산 지정 등급인
보물 17호로 지정해 앞/뒤가 전혀 안맞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이다. 부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문화재로 지정하다니 망국(亡國)의 제단을 아주 제대로
엿먹인 셈이다.

해방 이후, 제단터에 잔디를 입히고 네모난 표석을 세웠으나 남쪽과 서쪽에 도로가 생기면서
선잠단 자리는 크게 축소되었다. 1990년 이후 성북구청에서 선잠단 주변 528평을 매입하여 홍
살문을 세우고 뽕나무를 심었으며, 제단터에는 표석과 잔디를 입혔다. 그리고 1993년부터 다
시 선잠제를 여니 1908년 이후 85년 만에 부활이다.

2016년 선잠단 복원사업을 벌이면서 선잠단터 일대를 싹 들추어 조사했고, 그때 나온 결과를
토대로 제단 위치와 흔적을 확인했다. 하지만 도로와 개인 주택들로 공간이 무지하게 줄어든
상태라 왕년의 모습으로 복원하지 못하고 축소 재현된 점은 실로 아쉽다. 하여 지금 모습은
왕년 시절의 축소판이라 보면 된다.

성북구는 매년 5월 초/중순에 선잠제를 거행하고 있으며, 선잠단터에 가득 심어 조금은 산만
하게 보였던 뽕나무들은 선잠단 복원 과정에서 상당수를 뽑아버려 예전보다 많이 말끔해졌다.

* 선잠단터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64-1


▲  선잠단터 밖으로 나온 선잠단터 표석
왜정이 선잠단터를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세운 멋대가리 없는 네모난 표석이다.
원래는 선잠단 제단터에 있었으나 선잠단을 복원하면서 선잠단 바깥으로
내보냈다.


선잠단은 선잠제를 지내던 제단과 상유(上壝, 제단 주위의 터를 닦고 낮은 담장을 두룬 공간
으로 의례를 행하는 신하들이 다니는 곳), 하유(下壝, 제단 아래 주위로 터를 다지고 낮은 담
장을 두룬 공간으로 제관이 의례를 행하고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며 일무가 춤을 추던 곳), 홍
살문, 예감(瘗坎, 폐백과 축판 등 제사에 쓰인 물품을 묻거나 태우던 곳), 담장을 지니고 있
다. 복원 이전에는 홍살문과 제단터, 표석, 그리고 뽕나무들이 있었다.

이곳은 자유 공간이나 그날 따라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여 내부로 발도 들이지 못하고
이렇게 철책 밖에서 금지된 땅을 대하듯 바라봐야 했다. 허나 철책 밖에서 선잠단 내부가 훤
히 보이므로 굳이 무리를 해서 월담할 필요는 없다.

본글은 분량상 여기서 끝, 이후 내용은 별도의 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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